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의 음주에 관하여
갑자기였다. 퇴근길을 걷다 맥줏집 문을 슬며시 밀고 들어가 1~2인석 테이블에 엉거주춤 백팩을 내려놓은 것은. 1분 전까지만 하더라도 '오늘은 편의점에 가지 말자, 냉동실에 얼려놓은 밥을 데워서 지난번에 산 카레를 부어 먹자'라고 생각하며 집이 있는 골목으로 꺾으려던 나는 맥줏집에서 스며 나오는 은은한 노란빛을 쳐다보자마자 별안간 직진하여 맥줏집의 문을 열어버린 것이다. 이 맥줏집은 언젠가부터 집에서 몇 발자국 안 떨어진 길가에 생겨났는데, 밤에 퇴근하며 집에 들어가다 힐끗 보면 사람들이 꽤 있었다. 아주머니들도 많이 있고 혼자 앉아 먹을 수도 있는 조그만 테이블도 있어서 언젠가 저기서 혼자 치맥이나 해볼까 하며 눈독을 들이고 있었는데, 오늘이 바로 그날이 되었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니 오늘따라 아저씨 두 명 밖에 없다. 아저씨들은 벌써 술에 꼴아서 혀가 꼬부라진 채로 열심히 떠들고 있었다. 아저씨들을 등지고 자리를 잡았다. 주인은 내가 혼자 들어오는 걸 보고 순간 동공이 흔들렸지만 곧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메뉴판을 가져다줘서 치킨 메뉴를 살펴봤더니 치킨, 감자튀김, 샐러드가 함께 세트로 묶여 있다. 치킨 단품은 없었다. 다른 메뉴에 비해 가격이 훨씬 높다. 흠... 곤란하네. 일행이 있었으면 고민할 필요가 없었겠지만 혼자라서 난감했다. 피자를 시킬까? 아니면 그냥 치맥으로 밀어붙여? 설마 배가 터져서 죽진 않을 거 아니야. 메뉴판을 고를 때 그다지 고민을 많이 하지 않는 편인데 이번에는 고장 나 버렸다. 주인에게 슬며시 물어본다.
"이 치킨세트... 를 시키면 제가 다 먹을 수 있을까요?"
"음... 혼자 드시면 좀 많지 않을까요?"
땡. 틀렸다. 난 먹을 수 있다. 단지 창피할 뿐이다. 혼자 와서 세트메뉴를 먹어 치운다는 게 왠지 모르게 부끄러울 뿐이라고. 안 되겠다. 오늘은 일단 후퇴다. 마르게리타 피자와 생맥주 한 잔을 시켰다. 앉아서 기다리는데 아저씨들이 피데기 오징어를 추가 주문했다. 곧 오징어 굽는 냄새가 주방에서 홀까지 퍼져 나왔다. 맛있겠다... 다음번에 와서 피데기 사 먹어야지. 냄새를 맡으며 멍을 때렸다. 오늘도 고단한 하루가 다 갔다.
나는 꽤나 보수적인 기독교 배경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평소 술은 거의 마시지 않는다. 내가 인생에서 술을 가장 많이 마셔본 건 스무 살이 되던 1월에 민증을 사용할 수 있게 되자마자 친구들과 우르르 술집으로 달려갔을 때였다. 그때 소주를 여러 병 마셨는데 정확히 몇 병인지는 모르겠다. 그렇게 많이 마셨는데도 정신이 멀쩡했고 별 느낌도 없었다. 와, 나 술 세네?? 나는 친구들에게 의기양양하게 아무렇지도 않다며 큰소리를 쳤다. 그런데 자리에서 일어나 걷는데 친구들이 박장대소를 했다.
"아하하하하하!!!! 취했다 취했어!!!!"
"뭐? 나 안 취했는데? 멀쩡한데?"
"으하하하하하핳캭!!!!!!"
분명히 나는 똑바로 걷고 있었는데, 친구들 말로는 내가 꽃게처럼 옆으로 걸었다고 한다. 친구들은 미친 듯이 웃었고, 난 친구들 말을 믿지 못하고 벌컥 화를 냈다. 그러자 친구들은 더 신나게 웃었다. 화가 나서 친구들을 족치려고(?) 다가갔는데 이상하게도 다가가기는커녕 점점 더 멀어졌다. 친구들은 눈물까지 흘리며 웃어댔고, 나는 그 일로 한동안 실컷 놀림을 받았다. 술 먹고 정신이 나갔던 적은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대학에 가서는 오히려 술을 마시지 않았다. 사회에 나와서도 마시지 않았다. 특히 회식 자리에서는 마시지 않았다.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눈칫밥을 먹을 때도 있었다. 어떤 원장은 폭탄주를 끝없이 제조해 내다가 술에 잔뜩 취해서 '야 내가 원장인데!! 원장이 주는 술을 왜 안 마셔! 마셔!!' 하며 내 코 앞에 술잔을 흔들어대며 들이민 적도 있었다. 만약 내가 아무나 들어가기 힘든 대기업에 간신히 들어갔거나 회사를 그만두지 않고 무조건 다녀야 하는 상황이었더라면 마셨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내 일은 거의 프리랜서와 다름없는 직종이라 술을 받아마시라며 코 앞에서 술잔을 아무리 흔들어대도 그럴 필요가 없었다. 회식 자리에서 술은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았지만, 다른 음료를 술처럼(?) 마시면서 3차, 4차까지 남아서 같이 놀아줬기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시비를 걸진 않았다.
