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화 연대기)
중간에 3년 정도 대학원 생활과 진로 변경 도전 기간을 제외하면, 대학 졸업 후 줄곧 사교육 업계에 종사해 왔다. 경력 많은 강사들을 보면 한 학원에서 5년 이상 근무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나는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이직을 많이 했다. 오늘은 나의 퇴사에 대해 기록해보려고 한다. 기록할 필요 없는 몇 군데는 걸렀다.
#1. 입시학원, 중·고등부 영어 내신&모의고사 수업
스물다섯 살에 대학을 졸업하고 본가가 있는 지역에서 학원 강사 생활을 시작했다. 돌아보면 고용주는 이런저런 일을 쉽게 시키기 쉬울 테니 경력이 없고 어린 나를 고용한 것 같다. 그 부분은 괜찮다. 오히려 아무것도 모르는 나를 뽑아 주었으니 감사하다. 처음에는 중3과 고등부를 맡았다가 점점 어린 학년까지 맡게 되었다. 당시는 10시 이후 수업 금지라는 법이 없었거나 잘 지켜지지 않던 때였다. 그래서 자정이 훌쩍 넘어서까지 수업을 했다. 고용주는 급여 부분에서는 섭섭하지 않게 챙겨주려고 노력했고 돈 가지고 장난치지 않았지만, 내가 주말에도 수업을 하고 오전 11시든 새벽 1시든 본인이 필요해서 부르면 나오길 원했다. 나 말고 다른 강사들은 모두 30대라 대놓고 요구하지 못하는 것들을 내가 해주길 바랐고, 내가 거부 의사를 보이면 섭섭해했다.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첫 직장이니 최소 2년은 버티자는 마음으로 이를 악물고 버틴 후 퇴사했다. 그만두는 과정에서 고용주가 너무 마음이 상해서 유종의 미를 잘 거두지 못했지만 (마지막 퇴근인데 나 보기 싫어서 사라진 후 섭섭하다는 장문의 카톡 보냄) 세월이 지난 후 다시 연락이 닿아 잠깐 찾아갔었다. 다음에 그 지역에 가면 차 한잔 하기로 했다.
#2. 입시학원, 예비중등과 중·고등부 영어 내신&모의고사 수업
첫 학원을 그만두고 다른 원장님으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옮긴 학원이다. 그런데 처음에 은근슬쩍 제시했던 급여와 실제 급여가 많이 달랐고, 거기에 대해서 명확하게 미리 얘기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시작부터 삐걱거렸다. 이 당시 나는 대학원 공부를 하기 위해 전보다 일을 줄이기를 원했고 고용주도 그걸 알고 나를 스카우트를 했지만 일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결국 두 달 만에 그만두겠다고 하니 덜 준 급여를 마저 줬다. 하지만 그 이후 나는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 점점 사라졌고 결국 8개월 만에 그만뒀는데, 그만두는 과정에서 나에게 야박하게 굴었지만 너무 지쳐버린 나는 싸우지 않고 그냥 나와버렸다. 세월이 지나 다른 직장에 이력서에 첨부할 경력증명서를 떼려고 찾아갔는데, 고용주는 나에게 그동안 사과하고 싶었지만 용기를 못 냈다며 그때 미안했다고 했고 면접비로 보태라고 돈도 주었다.
#3. 어학원, 영어 교재 학습 점검
대학원에 들어가기 위해 공부를 하려고 한 어학원에서 아르바이트와 거의 다름없는 코칭 수업을 했다. 그런데 서글서글하고 사람 좋을 것 같던 고용주는 알고 보니 성격 파탄자였고 시간이 지날수록 나에게 별일도 아닌 걸로 마음껏 신경질을 냈다. 아이들 앞에서도 나를 감정 쓰레기통 취급을 해서 어느 날 애들 앞에서는 소리 지르지 말아 달라고 둘이 있을 때 정중하게 부탁했는데 무수리 같은 내가 감히 자기에게 요구라는 걸 했다는 게 화가 났는지 그 이후로 내가 뭔가 실수할 때까지 가만히 관찰하다가 잘못한 게 있으면 옳다구나 하고 쪼아댔다. 내가 참고 굽히니까 더 우습게 보고 무시하려고 했다. 결국 인내의 끈이 끊어진 내가 아이들 앞에서 "나한테 소리 지르지 말라고!!!"라고 외치면서 이 악연은 7개월 만에 끝이 나게 되었다. 모든 걸 내 잘못으로 몰고 가려던 고용주는 방언 터진 내가 다다다 쏟아내는 말에 할 말을 잃었다. 내가 얌전하고 기가 약해서 찍어 누르기 좋은 타입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게 전혀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는지 남편을 불러서 대신 일을 시키고는 내가 퇴근할 때까지 자기 방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았다. 다음날 갔더니 이제 안 와도 된다고 했다. 어차피 이 사태가 일어나기 두 달 전에 그만둔다는 의사표시를 한 상태였고, 자괴감 올 정도로 따분한 일을 쥐꼬리만 한 월급을 받으며 하면서 하녀 취급받는 게 진절머리가 났기 때문에 오히려 좋아서 뒤도 안 돌아보고 나왔다.
