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에서 집구하기
“12월 초에는 들어가시는 거죠?”
유학원에서 물어 보았다.
피가 말랐다.
하와이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아이들은 신나게 영화보고 게임하는데, 나와 신랑은 걱정이 태산이었다. 같은 비행기를 타고 가고 있었지만 여행으로 가는 기분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당장 묵을 숙소로 한인 민박집은 예약했지만, 5일뒤부터 대부분의 하와이 사람들이 긴 휴가를 간다는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도착해서 바로 집을 구하지 못한다면 기약 없이 비싼 호텔에 묵거나, 그나마도 자리가 없다면 많은 짐과 아이들과 함께 거리에 나 앉을 판이었다.
더구나 우리가 기를 쓰고 집을 빨리 구해야 했던 가장 큰 이유는, 집주소가 있어야(집 렌트 계약서) 아이들 학교를 등록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의 어학원 학기가 시작되기 전에는 틀림없이 집주소가 있어야 했다. 그렇다고 아이들과 1년을 지내야하는데 아무데나 함부로 정할 수도 없었다.
어학원 시작일은 1월 초였지만 유학원에서는 연말에 집을 구하기 어려울 수 있으니 한 달전인 12월 초에 하와이에 도착하기를 권했다. 하지만 직장 다니는 사람 사정이 어디 그러한가. 최대한 업무에 지장을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남은 휴가를 싹싹 긁어모아 겨우 크리스마스 전에 출발할 수 있었다. 사무실 사정이 좋지 않아 그것도 얼마나 미안했는지 모른다. 정착을 도와주기 위해 따라 나선 신랑과 휴가를 맞춘 것만 해도 천만 다행이었다.
직장을 다녀야 했기에 유학 준비할 충분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처음에는 유학원에서 제공하는 현지정착 서비스가 비싸다는 생각에 집을 직접 알아보았다. 부동산 사이트를 뒤져 몇 군데 괜찮아 보이는 집을 찾았고, 이메일로 문의를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하나같이 답변이 없었다. 이유를 몰라 답답했지만 기다리는 수 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결국 출국을 몇 주 앞두고도 전혀 진척이 없어 유학원에 서비스를 문의했지만 현지인(한국인이 아닌)과 컨택이 되다 갑자기 중단되고 며칠 답이 없기 일쑤였다. 결국 하와이 거처를 정하지 못하고 무작정 출국하게 되었다. 한국에서 짐정리, 아이들 학교, 직장업무 등 마무리 짓기도 빠듯한 나날이었다.
비행기에서 거의 잠을 못 이루고 하와이에 도착했다. 뭐라도 해봐야 했다.
민박집에 도착해서 시차 적응하느라 잠이 쏟아지는 아이들을 잠깐 재운 뒤, 신랑과 머리를 맞대고 생각을 해봤다. 비록 리얼터(realtor, 부동산 중개업자)로부터 답을 받지는 못했지만 한국에서 검색해 놓았던 집들 중 위치나 내부가 괜찮아 보였던 몇 군데를 무작정 가보기로 했다. 직접 가보니 주변은 안전한지, 조용한지, 동네가 잘 관리되어 있는지 알 수가 있었다. 역시 한국에서 무턱대고 결정할 일은 아니었구다 싶었다.
위치나 외부 환경은 마음에 들었는데 집안 내부 사진이 올려져 있지 않아 궁금했던 한 콘도(한국의 아파트 같은)에 무작정 주차한 뒤 건물 내부로 들어가 보았다. 혹시 관리자라도 만나면 무엇이든 물어보고 싶어서였다. 콘도 입구가 열려 있어 로비까지 들어갈 수 있었는데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트리가 우리를 반겼지만 사람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한국처럼 경비아저씨가 어디든 있을 줄 알았는데. 어느 인터넷 카페에서 콘도마다 리얼터를 지정해 두고 있고 게시판에 매물이 있을 수도 있다고 본 것 같아 게시물을 찬찬히 보던 중, 현지 리얼터의 명함을 발견했다. 반가운 마음에 전화와 문자를 해보았다. 역시 전화를 받지 않았고 답이 없었다. 그 막막함이란. 도착한 첫날, 아무런 소득 없이 벌써 해가 저물었다. 아이들도 힘들어 해, 인근 식당에서 저녁을 떼우고 숙소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숙소에서 찬찬히 생각을 정리하다가 갑자기 하와이에서 부동산을 하신다는 블로거가 떠올랐다. 카톡으로 몇 가지 물어봤던 기억이 나서 카톡 대화를 찾아 연락을 했다. 매매만 하시는 분이었지만 블로그 글이나 카톡도 친절했고 혹시 하는 마음에 연락을 해봤는데, 늦은 시간임에도 답이 왔고 다음날 바로 만날 수 있다며 회사로 찾아오라고 하셨다. 역시 코리안! 현지에서 민박집을 제외하고 처음으로 연락이 닿은 한국인이었다.
