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만석맘 지은 Oct 19. 2020

유학을 가고 싶어, 그런데 왜?

아이들과 하와이에서 공부하며 살아보고 싶어

  “왜 가려는 건데?”

  “아이들 때문에 가야 될 것 같아.”

  “한국에선 안 돼?”

  “안 되겠어.”

  “그런데 무슨 돈으로?”

  “돈은 만들면 되지!”

  “어떻게?”

  유학가기 전 2년 내내 신랑과 나는 이런 진전 없는 대화를 반복했다.


  나는 일단 시작부터 해보고 안 되면 접는 식인데 신랑은 돌다리도 두드려봐야 되는 스타일이었다. 나는 될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완벽한 신랑의 계산으로는 답이 나오지 않았다.  신랑 입장에서는 가려는 명확한 이유도 제대로 대지 못하는 내 대답이 더 못 마땅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신랑의 결재를 득하려다가는 파파 할머니가 되어도 못갈 판이었다. 일단 시작하고 신랑을 설득하기 위한 자세한 계획을 하나씩 만들어 가야 했다. 가족들이나 지인들에게는 아이의 영어 공부가 주된 목표가 되어야 했고, 가장 저렴한 유학 방법으로 내가 학생 신분이 되어야 했다. 아이들과 나의 공부를 위해  나간다지만 해외에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도 컸다. 그렇게 이유를 만들어가며 신랑을 설득하고 행동하기까지 꼬박 2년의 시간이 걸렸다. 아이들을 끔찍이 사랑하는 신랑에게 긴 시간 ‘기러기 아빠’라는 타이틀을 달아주어야 했기에 그 정도 고뇌의 시간은 어쩌면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랑의 “왜 가야 돼?”라는 질문은 하와이에서 공부하는 동안에도  줄곧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솔직히 신랑 따라 해외 파견 근무나 유학으로 해외 살이하며 아이들 영어 공부까지 시키는 사람들이 많이 부러웠다. 그렇다고 신랑에게 "너는 왜 못해?" 따져 물을 수도 없었다. 우리 형편에 영어를 배우러 굳이 외국까지 나간다고 하기에도 설득력이 없었다. 애들 핑계로 떼쓰다 시피 하와이로 나왔지만 마음 한켠에 불편함은 해소되질 않았다.


  해답은 우연찮게 읽은 책의 글 한 줄에서 찾았다.     


  "나는 자유를 얻으러 하와이에 왔습니다!"    


  개그맨 고명환 씨의 ‘책 읽고 매출의 신이 되다’라는 책 내용 서문에 “나는 자유를 얻었다.” 부분에서 무릎을 딱 쳤다.      

  내 시간을 내가 지배하며 산다는 느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자유.     

  해외에 살아보고 싶었고, 아이의 영어 공부를 시키면서 나의 평생소원이던 영어 능통자가 되고 싶은 욕망, 출근 시간에 허덕이고 늘 아이들을 걱정하며 퇴근과 주말만 기다리며 사는 쳇바퀴 도는 생활, 기대와 달리 허무하게 지나가는 퇴근 후와 주말 일상, 엄마와 아내로서의 의무만 남아 있고 나만의 시간은 오히려 직장에 있는 시간일 뿐임을 알게 된 순간, 어쩌면 무의식에서 나자빠지기 일보직전이라는 신호를 강력하게 보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누구도 나에게 강요한 사람은 없는데, 나는 의무감으로 그렇게 아등바등 애를 쓰고 있었다. 이 모든 욕구를 아우르는 단어가 자유였음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다만 아이들까지 뿌리칠 수 없는 엄마라는 지위를 이용했다. 누구나 겪는다지만 나는 생전 처음 겪어보는 시댁이나 신랑과의 갈등, 해도 해도 끝없는 살림의 어려움 등으로, 정말 힘들 때는 아이 둘을 양 팔에 끼고 훨훨 날아가는 선녀가 되고 싶다는 상상이, 아이 둘을 데리고 비행기를 타고 하와이로 훨훨 날아가는 현실이 되어 버렸다. 무던하고 착한 우리 신랑에게는 여전히 고맙고도 참 미안한 일이었지만.     