#4. 어학원&입시학원, 초등부 어학원 수업, 중·고등부 영어 내신&모의고사 수업
입시학원에서 몇 년 간 몸과 마음이 혹사당한 후 조금이라도 쉬면서 공부하려고 들어간 곳에서 미친 고용주에게 크게 데인 후, 반년 동안 백수로 지냈다. 그러다가 집에서 가까운 작은 입시학원에 다시 취직했다. 이곳은 사회의 쓴맛에 흑화 되어버린 나의 마음을 만져준 곳이다. 고용주는 수학 강의를 하는데 영어 강사가 필요해서 나를 고용했다. 이곳에서 마음 편하게 일할 수 있었고, 나를 전적으로 믿고 밀어주는 고용주 덕분에 나는 많이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학원이 확장되면서 분원이 여러 개 생기고 원장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새로 생긴 원장은 강사들에게 최대한 일은 많이 시키고 돈은 적게 주려고 하는 사람이었고 한국말이 서툰 외국인 강사의 급여를 여러 달 체납했다. 나를 직접적으로 고용한 것도 아니면서 나도 그런 식으로 다루려고 했다. 그러나 그맘때쯤 나의 입지는 다른 강사들과 비교할 수 없었고, 학생들도 고용주 다음으로 나를 가장 신임하고 있어서 원장이라도 나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명절을 앞두고 내 월급을 주지 않아 연락을 했더니 입금하는 걸 까먹었다고, 명절을 보내느라 입금이 어려우니 연휴가 끝나고 급여를 주겠다고 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나는 당신만 명절을 쇠는 게 아니라 나도 명절을 쇠야 하는데 나는 무슨 돈으로 명절을 보내야 하느냐고 물었고, 그러면 조금만 일단 보내주겠다는 말에 바로 나를 고용한 원장님에게 연락했다. 그분은 자기 사비로 나의 월급 전체를 보내주었고 다시 한번 이런 일이 있으면 바로 자기에게 알리라고 했다. 아마 이 일로 크게 싸웠는지 명절이 끝나고 갔더니 새 원장은 나에게 미안하다고,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없을 거라고 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내가 그만두기로 결심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마침 대학원도 합격해서 바로 사표를 냈다. 세월이 지나고 고용주와 연락이 닿아 학원으로 찾아갔는데 둘은 갈라섰고 학원은 반토막이 났다고 한다. 그래도 지금이 좋다며 나에게 타지생활이 힘들거든 바로 접고 내려와서 연락하라고 했다. 내 강사 경력 전체에서 가장 그립고 존경하는 원장님이다.