다음날 열일 제쳐두고 간 곳은 우리나라처럼 개별 부동산이 아닌 큰 부동산 회사였다. 하와이에서 제법 큰 현지 부동산이었고 인터넷 사이트도 있었는데 하와이 매물은 그 사이트가 제일 정확하다고 했다. 그리고 함께 적당한 집을 검색해 주고 렌트 담당 리얼터와 통화를 해 약속까지 잡아 주셨다. 유창한 영어와 함께. 젊고 아름답고 영어가 유창한 그분에게 우리 가족은 모두 홀딱 반했다. 아이들에게 코코아도 손수 만들어 주시고. 그렇게 어려웠던 일이 순식간에 해결되고 있었다. 어찌나 고마웠던지. 연말이라 특히 바쁜 시간에 우리를 위해 시간을 내주셔서 사례라도 하고 싶었지만 극구 사양하셔서 더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컸다. 그 날 이후 카톡과 블로그에 제한을 걸어 당황했던 후일담이 있긴 했지만. 뭐, 이해한다. 워낙 바쁘고 우리같이 돈 안되는 손님과 연락은 빨리 끊는게 상책이지. 무엇이든 안 될때마다 물귀신처럼 물고 늘어졌을 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렇게 처음으로 집을 보기로 약속한 장소에 가보니, 훤칠한 키에 잘생기고 매우 친절한 젊은 남자분이 기다리고 있었다.(한참 동안 아이들과 그 분 이름을 이야기했었는데 지금은 기억이 안 난다) 함께 엘리베이터로 올라가 보니 멀리 다이아몬드 헤드가 보이고 멋지면서도 아늑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이라 조심스럽게 내부를 둘러봤다. 아이가 그린 귀여운 그림이 벽에 붙어 있어 흐뭇한 웃음이 나왔다. 집안 크기는 딱 적당했고 바닥이 카펫이 아닌 타일로 되어 있어서 좋았고 호텔 못지않은 야외수영장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학군 등급도 괜찮아 더 마음에 들었지만 아쉽게도 집 안에 세탁기가 없어 지하 공용 세탁기를 써야했고 위치가 조금 외곽이라는 단점이 있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미남 리얼터가 휴가를 가게 되어 일 진행이 어렵게 되었는데, 우리나라처럼 마음에 든다고 바로 집주인과 뚝딱 계약서를 쓰고 돈을 입금시키면 바로 입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입주 신청서를 내면 그 정보를 토대로 범죄경력이라든지 재무상태에 대해서 확인하는 절차가 더 있었다. 금방 주말과 크리스마스였기 때문에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기다린다고 해도 우리가 그 집에 살 수 있을지 조차 알 수가 없어서 아쉽지만 그 집을 선택할 수 없었다.
그 집을 본 이후 신기하게 다른 리얼터와 집주인들에게서 연락이 오기 시작했는데,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니 하와이에도 있지 않은 외국인이 이메일로 연락해서 집을 보자고 하니 믿을 수 없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네 정서로는 답변 정도는 해 줄 수 있지 않나 싶은데 우리 생각일 뿐, 본인과 관련 없다고 생각하면 그런 작은 수고로움조차 관심이 없는 듯했다. 연락이 오기 시작한 이유는 신랑이 미국 휴대폰번호로 전화를 했기 때문이지 싶었다. 본인과 관련된 중요한 일에는 한국 이상의 빠른 속도로 답이 왔는데 처음에는 그 차이를 알기 어려웠다. 오랫동안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어 답답하고 화도 났었는데 이들에게는 당연한 일일 뿐이었다.
결정적으로 1년간 행복하게 지낸 사랑스런 우리 집은, 하와이관련 한인 인터넷 카페에서 찾게 되었다. 위치도 괜찮았고 가격대도 마음에 들었다. 집주인이 직접 올려놓은 집이라 주말에 당장 볼 수 있었고 하와이 콘도가 대부분 그렇듯 건물이 40년이나 되어 낡긴 했지만 관리는 새 건물처럼 잘 되어 있었다. 집 내부에 가구와 전등, 요리도구 등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물품을 갖추고 있어 바로 사용할 수 있는 장점도 있었다. 세탁기와 건조기, 식기세척기, 전자레인지도 있었고 한국분이라 주방 천정에 등을 달아 두었고 카펫이 아닌 마루바닥이라 무엇보다 좋았다. 콘도라서 보안도 잘 되어 있어 신랑의 걱정을 덜어주었다.
집주인은 30여 년전 이민 오신 한인이셨는데 무엇보다 한국말로 소통할 수 있고 아이 키우는 엄마라 이야기도 잘 통했다. 부동산을 통하지 않은 직거래였기 때문에 다른 절차도 필요 없었고 계약서와 두 달치 월세만큼 보증금을 내면 당장 들어와서 살아도 된다고 하셨다. 망설일 필요도 없이 바로 계약했고 드디어 크리스마스 이브에 아늑한 보금자리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그 때 얼마나 기뻤는지, 그리고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집이 주는 안정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물론 집을 구하고 나서도 신랑이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3주간은 계속 힘들었지만, 녹초가 되어 집으로 돌아와도 신랑과 시원한 맥주 한 캔 들이킬 수 있는 집이 있어 큰 위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