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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싶은데 팥 난다

by 제나랑


AM 00:40

차고지에서 나는 차량 소리를 듣고 주방에 있던 한 여자가 주방 쪽 뒷문을 연다.

>>이름: Kelly Crawford

나이: 68세

전직: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 델타 항공사 소속 승무원

특이사항: 스텔라의 어머니

스텔라와 재규가 주방 쪽 뒷문을 열기도 전에 뒷문이 열리자, 놀라서 뒷걸음질 친 재규와는 달리, 미동조차 없던 스텔라는 뒷문을 연 사람이 켈리일 거라는 걸


짐작이라도 한 듯, 켈리를 보고 반가움에 바로 그녀를 향해 두 팔 벌려 안는다.

집 안으로 들어온 세 사람은 아일랜드 식탁에 미리 준비해둔 화이트 피치, 체리, 코튼 캔디 포도가 든 바구니, 포크, 그리고 접시를 거실 테이블로 가져온다.

켈리는 스텔라가 가장 좋아하는 화이트 피치 하나를 집어 그녀에게 건넨다.

​오랜만에 보는 딸이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켈리와 재규는 스텔라의 얼굴이 닳도록 따듯한 눈으로 바라본다.

3년째 이어지는 슬럼프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기도 하고, 부모님의 걱정에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몰라서 지난 해엔 바쁘다는 핑계로 오지 못해


그녀에게도 그리움과 죄책감이 뒤섞여 복잡한 감정이던 시간이었다.

부모님은 늘 그녀의 작품을 자랑스러워하셨고, 그녀는 두 사람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보고 싶었다는 두 사람의 말은 그녀를 따뜻하게 했고, 그동안의 그리움이 한순간에 녹아내리는 듯했다.

시간이 늦어 그녀가 피곤할까 봐 회포는 나중에 풀기로 하고 두 사람은 그녀를 3층으로 올려보낸다.

그녀는 3층으로 올라가기 전, 2층에 들러 어린 시절의 기억이 깃든 공간들을 짧게 둘러보았고,


부모님과 함께 했던 소중한 순간들이 떠올라 추억이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3층으로 다시 올라간다.

3층 그녀의 작업엔 본가에 올 때마다 그리던 그림이 이젤에 놓여 있었고, 그녀가 자주 사용하는 도구나 미술 용품들은 늘 정리해주곤 하셨던 부모님 덕분에


잘 정돈되어 있었으며, 드레스 룸에 걸린 옷들은 본가에 올 때마다 입는 옷들이 항상 깨끗하게 세탁된 상태로 잘 걸려 있었다.

그녀의 방 또한, 벽에는 그녀의 그림들과 작품 포스터들이 걸려 있고, 책상과 연결된 책장에는 크로키북들과 연필, 지우개 등 스케치 도구들이 담긴 케이스가


진열되어 있으며, 참고 자료로 쓰이는 미술 관련 전공 서적, 대학 시절의 포토폴리오와 졸업 논문 등도 잘 정리되어 있다.

부모님 덕분에 이렇게 올 때마다 먼지 한 톨 없는 방에서 뽀송한 이불을 덮고 잠이 들 수 있었고, 본가에 오면 마음이 편해서인지,


금방 잠이 들고 늘 평소보다 늦게까지 자곤 한다.

AM 11:30


스텔라는 커튼 사이로 비치는 햇살에 눈이 부셔서 잠에서 깼고, 오랜만에 상쾌한 기분으로 아침을 맞이한 그녀가 기지개를 켜며 침대에선 나오기 싫어 한참을


뒤척였지만, 코끝을 스치는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겨와 침대에서 일어나 1층으로 내려가는 걸음이 빨라졌다.

켈리는 아침 일찍부터 스텔라가 좋아하는 음식들로 식탁 한가득 준비했고, 점심상엔 엄마의 정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으며, 세 사람은 식탁 앞에 앉았다.