  그래서 하와이에서 결정적으로 자유를 찾았냐고?

  ‘제주도에서 아이들과 한 달 살기’라는 책으로 나의 마음에 잔잔한 파도를 일으켰던 전은주 작가님이 다시 캐나다에서 아이들과 생활한 1년 반의 이야기를 담아 ‘영어 그림책의 기적’을 쓰셨다. 작가님을 직접 알지는 못하지만 그 분의 블로그에 나도 아이들을 데리고 해외에서 살고 싶다고 댓글을 달은 적이 있었다. 긍정적인 대답을 기대했던 나는, ‘너무 힘든 일이라 권하고 싶지 않다.’는 답글에 의아했다. 그 때 그 말을 새겨들었어야 했다. 


  나는 아이들만 돌본 게 아니라 공부까지 해야 했다. 

  처음에는 하루에 수업이 4시간밖에 없다니 웬 횡재인가 했다. 그런데 4시간은 숫자에 불과했다. 영어를 1도 쓰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4시간을 초집중하다 보니 체력이 후달렸다. 한국에서도 소홀했던 살림과 육아를 병행하면서 수업 준비와 숙제, 시험들로 밤늦게 자고 새벽에 일어났다. 걱정과 긴장으로 자다가도 몇 번씩 깨고 잠을 설쳤다. 아이들과 즐겁게 시간을 보내기는커녕 매일 쫓기듯 살고 스트레스로 화도 많이 냈다. 한국에서는 반찬가게와 청소 도우미 이모님 덕분에 그럭저럭 생활했지만 그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었다. 외식도 쉽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나의 할 일로 가득찼다. 내가 꿈꾸었던 생활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후회도 많이 했고 눈물도 많이 흘렸다. 직장을 다니던 시간과 비교해서 더 나은 상황이라고 전혀 생각되지 않은 시간들이 흘러갔다.


  그렇다고 아이들과 해외살이를 시도해보려는 엄마들을 애써 말리고 싶지 않다. 시간이 지나니 익숙해지는 시간이 찾아 왔고, 여전히 숙제와 할일이 줄어들지는 않았지만 퍼즐을 맞추듯 시간 관리 능력이 생겨났다. 

  그래도 분명히 아이들을 더 많이 안아주었고, 더 많이 함께 웃었다. 다정한 선생님들과 좋은 친구들을 만나게 해 주었다. 학교 수업이 재미있어 아이들이 싫어했던 수학과 과학을 좋아하게 되었다. 괴롭고 지루한 영어가 아닌 살아 숨 쉬는 영어를 접하게 해 주었다. 무엇보다 엄마의 퇴근만 눈 빠지게 기다렸던 아이들에게 절대적으로 함께 할 수 있는 많은 시간을 주었다.      

  아이들을 키우는 엄마로서 백 퍼센트의 자유는 아니었지만 한국에서 살던 그 어느 때보다 남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웠다. 그 누구도 내 직업이 뭔지 묻지 않고, 신랑은 무얼 하는지 아이들은 학교에서 공부를 잘하는지 못하는지 관심이 없었다. 무슨 차를 타고 몇 평에 사는지 묻지 않았다. 무슨 옷을 입고 돌아다니는지, 머리를 감았는지 안 감았는지 묻지 않았다. 화장을 했든, 안 했든, 살이 쪄서 뱃살과 팔뚝살이 출렁대든 말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소매와 짧은 바지를 입든 안 입든, 따가운 햇살에 주근깨와 기미가 끼었든 안 끼었든, 아무도 나무랄 사람이 없었다. 나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그저 하와이 공기, 바람과 바다를 즐기고, 읽고 싶은 책을 마음껏 읽고, 특히나 학생의 특권으로 방학 때는 늦게 자고 싶을 때 자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났다. 먹고 싶을 때 먹고, 가고 싶을 때 나갔다. 내 마음대로 그 누구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유로운 삶을 살았다.      


 안식년. 그래, 여태 아이들 키운다고 고생했던 시간에 대한 보상으로 안식년을 얻었다고 생각하면 되겠구나 했다. 그랬더니 충만한 행복감이 울컥 솟아올랐다. 아주 오랜만에.

이전 02화 가자, 미국으로, 하와이도 미국이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