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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n Dec 28. 2022

소고기, 갈치, 그리고 순대

2023년을 맞이하며

어린 시절 우리 집 식탁에는 소고기 대신 돼지고기를 주재료로 하는 반찬이 올라왔고, 엄마가 장을 보러 나서는 길에 따라나선 정육점에서 어른들끼리 나누시는 대화를 흘려듣기로는 소고기 가격이 워낙 올라서 함부로 먹기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키가 작은 나의 시야에 들어오는 투명 냉장고 속에 진열되어 있는 이름은 잘 모르지만 빨간 고기 덩어리들을 보며 한 가지 명확하게 인지한 것은 '소고기는 굉장히 비싸다.'였다.


그다음으로 자주 올라왔던 반찬은 생선류였다. 아빠가 생선류를 꽤 좋아하셨기에, 엄마는 '굴비', '갈치', '삼치' 등등 종목을 가리지 않고 골고루 돌아가며 내어 놓으셨다.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게, 갈치는 가시를 바르면 먹을 수 있는 살이 정말 형편없을 정도로 적었다. '이 얼마 되지도 않는 살을 먹으려고 각고의 노력을 들여 가시를 바른단 말이야?'라고 생각하며, 그 이후 오랫동안 갈치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세월이 흘러, 지금의 남편과 연애하던 시절 첫 여행으로 제주도를 택하여 떠난 여정에서 먹는 데 일가견이 있는 남편은 당시 여자친구이자 지금의 아내인 내게 제주의 맛을 보여주겠다며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서른이 넘도록 제주도를 단 한 번도 와보지 못한 사람(바로 나)에게 제주도는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제주도에 왔다면 갈치를 맛봐야 한다며 가장 먼저 데려간 곳은 현지인이 자주 찾는다는 백반집이었고 우리는 제주 갈치 정식을 2인분 시켰다. 짜잔~ 현지에서 나는 식재료를 십분 활용한 정갈한 반찬도 황홀했지만, 무엇보다 나의 양손을 포개놓은 마냥 두툼한 갈치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이게, 갈치라고?"


남편은 정성스럽게 가시를 발라 밥 위에 살을 놓아주었고, 나는 "이게, 정말 갈치란 말이지?"를 연발하며 정말 맛있게 먹었다. 이 정도 양이라면, 아~암, 가시를 바르는 수고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나의 반응을 재미있게 지켜보던 남편은 한편으로 씁쓸한 생각이 드는 모양이었다. "앞으로 더 많이 사 줄게! 많이 먹어." 라며.


그랬다. 어린 시절 엄마가 시장이나 마트에서 사 온 갈치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버전, 그러니까 살이 별로 없는 홀쭉한 갈치였던 것이다. 공무원이셨던 아빠의 외벌이로 네 식구 살림을 꾸려가던 엄마는 절약이 몸에 베인 습관이라 식재료 선택에 있어서도 망설임이 한가득이셨던 것 같다.




그러던 엄마가 흔쾌히 지갑을 여는 순간은 바로 아파트 단지에 순대 아저씨가 왔을 때였다. 오토바이 뒤에 리어카를 달고 판매대로 개조하여 순대를 파는 차였는데, 일주일에 한 번 그 차가 단지에 들어서며 확성기로 "순대요~ 순대, 순대 왔어요--- (무한반복)"를 방송하면, "순대 왔다! 얼른 내려가자~~!!"며 뒤도 안 돌아보고 뛰어 내려가셨다. 엄마가 주문하시던 메뉴는 늘 '순대 1인분과 간 조금'이었다. 그렇게 받아 온 순대를 참 맛있게 드셨고, 나도 그때부터 순대를 즐겨 먹게 되었다.


어른이 된 지금도 순대 차량을 보면 발걸음을 멈추고 주문해서 가지고 들어가는데, 고민 없이 언제나 "순대 1인분과 간 조금이요"라고 외친다.




2023년을 목전에 둔 시점, 유난히 날씨가 차갑게 느껴진다. 지난번에 내린 눈이 제대로 녹지 않아서 미끌미끌한데, 또 눈이 내린다.


어젯밤, 소고기, 갈치, 그리고 순대에 대한 단편적인 추억이 불현듯 떠오른 건 추운 날씨에 잔뜩 움츠려든 몸과 마음 탓이다. 따뜻한 이불속에 머물러있고 싶은 치기 어린 마음이 머나먼 추억을 찾아 유유히 유영하는 것 같은 기분이다. 소고기를 자주 먹지 못했지만, 그리고 두툼한 갈치의 존재를 알지 못했지만, 일주일에 한 번 오는 순대 아저씨에 반색하며 엄마 손을 붙잡고 뛰어 내려가던 그때가 참 그립다. 여러모로 지금보다 부족한 것이 훨씬 더 많았던 시절이지만, 순대아저씨가 넉넉히 내어주시는 덤이 있어서 우리 모녀는 순대 1인분으로도 충분히 배불렀던 것 같다.


그러나 시간은 거꾸로 흐르지 않는 법. 마음을 따뜻하게 채워주는 지난 추억을 되새기며 2023년을 조용히 맞이해 본다.

Happy New Y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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