그녀는 켈리가 건네주는 음식을 한입 가득 베어 물었고,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맘? 올해 나 마흔하나야~ 베이비 아니야~ㅋ"

"우리한텐 죽을 때까지 베이비지~"

세 사람이 함께 나누는 대화는 시간 가는 줄 몰랐고, 그동안 못했던 이야기들을 쉴 새 없이 풀어놓았다.

어린 시절에 그녀가 유치원 때부터 대학 졸업할 때까지 학교 다녀오면 미주알고주알 엄마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이야기를 늘어놓던 모습이 그녀의 얼굴 위로


오버랩 되면서 부모님은 이야기를 듣는 내내 따뜻한 미소로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었고, 그녀가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할 때마다 그녀는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켈리가 후식을 준비하는 동안, 재규는 얼마 전 영상 통화를 했을 때 그녀가 언급한 그녀의 슬럼프가 마음에 걸렸는지,


그녀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 조심스럽게 슬럼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많이 힘들었겠다..."

"아니..뭐, 걱정하실 정도는 아니었어~"

재규는 그의 따듯한 손으로 그녀의 손을 잡는다.

"괜찮아, 그런 일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어. 중요한 건 다시 일어서서 어떻게 극복하느냐야."

스텔라는 재규의 말에 많은 위로와 힘을 받았다.

부모님은 몸은 멀리 있어도 언제나 그녀의 곁에 있고, 그녀가 어떤 상황에 처하든 변함없이 사랑할 거라는 걸 그녀 역시 아주 잘 알고 있으며,


그들의 그런 사랑이 그녀에게 늘 원동력이 된다.

후식을 먹으면서 오랜만에 대화를 나누었고, 부모님의 사랑과 지지가 그녀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새삼 깨달았으며,


그녀 또한 그들에게 자신이 얼마나 사랑받고 있는지 알고 있다는 말에 진심을 담아 전한다.

켈리가 준비한 음식을 맛있게 먹으며 그릇까지 싹싹 다 긁어 먹고도 후식도 다 먹은 그녀는 한 달 동안,

제주에서 여행했던 곳에 대한 이야기를 두 사람에게 들려주었고, 핸드폰을 꺼내 제주의 아름다운 절경,

맑은 하늘, 푸른 바다와 붉은 노을 사진들을 본 두 사람은 제주의 아름다움에 연신 감탄한다.

배가 너무 불러 배가 아플 지경인 그녀는 부모님에게 산책할 겸 걷다가 오자고 했고,


빌리지 안을 천천히 걷는데 어린 시절에 옆집 아이와 함께 뛰놀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으며, 계속 걷다가 보니,


어린 시절에 뛰어놀던 작은 공원을 발견하고 공원 벤치에 앉았다가 가기로 한다.

공원 중앙에 있는 놀이터엔 같은 빌리지에 살고 있는 어린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고, 그 모습을 보고 그녀의 눈에 어린 시절,


자신이 뛰어놀던 모습도 함께 그려졌으며, 익숙한 그 공간의 공기 냄새가 그녀에게 편안함과 안정감이 다시 한번 느껴졌다.

그녀의 옆에 앉은 부모님은 그녀를 흐뭇하게 바라보았고, 그녀가 어렸을 때 이 공원 벤치에 앉아서도 그림을 그리곤 했는데,


그 그림들을 부모님에게 보여주면서 자신이 얼마나 그림을 좋아하는지 조잘대던 것, 그림을 그렇게 좋아하고 그림을 전공까지 한 아이가


작가가 된다고 했을 때, 부모님은 그저 그녀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이라면 다 하게 해주고 싶었다는 것 등등 하고 또 해도 지겹지 않을 이야기들을 하며


행복한 웃음으로 그 공원을 가득 채웠다.

"예전에 외할머니랑 여기 왔을 때, 내가 할머니한테 '엄마가 바쁜 아빠 대신 나 키우느라 고생 많이 했겠다, 육아난이도가 꽤 높았을 텐데 되게 잘 키우신 거 같다.'


이런 얘기를 하니까 가만히 내 얘기를 들으시다가 한숨을 푹 쉬면서 뭐라고 하셨는 줄 알아?"

