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고요한 밤
크리스마스가 오고 있다. 학창 시절의 크리스마스를 떠올려본다. 무엇보다, 추운 날씨에 학교를 가지 않아도 되는 공휴일이라서 좋았다. 12월 25일이 토요일이나 일요일이었던 날은 학생이던 그 때나 직장인인 지금이나 아쉬울 따름.
경기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나는, 하나밖에 없는 딸이 서울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녀야 하지 않겠냐는 엄마 아빠의 결정에 따라 초등학교 4학년에 접어든 시점에 서울 강북에서 학군이 괜찮은 편이라고 소문이 난 동네로 온 가족이 이사를 왔다. 이른바 '유학'이다. 그 때나 지금이나 비싸기는 매한가지인 서울 집값에 기가 꺾인 엄마 아빠는 발품을 팔고 지인을 동원하여 겨우겨우 세를 얻으셨다.
서울에서 처음 둥지를 틀었던 곳은 어느 동네 골목 안 쪽의 번듯한 2층 양옥집의 2층이었다. 주인집 아주머니의 시어머니("할머니")께서 2층을 혼자 사용하고 계셨는데, 노령이신 데다 2층 전체를 혼자 사용하시기에는 너무 넓어서 주인집 아주머니께서 마당 한쪽의 별채로 내려오시는 것이 어떻겠냐고 여러 번 설득하였지만 꿈쩍도 않으셨다고 했다. 그런 분이 "인상이 선해 보이는" 우리 가족을 보시더니 단번에 오케이를 외치셨단다. 오래된 양옥집이었지만 관리가 잘 되어 있었고, 부엌으로 난 창문으로 어느 공공기관의 너른 정원이 예쁘게 보이는 곳이었다.
단 한 가지 불편한 점이라면 세대 분리가 되어 있지 않아서 1층 주인집 현관을 통해서 계단을 올라가야만 했던 것이었는데, 돌아보면 즐거운 경험이었다. 엄마 아빠의 분부대로 1층 현관에 벗어놓는 신발은 항상 가지런하게 정리하였고, 계단으로 진입하는 다섯 발걸음에 온 신경을 집중하여 살금살금 다녔지만, 딸이 없으셨던 주인집 아주머니께서 종종 계단을 껑충껑충 뛰어 올라가는(계단 진입 전 오직 다섯 발걸음만 주의를 기울였던-) 나를 불러 이런저런 간식거리를 챙겨주셨고, 주인집 아주머니의 두 아들("오빠들")은 눈을 마주치면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했지만(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오빠들은 사춘기 고등학생의 전형이었다.), 주인집 아저씨께서 애지중지 키우시던 대형견이 무서워서 대문에서 집 안쪽으로 발걸음을 떼지 못하는 나를 위해 대형견의 목줄을 잡아 주던 마음씨 고운 사람들이었다.
그곳에서 여러 해를 보내며 그럭저럭 서울살이에 적응해 갈 때 즈음, 할머니께서 다시 2층 넓은 집에 살고 싶으시다는 바람을 꽤나 강력하게 피력하셨다. 주인집 아주머니는 우리와 사는 것이 너무 좋았는데 이제는 어찌할 방법이 없다고 하시며 어렵게 입을 떼셨다. 셋방살이의 설움이 이런 것이려니. 우리 가족의 추억이 고스란히 쌓인 집을 떠나는 것이 아쉬웠지만, '죽기 전에 원래대로 넓은 곳에 살고 싶다.'는 할머니의 소원을 외면하기는 어려웠다.
중학생이던 때 근방의 다세대 주택 2층으로 세를 얻어 이사했고, 그 집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녔다.
서울 두 번째 우리 집은 골목길 초입에 위치해 있어서 바깥의 소리가 잘 들어왔다. 하교 후 저녁 먹기 전에 잠깐씩 낮잠을 자곤 했는데 동네 꼬마들이 골목에서 우당탕탕 뛰는 소리에 잠을 깼고, 한겨울 깜깜한 밤이면 목청 좋은 아저씨가 "찹쌀~떡, 메밀~묵" 하는 소리가 가까이 들렸다.
기독교 신자는 아니었지만, 설렘이 가득한 크리스마스 시즌이 사춘기 소녀에게 미치는 영향은 지대했다.
특별한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혀서 그즈음이면 평소에 잘 먹지도 않는 케이크를 사달라고 엄마를 졸랐던 것 같다. 마침내 맞이한 크리스마스이브, 라디오에서 틀어주는 크리스마스 노래를 흥얼거리고 다이어리에 새해 계획을 세우며 괜스레 밤을 지새워 보리라 다짐하지만 12시경 교회 사람들이 무리 지어 육성으로 불러주는 크리스마스 캐럴이 들려올 때면 까무룩 잠이 들었다.
지금 사는 집은 서울 중심가 근처이지만, 꼭대기 층이다. 거리의 소리는 꼭대기 층 창문을 넘지 못한다. 가끔씩, 아니 자주 119 구급차 소리가 들려올 뿐.
다가오는 크리스마스이브, 크리스마스 장식은 하나도 갖추지 못한 평소와 다름없는 집에서 우리 부부는 가장 작은 사이즈의 케이크를 사서 나눠먹기로 하였다.
온 사위가 고요한 밤의 기운을 만끽하며.
Merry Chirstma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