4춘기

노처녀 히스테리 맞습니다.

by JEMMA

대학생 때 어떤 세미나에서 인생 계획표 세우기를 한 적이 있다. 그때 세운 계획에 따르면 지금쯤 나는 '덕업일치'의 삶을 살며 초등학생 자녀를 키우는 아줌마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덕업일치는커녕 덕질조차 시큰둥해진 채, 초딩을 키우는 게 아니라 남이 낳은 초딩들과 싸우면서 살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학원이 아니라 학교 수업도 땡땡이치던 내가 연차도 못 쓰고 수업해야 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선생님들을 싫어하던 내가 선생님 소리 들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삶은 뜻대로, 예상대로 되지 않았다. 열심히 했는 데 망했고 대충 했는데 성공했다. 천사같이 굴면 악마들이 공격했고 악마같이 굴면 천사와 악마들 모두에게 인기가 많아졌다. 당기면 도망가고 밀면 달라붙었다. 혹여 마음 상할까 싫은 소리 제대로 못 하고 물러 터져서 '천사 쌤', '프린세스 쌤'이라고 불릴 때는 청개구리 같던 아이들이, 빽빽 소리치고 갈궈서 울리는 '양아치 쌤'으로 거듭나자 순한 양이 되었다.


모든 게 청개구리 같다. 인생은 청개구리들로 가득하다. 청개구리 같은 계획, 청개구리 같은 학생들, 그리고 청개구리 같은 나. 애초에 내가 청개구리 같으니 삶도 그렇게 굴러가는 것이겠지. 부모님에게도 청개구리 같은 딸이다. 여전히 엄마와 티격태격 싸운다. 최근에도 싸워서 전화도 안 하고 본가에도 가려다가 안 가고 있다. 고향 친구(기혼)와 인스타 디엠으로 40살 다가오는 게 싫다는 얘기를 하다가 만나서 수다 떨고 싶은데 엄마랑 싸워서 당분간 고향에 안 갈 예정이라고 하자 4춘기라고 한다. 그 말에 갑자기 터져서 한참 동안 웃었다. 아, 이런 걸로 웃어. 진짜 늙었나 봐.


나이 드는 게 별스럽지 않은 삶을 살고 싶었다. 30대면 30대에 맞게, 40대면 40대에 맞게, 50대면 50대에 맞게 살면 된다고 생각했다. 평범한 직장 생활하고, 좋아하는 일 하고, 나이 차면 결혼 하고, 아이 낳으면 아줌마 되고. 외모 사그라들고, 세대 차이 때문에 점점 밀려나도 받아들이고. 노약자 되면 젊은이들에게 공경받고. 계획대로 되는 삶이란 그러했다. 그러니 나이 든다고 서러울 것도 없었다.


그러나 청개구리 같은 인생은 이루지 못한 것들 투성이었고, 그래서 나이 드는 게 서러웠다. 부모님에게 늙은 애기가 된 것도 싫었다. 주변 사람들은 삶의 계획표에 따라서 착착 앞으로 나아갔다. 취직하고, 가족을 이루고, 승진을 하고, 사업을 차린 친구들과 지인들. 비슷한 시기에 학원 강사로 일을 시작해서 나처럼 경로를 틀지 않고 주욱 밀고 나가 현재 원장 또는 부원장이 된 대학 동창과 선배들. 대학원 졸업 후 그 분야에 몸 담으며 동문회에 참석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동기들. 나처럼 늦어지고 실패해도 결국에는 막차에 탑승하여 나아갈 수 있던 사람들. 왜 나는 데려가주지 않았을까. 왜 내 자리는 없었을까. 모든 게 다 내 잘못이라고만 하기에는 억울하기도 했다. 나와 비슷한 노력, 나와 비슷한 실력으로도 무난하게 나아간 사람들도 있었으니까. 내가 분에 넘치는, 대단히 큰 욕심을 부린 것도 아니었으니까.


