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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걷다

걷는다는 기쁨

by 만석맘 지은
그래, 낮에 고민을 했었지. 그런데 씻으니까 이상하게 상쾌하네?
애써 이전의 고민을 이어가려고 해도 나의 기분 모드는 이미 바뀌어버린 것이다.

『걷는 사람, 하정우』


애써 이어가려던 고민이 어느새 바람처럼 날아가 버릴 때가 있다. 배우 하정우가 책에서 말했던 것처럼, 씻거나 걷기만 해도 기분 모드가 바뀌는 순간이 있다.
하정우 씨는 하와이를 ‘걷는 사람들에게 천국’이라 했다. 그림 같은 풍경 속에서 하루에 3만 보를 걷는다고 했다. 하와이 기온은 언제나 25도 안팎. 계절에 구애받지 않고 걷기에 딱 좋다. 그저 걷기만 해도 힐링이 되는 곳. 나도 그곳에서 걷고 싶었다.


걸으면 기분이 바뀐다


같은 동네 살던 직장 후배와 퇴근길을 걷던 시절이 있었다.

교통 정체로 꽉 막힌 도로, 걸으나 차 안에 갇혀 있으나 걸리는 시간은 비슷했다. 퇴근 직후 바로 육아 출근하던 두 아줌마에게 유일한 운동 시간이었다. 서로 퇴근시간을 기다렸다 함께 걸었다.

그 시간 동안 우리는 수다로 스트레스를 풀고, 아이 얘기며 업무 고민을 털어놓았다. 운동이라는 생각도 없이 걷다 보니 어느새 살도 빠지고, 허리라인도 살아났다.

무엇보다 마음이 가벼워졌다. 걷는 시간은 우리에게 작은 해방감을 주었다.


하와이에서 다시 시작한 걷기


하와이 생활은 바빴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나면 이어서 어학원 수업이 있었고, 마치면 바로 아이들을 데리러 가야 했다. 운동할 틈은 쉽게 나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학교 안 대학생들을 보며 옛날 후배와 걸었던 생각이 났다. 학생들은 운동을 생활화했다. 무거운 텀블러를 아무렇지 않게 들고 당당히 걷는 레깅스 차림의 여학생, 스케이트 보드 하나면 어디든 갈 수 있을 것 같은 남학생. 그 모습이 자연스러웠다. 날씬하지 않아도, 일부러 멋을 내지 않아도 그대로 예쁘고 멋있었다. 그들만큼은 아니라도 멋있게 걷고 싶었다.

주차하려고 헤매는 시간에 차라리 걷기로 했다. 어학원까지 왕복 1시간. 주차비도 아끼고 운동도 할 겸 걷기로 마음먹었다.


걷기 준비물


일단 텀블러를 가방 옆 주머니에 꽂고, 갑작스런 비를 대비해 가볍고 작은 우산을 챙겼다. 하와이 태양은 강렬했고, 수시로 흩뿌리는 비바람은 장난꾸러기처럼 우산을 뒤집었다.
다시 튼튼한 모자와 선크림으로 무장하고, 헐렁한 바지를 입고 운동화 끈을 단단히 맸다. 누구에게 잘 보일 필요도 없었고, 예쁜 옷은 불편했다. 걷기 적당한 차림이면 충분했다.


혼자 걷는 시간, 나만의 힐링타임


어학원이 있는 마노아 지역은 높은 지대여서 종종 구름을 안고 있었다. 비가 내렸다가, 금세 해가 나오고, 그 사이 무지개가 피어났다. 무지개는 손 닿을 듯 가까웠다. 두 개가 나란히 뜬 쌍무지개를 본 날, 나는 뭉클한 마음으로 멈춰서 바라보았다. 아무도 없는 그 길 위에서, 무지개는 온전히 나를 향해 피었다. 사진으로는 다 담을 수 없는 풍경이었다.


걸으면서 음악을 들으면 아침 풍경이 뮤직비디오처럼 펼쳐졌다. 듣고 싶던 유튜브를 들으면 강의실이 되었다. 시험이 있는 날은 작은 노트를 들고 걸어가면서 외웠다. 프레젠테이션 내용을 중얼거리며 준비하기도 했다.


걷는 동안은 나만 생각했다. 아이들이 말 안 듣고 싸워 속상한 마음도 옅어졌다.

아이를 돌보고, 공부하며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주는 작은 틈. 걷는 시간은 온전한 내 시간이었다.

걷고 나면 기분이 좋아졌다. 기분이 좋아지면, 웃음이 나왔다. 엄마가 웃으면 아이들도 밝아졌다.

그렇게, 걷기로 힘차게 살아났다.



하정우 씨는 또 말했다.

“하와이의 자연은 특별히 무엇을 하지 않아도 사람을 위로해 주는 힘이 있다.”

그 말은 꼭 맞는 말이었다. 걷다 보면 자연이 주는 ‘알로하’를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저 걷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고, 머릿속을 맴돌던 걱정들이 작아졌다.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에 새삼 감사했다.


하와이를 떠나 문득 그리운 순간은, 이른 아침 시원한 바람 속 걷던 그 시간이었다.

그때의 나,
그 순간의 무지개,
그리고 조용히 충만해지는 내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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