#5. 미친 어학원&입시학원, 초등부 어학원 수업, 중·고등부 영어 내신&모의고사 수업
대학원을 졸업하고 진로를 변경하려다 실패한 나는 인생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세상에 우울증 걸릴 일이 없는 단 한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나라고 자신했었지만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동안 나약하다고 비웃었던 바로 그 모습이 되었다. 평생 해본 적 없던 SNS 폭파에 잠수를 타고 거의 아무도 만나지 않았고 집에만 짱 박혀 있었다. 그러다가 정신 차리고 타지로 떠나와서 직장을 잡았는데, 이 미친 학원 덕분에 내 망가진 정신 상태는 더 악화되고 말았다. 오전에 출근해서 새벽 3시에 집에 들어왔으며 와서도 쉬지 못하고 일만 해야 했고 단 한 끼도 먹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주말에도 아무 데도 가지 못하고 일했는데도 일은 끝나지 않았다. 고용주와 힘든 상황을 진솔하게 대화로 풀어보려고 했는데 나를 찢어 죽일 듯 노려보더니 모든 게 다 내가 무능해서라고 했고, 도대체 경력은 어디서 쌓은 거냐고 비아냥거렸다. 내가 여태까지 일 못 한다는 말은 별로 들은 적이 없다고 했더니, 그럼 그런 곳에 가라고 또 비아냥대서 결국 이성의 끈이 끊어진 내가 "그런 데 가려고 지금 그만두고 있잖아요!!!"라고 사자후를 날렸고, 한 번도 아랫사람에게 그러한 공격을 받아본 적이 없었는지 충격을 받아할 말을 잃은 고용주에게 그러면 지금 집에 가도 되냐고 물었더니 가라고 해서 집에 왔다. 급여 정산 등 마무리 과정에서 시비를 걸면 가만있지 않으려고 벼르고 있었는데 별문제 없이 마무리되었다. 되지도 않는 어설픈 가스라이팅을 하며 별 희한한 악덕을 일삼았는데 여기 다 못 적는다. 난 가스라이팅이 통하는 타입이 아니었고 참지 못했다. 그러나 겨우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와 새 출발을 하려던 내 마음은 다시 큰 타격을 입었다. 바로 본가로 올라가서 아무것도 안 하고 앓아누워 있다가 다시 마음을 다잡고 2주 후에 내려왔다.
#6. 대형 입시학원, 초·중등부 영어 입시&내신 수업
마음을 다잡고 회사 같은 분위기의 대형 학원에 취직했다. 다 좋았는데 강사들의 정치 싸움이 장난 없었다. 나는 아무 편에도 서지 않고 내 할 일만 하려고 했는데 자꾸만 자기들 전투에 나를 끌어들여 서로 채가려고 했다. 이쪽저쪽에서 자꾸 나를 붙잡고 하소연하고, 차 마시러 가서 얘기 들어달라 하고, 퇴근 후에 전화해서 억울함 토로하고, 징계위원회에서 증인 서 달라고 하고,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대화를 유도한 후 녹음해서 나를 자기 무기로 쓰려고 해서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다. 1년 계약이 끝난 후 원하는 대로 급여를 올려주고 직책도 올려주겠다고 했지만 재계약하지 않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와버렸다.
#7. 영혼을 갈아 넣어 일한 후 제주도로 도망가게 만든 학원
내 브런치 첫 글 '30대 후반에 퇴사하다'에 나오는 그 학원이다. 이하 생략.
난 이 퇴사들에서 뭘 얻었을까? 전투력. 더러워진 성질머리. 흑화. 업그레이드된 노처녀 히스테리. 쓸데없는 것들만 늘었다고 투덜거렸었다. 무너지고 마음 다잡고, 무너지고 마음 다잡고를 반복하며 실낱 같은 희망을 안고 새로운 문을 열면 늘 펼쳐진 광경은 개판일 뿐이었고 분노는 쌓여갔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야 만 깨닫게 되는 능력치가 있었다. 한 곳에서 평온하게 오랜 시간 일했다면 얻지 못했을 능력이다. 이곳저곳 옮겨다닌 결과 여러 업무 방식과 시스템을 익혔고, 그래서 복잡하고 일이 많은 곳에서도 다른 사람들보다 빨리 적응할 수 있었다. 초등부, 중등부, 고등부 수업이 모두 가능하다(유치부는 절대 영원히 불가능). 파닉스, 초등 토플 수업, 중·고등 내신 대비와 모의고사 수업을 골고루 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일은 내 적성에 맞지 않아 늘 불편하고, 스트레스가 필요 이상으로 많이 생성되고, 즐겁지 않고, 열정이 없기에 스타 강사까지는 못 될 것 같고, 언제든 다른 할 일이 생긴다면 때려치우고 싶다. 그래도 꾸역꾸역 최선을 다하며 살았다. 그러니 이 고생들이 헛되지 않고 보람으로 느껴질 언젠가가 반드시 오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