나는 기독교인이라서 술을 마시지 않지만, 기독교인이라서 술을 마시지 않는 게 아니다. 기독교인은 금주와 금연을 해야 한다는 한국 기독교의 가치관은 초창기 기독교인들이 정결한 삶을 살기 위해 순수한 마음으로 시작되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그 전통에 굳이 맞서거나 도전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또한 아직까지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인의 음주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때로는 비기독교인들조차 '왜 너는 교회 다니면서 술을 마셔?'라고 하기도 한다. 나는 엄격히 금주와 금연을 하는 기독교 문화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여전히 그러한 기독교인들로 둘러싸여 있다. 내가 술 마시면서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면 큰 충격을 받을 사람들이 많다. 음주하는 기독교인을 보고 놀라는 것은 오랜 전통의 영향을 받은 결과이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에게 술 마신다고 사람 정죄하지 말라며 대립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성경에도 그 당시 다른 신들에게 바쳤던 제사 음식을 먹는 기독교인들에 관하여 각자 신앙의 양심에 따라 행동하되 믿음이 약한 사람들에게 미칠 영향을 헤아려 신중하게 행동하라는 내용이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와 자매인 그들이 내가 술 마시는 모습을 보고 충격받거나 말거나 혼란스러워하거나 말거나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믿기에, 나는 평생 남들 보는 자리에서 술을 마시지 않았다.
그렇지만 내 솔직한 생각으로는 음주 때문에 사람을 매도하고 마음대로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다. 술을 마신다고 그 사람이 나쁜 기독교인이고 술을 평생 안 마셨다고 해서 그 사람이 반드시 성숙한 기독교인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술담배를 안 하고, 주일마다 예배에 참석하고, 교회에서 온갖 행사에 참여하며 온갖 직책을 도맡아 하지만 가증스럽고 '회칠한 무덤' 같은 기독교인들을 많이 보았다. 그런 자들이 누군가 술을 마신다고 해서 그를 정죄하고 헐뜯는 모습을 보면 화가 치밀어 오른다. 남들 술 마시는 거 지적할 시간에 본인이나 돌아본다면 모두에게 유익이 될 것이다. 기독교인의 음주에 대해 질책을 해야 한다면 그가 술 때문에 심한 문제를 일으키고 자신에게도 교회에게도 해가 될 때, 그 사람이 올바르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방식으로 해야 하는 것이다. 자기 잣대만으로 판단하여 책망하고, 상처 주고, 회복되지 못하도록 짓밟는 것은 옳지 않다.
음주에 대한 내 생각을 굽힐 생각이 없어서, 나만의 방식을 정했다. 나는 술을 마실 것이다. 어쩌면 청개구리 같은 내 심보가 발동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시되 공공연하게는 마시지 않고 혼자서 또는 아주 가까운 사람들과 가끔씩 마시기로 했다. 또한 양은 한 잔 또는 한 캔으로 제한했다. 평소 내가 음료를 마실 때 한 잔 이상은 마시지 않기 때문이다. 주스를 한 번에 세네 병씩 마시지 않는 것과 같다. 그렇게 많이 마시면 술이 아니라도 몸에 해롭다. 술은 마실수록 취하고 중독성이 있다는 차이는 있지만, 무식하게 많이 마시면 안 되는 건 다른 음료 역시 마찬가지다. 오히려 나는 커피가 더 신경 쓰인다. 나는 카페인 중독자라서 커피를 많이 마시면 하루 종일 무한리필로 마실 때도 있었다. 요즘에는 하루에 한 잔만 마시려고 노력하고 있고 대부분 잘 실천하고 있다.
술이든 커피든 아니면 다른 것이든, 기독교인으로서 조심할 것은 '그것에 지나치게 의존하는가'이다. 카페인 중독, 게임 중독, SNS 중독 등 중독될 만한 건 일상에 얼마든지 많다. 다른 기독교인이 술을 마신다고 비판하고 싶다면, 본인은 이런 것들에 중독되어 있지 않은지 먼저 돌아보아야 한다. 술만 안 마신다고 되는 게 아니란 거다. 전통을 따른다고 고집스럽게 술을 마시지 않으면서 힘든 직장 동료를 외면하고, 공공장소에서 새치기하고, 남들 험담하고, 힘든 일에 쏙쏙 빠지면서 얌체같이 살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차라리 힘들다고 같이 술 한잔 하자고 하는 친구와 함께 맥주 한 잔 하며 얘기 들어주고, 비밀 지켜주고, 너무 오버하지 말고 도울 수 있는 일 돕는 게 훨씬 나은 기독교인의 삶이라고 생각한다.
피자가 나왔다. 방울토마토를 콩콩 얹은 마르게리타 피자가 귀엽다. 조그만 피자에 거대한 양념통을 세 개나 텅텅텅 올려준다. 한 조각씩 핫소스를 뿌려먹고, 크러쉬드 레드페퍼를 뿌려먹고, 파마산 치즈를 뿌려먹고, 아무것도 안 뿌리고 그냥 먹는다. 중간중간 맥주를 마셔준다. 이게 바로 퇴근길의 행복 아니냐고. 요즘 직장에 대한 고민과 스트레스로 기분이 좋지 않고 또 분노게이지가 가득 쌓여 있는데, 가속화되는 나의 흑화를 잠시 멈춰준다.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며 피자를 야금야금 뜯어먹고 맥주를 홀짝거린다.
"사장님! 계스안해즈세여!"
"계산되셨습니다."
"어????"
"제가 냈습니다."
"으악!!! 아이고. 잘 얻어먹었네."
혀 꼬부랑 아저씨들이 집에 가시려나 보다. 한 사람이 먼저 몰래 계산을 한 것 같다. 훈훈하고 부럽네. 나는 누가 계산 안 해주나. 이런 생각을 하며 몰래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아 맞다. 민생회복 소비쿠폰이 계산해 줬지. 어쨌든 얻어먹었네. 잘 먹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