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기부여가 되지 않을 때
할 일을 계속 미룬다는 건 삶의 동기부여가 떨어졌다는 뜻이다. 요즘 집을 둘러보면 시들시들한 내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불 빨래와 베란다와 창틀 청소 등을 계속 미루고 있다. 차 앞유리에 쌓인 나뭇잎을 청소하려고 차량용 청소기를 사려고 했는데 그것도 계속 안 사고 차 탈 때마다 손으로 한 뭉텅이씩 집어서 옆에다가 대충 버리고 탄다. 분노 조절을 잘하면서 무사히 하루를 보내고 나면 더 이상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다. 쾌적한 환경과 쾌적한 정신은 서로 돌고 도는 관계다. 쾌적한 정신으로 쾌적한 환경을 만들고, 쾌적한 환경은 다시 쾌적한 정신을 만든다.
집안 꼴이 엉망진창인 것을 보고 내 정신상태가 엉망진창인 것을 인지했다. 그래서 하나씩 해결하기로 했다. 일단 오랫동안 바꾸지 않아서 온통 잔기스가 나 있는 안경과 오래된 콘택트렌즈를 바꿨다. 그리고 예전에 서비스로 받은 내 눈에 안 맞는 렌즈세척액을 갖다 버리고 눈 편한 걸로 새로 샀다. 왜 그동안 안경과 콘택트렌즈와 렌즈세척액을 바꾸지 않았냐고 묻는다면 할 말은 없다. 그냥 만사가 귀찮아서 그랬다. 나는 멀티가 잘 안 되는 편이라 어느 하나에 시달리고 있으면 다른 것들을 잘 신경 쓰지 못하는 편이다. 그래서 이런 기본적인 것들을 그냥 내버려 둘 때가 많다. 어쨌든 이제 눈이 편안해졌다. 예전 안경은 집 밖에 끼고 나갈 수 없는 상태라서 콘택트렌즈를 끼고 밖에서 문서 작업 등을 하면 눈이 너무 아팠는데 이젠 새 안경이 생겨서 밖에서 안경을 껴도 창피하지 않고 눈도 안 아파서 좋다.
그리고 인터넷을 KT로 바꿨다. 이 집에 올 때 인터넷비가 제일 저렴한 지역인터넷에 가입했었는데 이번 여름에 약정이 끝났다. 그런데 계속 전화가 와서 갱신을 하라는데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귀찮은 게 많았고 가격도 더 올라가기에 꼭 갱신을 해야 하는 거냐고 물었더니 그럴 필요는 없다고 갱신하지 않아도 그냥 쓰면 된다고 해서 그대로 쓰겠다고 했다. 그런데 그날부터 모르는 개인 핸드폰 번호로 계속 전화를 해대며 귀찮게 해서 이제부터 전화하지 말라고 했더니 그날부터 밤 열두 시만 되면 인터넷이 끊기기 시작했다. 야 이놈들아... 그대로 써도 상관없다며. 그때가 한창 작업할 시간인데 너무 화가 났다. 절대로 갱신을 해주지 않을 것이다. 해지해버리겠어. 내 핸드폰 통신사인 KT로 바꾸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설치 기사와 시간을 맞추기 쉽지 않아서 계속 미루다가, 지난주에 드디어 설치를 끝냈다. 인터넷이 너무 잘 된다. 천국에 온 것 같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준비하고 새 안경을 쓰고 나간다. 출근 전 가끔 들리는 도서관 주변에 브런치 맛집 카페가 있는데 계속 방문을 미뤘었다. 드디어 가봤다. 그런데 생각보다 너무 좋다. 주말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웨이팅을 한다는데 평일 낮에 가니 한적하다. 브런치 메뉴가 다양했다. 메뉴를 모두 클리어하기로 했다. 매번 오긴 부담스럽기 때문에 한 달에 두 번 정도만 와야겠다. 여기 앉아서 브런치를 먹으면서 독서 등 오전 일과를 보냈다. 경치도 예쁘고 브런치도 맛있고 새 안경 덕분에 눈도 편하고 집중도 잘 된다. 이제부터 여유가 좀 있을 때는 오전에 일찍 일어나서 밖에 나와서 공부를 하고 출근해야겠다. 평소에는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고 가끔씩 카페 도장 깨기를 해야겠다. 이 주변에는 분위기 좋은 카페들이 많아서 하나씩 공략할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아진다.
9월에는 더위가 좀 가실 거라 믿고 옷 정리를 하는 김에 대청소를 하기로 했다. 청소 도구들이 오래되어서 대부분 버렸기 때문에 인터넷으로 각종 청소 아이템들을 물색하고 있다. 나는 요리는 별로 안 좋아하지만 청소는 좋아했었다. 난장판으로 어질러진 곳을 말끔히 치우면 희열이 느껴지고 내 정신도 깨끗해지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 나는 청소를 하지 않는다. 살다 보니 자신에 대해 의외의 모습을 많이 본다. 살다 보니 '절대 그럴 일 없는 일'은 없다는 걸 알게 된다. 청소 안 하는 룸메이트를 눈치 주며 분개하던 나는 어디 갔으며, 퇴근하자마자 고무장갑을 끼고 가스레인지를 박박 닦던 나는 어디로 갔을까? 알 수 없다. 그러나 변한 내 모습에 실망하지는 않으려고 한다. 세월이 지나야 만 알 수 있는 이런저런 나의 모습을 받아들이면서 곱게 늙는 방법을 강구할 것이다.
이토록 동기부여 되지 않는 하루하루를 속절없이 맞닥뜨리다, 마침내 움직일 힘을 내기로 했다. 무기력함 역시 돌고 돈다. 무기력한 정신이 무기력한 환경을 지속시키고, 무기력한 환경이 무기력한 정신을 또다시 연장시킨다. 그 굴레를 끊는 것은 좀처럼 끊기 힘든 일처럼 보이나 의외로 작은 부분을 건드리면 문제가 해결되기도 한다. 안경과 인터넷을 바꾸고 미뤄뒀던 분조카에 방문했더니 작은 틈새가 벌어져 햇살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 틈을 점점 크게 벌리며 뚫고 나가보자. 이제 또 다른 일들을 처리해 보자. 사소하지만 구체적인 것으로 정해야 한다. 나의 '쾌적한 환경 만들기'는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