이런 생각을 하면 안 그래도 심통이 나는데 때때로 뒤처진 사람 취급, 동생 취급, 인생 후배 취급을 당했다. 쟤는 벌써 애를 낳아서 안고 다니는데 넌 뭐냐. 나이가 그렇게 많은데 시집도 못 가고 뭐 했냐. 학원 강사 안정적이지 않잖아. 지금이라도 교사로 취직하는 게 낫지 않냐. 공부를 한다고? 빨리 시집이나 가서 집에 보탬이 되어야 하지 않겠냐. 어른들의 잔소리는 물론이거니와 또래 지인들은 내가 조언을 구하지도 않았는데 제멋대로 조언을 하며 인생 선배처럼 굴기도 했다. 처음에는 결혼 생활에 대해 아는 척을 하다가 점점 직장, 삶의 방식, 사고방식 등 다른 영역에서도 나를 동생 대하듯 말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속으로는 상처받았지만 안 받은 척, 쿨한 척을 했다. 그러지 않으면 노처녀 히스테리라고 욕을 먹거나 동정받아서 더 비참해지니까. 그러다 노처녀 히스테리는 주로 내가 아닌 남들 때문에 만들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참을 필요 없구나. 이러나저러나 오지라퍼들에게 시달릴 거 그냥 히스테리라는 게 뭔지, 내가 어디까지 악마처럼 변할 수 있는지 확실하게 보여주기로 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청개구리에는 청개구리! 오지라퍼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또는 관계를 단호히 끊어냈다. 그러자 청개구리 같은 오지라퍼들은 사라져 버렸다. 인간관계도 파탄 나지 않았고, 오히려 쓸데없는 사람들을 정리할 수 있었다. 괜히 착한 척했네. 속이 후련했고 스트레스도 줄었다.


요즘도 화가 나는 순간들이 더러 있다. 엄마와 싸울 때 엄마가 애 둘 낳아 키우던 나이가 지금 내 나이라고,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했다. 젊은 꼰대에게는 나도 당신과 나이가 비슷하기 때문에 깨달은 삶의 교훈도 비슷하다고 했다. 내가 결혼 생활에 대해 모르는 것처럼 당신도 노처녀로 사는 게 뭔지 모르지 않냐고 했다. 이런 말 하면 또 불쌍히 여기거나 히스테리 부린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젠 망설이지 않고 기꺼이 히스테리를 부린다. 히스테리는 노처녀만 있나. 아줌마 히스테리도 있는데. 할머니 히스테리도 있다. 남자도 마찬가지다. 노총각 히스테리, 아저씨 히스테리, 할아버지 히스테리. 나보다 심한 사람들 많이 봤는데. 나이 들고 스트레스 쌓이고 주변에서 들들 볶으면 다 생기는 거다.


40을 앞두고 찾아온 4춘기. 어쩔 수 없는 인생의 과정이다. 늙음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더라도, 그 모습이 추해지기 전에는 멈추고 받아들여야 한다. 억지로 꾹꾹 참으며 상처받지 말고 히스테리를 부릴 때 부리더라도, 정당한 히스테리라고 인정받을 수 있는 만큼만 부리고 나머지는 거두어들여야 한다. 잘 화내고 잘 푸는 법을 배워야 한다. 내면에 폭풍이 몰아치더라도 감정에 끌려다니지 말아야 한다. 참지 말아야 할 것은 참지 말되 수용할 것은 수용해야 한다. 균형을 잡아야 하는 것이다.


이만큼 나이를 먹었으니까 이만큼 성숙했다고 단정할 수 없다. 성숙한 척하면서 사실은 유치한 경우가 너무나도 많다. 내 유치함, 열등감, 자격지심, 약점, 무능함을 감추려고만 한다면 추한 4춘기를 보내게 될 것이다. 그러니 나의 추한 모습들을 용기 내서 찬찬히 들여다보자. 고쳐야지. 그리하여 4춘기를 멋지게 극복하고 당당한 40대가 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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