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절 지나 배기지 클레임

한 계절만으로는 아쉬워 계속 가는 여행자여.

by JEMMA

올여름휴가의 마지막 일정은 제주도였다. 올해는 여러 사정으로 여유롭게 여행하지는 못했고 동생 가족을 보러 다녀왔다. 제주도 한달살기를 한 지 딱 일 년 만이다. 그때의 설렘이 기억나 그립기도 했다. 그리웠던 장소를 가볼 수 있으려나 했는데 아쉽게도 가보지는 못했다. 다음에 제대로 쉬러 올 때를 기약해야겠다. 그래도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돌아왔다.


제주도에 가는 건 늘 '7말 8초' 휴가철이라 제주도의 여름 모습밖에 경험해보지 못했다. 이 시기는 극성수기라 비행기 티켓값도 제일 비싸고, 어딜 가나 관광객들로 붐빈다. 한여름의 제주도는 푹푹 찌는 더위와 청량한 풍경이 대조를 이룬다. 강렬하고 쨍한 경치에 이끌려 여기저기 다니고 싶어도 어마어마한 더위 때문에 야외에 오래 머무를 수 없다. 늘 오름에 올라가 보고 싶었지만 이런 날씨에 오름에 오른다는 건 꿈도 꿀 수 없었다.


평소 여행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여행에서 현실로 돌아왔을 때 느껴지는 갭차이가 싫었기 때문이다. 나는 늘 삶이 만족스럽지 않았는데, 여행을 다녀온 후에는 삶이 더더욱 만족스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지인들이 여행계를 만들어 함께 해외여행을 다니자고 해도 거절하곤 했다. 여행은 안중에 없었다. 이 삶만 편안해질 수 있다면 여행 같은 건 가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고 문득 내 욕심과 실망이 끝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마음으로는 어디든 가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삶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머릿속에 꽃밭만 가득한 사고방식을 좋아하지 않았다. 늘 최악의 경우를 먼저 생각하는 내 성격이, 때때로 남들은 너무 부정적인 게 아니냐고 했지만 나는 이게 낫다고 생각했다. 안될 것 같으니까 안될 거라고 하고, 될 것 같으니까 될 거라고 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잔뜩 기대했다가 실망감에 무너지는 것보다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살다 보니 모든 게 혼란스러워졌다. 머릿속에 꽃밭만 가득한 사람이 정말로 꽃밭에 들어가는 걸 보기도 했다. 실망감을 느끼기 싫어 마음의 준비를 하면 어김없이 실망할 만한 일이 생겼고, 나도 머리에 꽃 좀 채워보자 하며 흉내를 내면 어김없이 좌절을 맛보았다. 정말 알 수 없었다. 내가 비관적인 건지, 낙관적인 건지. 내 능력과 에너지에 비해 너무 과분한 꿈을 꾼 건지, 내가 나태했던 건지. 분명 더 이상 무슨 노력을 해야 했냐고 울부짖었지만, 돌이켜보니 내가 진짜로 노력을 했던 건지 잘 모르겠다.


이 세상은 정말로 남들을 짓밟으며 아득바득 치고 올라가야 하는 걸까? 눈에 독기를 가득 품고 승부욕이 활활 타오른 채 그렇게 내달려야 하는 걸까? 그 정도로 간절히 원하는 게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하나. 그런 사람의 노력은 어떻게 하나. 과도하게 푸른 꿈, 무능력, 나태함, 부족했던 믿음, 어리석은 선택. 그중 뭐부터 책망해야 할지 알 수 없다.


"그럼 넌 하고 싶은 게 뭔데?"

이 질문은 내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하는 질문이다. 모든 동력을 잃던 날, 수천 개의 화살들이 마음에 박힐 때 그중 하나였고 좀비와 같이 되살아나 지금까지도 여전히 날아들어 나를 아프게 한다. 하고 싶은 게 뭐냐고? 하고 싶은 게 뭐냐고? 울분에 가득 차 따지고 싶다. 그러나 말을 해서 뭐 하겠나. 이루지 못했고, 마음이 다하여 돌아서 버렸는데. 끝나 버린 마음을 가진 나에겐 그 어떤 조언도 효력이 없을 텐데.


"OO 씨, 정말 그렇게 계속 학원 강사 하면서 살 거야?"

내가 마지막 기회를 날리던 날 들었던 질문이다. 내가 코로나를 뚫고 나갈 만큼 유능하지 못하다는 것, 30대 중반에 존버한다며 버티다가는 몇 년이 그냥 날아가버릴 거라는 것, 그 직종은 무경력 상태가 길어질수록 치명적이라는 것, 그때 가서 학원가에 돌아온들 이곳조차도 자리 잡기 힘든 나이라는 것을 깨닫고 마음을 다잡았다. 꿈을 접을 것이다. 더 이상 마음 아파하지도 불평하지도 않을 것이다. 소명이란 걸 찾을 수 없다면, 내가 하고 있는 바로 그 일을 소명으로 만들 것이다. 굳게 마음먹은 나는 뼈아픈 그 질문에도 돌아서지 않았다. 어쩌면 잘못된 선택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잘못된 선택이 아니라고 하면 그만이다. 선택한 길은 잘못된 길이 아니다. 내가 가기로 결정한 길이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 그 문을 닫았다.


"하고 싶은 거 없어요."

이젠 그렇게 대답하고 말을 돌린다. 나를 바보라고 생각하겠지. 그러나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신경 쓰지 않는다. 내가 하고 싶은 게 있다한들 또는 없다한들, 이 삶을 꾸려 나가야 하는 건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생각처럼 잘 되지 않아도, 문제가 생겨도, 마음에 들지 않아도 나는 여전히 최선의 선택으로 최선의 삶을 만들어나가야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학원가 생활이 내게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더욱 강해진다. 이 마음이 들지 않게 하려고 그토록 발버둥을 쳤는데도 그렇다. 그래서 요즘, 다시 길을 잃었다는 생각에 순간순간 의기소침해지곤 한다.


실패하고, 실수하고, 잘못 선택하고. 내 삶의 한 계절이 이렇게 지나간다. 아니 지나가지 않는다. 지긋지긋한 한 계절에 계속 머물러 있다. 나는 사계절을 지나고 싶다. 사계절이 지나면 이 여행길을 마치고 돌아가고 싶다. 돌아갈 때는 뿌듯하게 웃고 싶다. 마지막 날에 환희의 웃음을 짓기 위하여 이 계절의 끝을 찾아 더듬거린다. 다음 계절, 다음 계절, 그다음 계절이 올 수 있도록.


이젠 다른 계절에 제주도에 가고 싶다. 한적하고, 꽃이 피고, 단풍이 들고, 바람이 불고, 오름에 올라갈 수 있고, 야외 테라스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며 따뜻한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계절에. 따분하기 그지없는 7말 8초의 극성수기 휴가철만을 손꼽아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 그런 날에, 이 삶도 새로운 계절을 맞이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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