"뭐라고 하셨는데?"

"'니 엄마는 더 했어~ 너네 엄마 육아 난이도가 너보다는 훨씬 더 높았어~ 그것만 알어~'"

"아 ㅎㅎㅎ엄마는 애한테 무슨 말을 한 거야~"

"이런 말이 있지.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콩 심은 데 팥이 날 리가 없지~"

"아버지, 그럼 난 콩이야? 팥이야?"

생각지도 않았던 그녀의 물음에 빵 터진 부모님은 목젖이 보이도록 크게 웃었다.

"ㅎ둘 중에 ㅎ뭐가 좋은데?ㅎ"

"음…팥?"

"ㅎㅎ어렸을 때부터 콩 먹을 땐 오만상을 하고 먹더니 팥 들어간 빵 사 오면 그 자리에서 다 먹었잖아~"

"그건 지금도 팥 들어간 빵 아니면 잘 안 먹히더라~"

"세 살 버릇이 어디 가겠어~"

"내 딸 맞네~"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세 사람은 드립 커피를 내린 머그잔을 각자 들고 티테이블이 있는 곳에서 마시다가


스텔라는 본가에서 가장 좋아하는 공간으로 이동한다.

본채에는 현관 앞에는 필로티, 뒷문 쪽에는 테라스, 2층 앞쪽에는 베란다, 뒤쪽 필로티 위로는 발코니, 그리고 옥상 공간까지 전부 배치되어 있는데,


그중에서도 뒷문으로 나가면 보이는 테라스에서 커피를 마시며, 야외 정원과 별채를 바라보는 공간을 가장 좋아한 스텔라는 뒷문으로 나간다.

테라스에는 티테이블과 야외 흔들 벤치에 기대어 앉아 있으면 엄마의 품에 안겨서 잠들던 아기 때가 생각나 포근하고 따듯한 기분이 들어서


이 공간을 스텔라가 가장 좋아했고, 이 흔들 벤치는 켈리가 어렸을 때부터 목공수였던 외할아버지가 직접 만든 것으로, 외할머니도 이곳에서


뜨개질을 하곤 하셨으며, 그런 엄마 품에 안겨 있었던 순간이 기억에 남아 외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이 흔들 벤치를 본가로 가져왔다.

그 후로 이 공간은 외할머니에게서 켈리에게로, 켈리에게서 다시 스텔라에게로 전해질 만큼 오래된 공간이자 삼대의 추억이 깃든 공간으로 기억되고 있다.

머그잔을 티테이블 위에 두고는 흔들 벤치에 기대 앉아 야외 정원의 많은 나무와 꽃들을 바라보았다.

규칙적으로 흔들리는 벤치에 몸을 맡기고 눈을 감으니, 마치 갓난아이가 되어 엄마 품에 안겨 있는 느낌이 들었고,


눈을 뜨자, 야외 정원을 가로질러 사각 돌길로 이어진 별채가 보였다.

흔들 벤치에서 일어나 그 사각 돌길 위를 지나 별채 앞에 도착한 스텔라

미국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처럼 도어락이 보편화 되어 있지 않고 열쇠 형식을 고수해 왔지만,

점차 도어락을 설치하는 추세라고 하여 스텔라가 2년 전에 본가에 왔을 때, 본채와 별채 모두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방식의 도어락으로 바꿔 드렸다.

오랜만이라 가물가물한 비밀번호를 겨우 생각해냈고, 도어락에 비밀번호 6자리를 누른다.

(띠리링~)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사방으로 창문이 여러 개 있어 통풍이 잘되는 구조에, 입구를 기준으로 왼쪽엔 작업 테이블이 있어


이곳에서도 그림을 그리곤 했다는 걸 알 수 있었고, 정면에는 소파와 테이블이 있으며, 입구에서 오른쪽엔 침실이,


그리고 침실을 지나면 작은 주방도 마련되어 있어 어린 시절에 부모님께 혼나면 이곳에서 며칠씩 화가 풀릴 때까지 지내곤 했다.

이 별채는 외할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직접 평면도를 그리며 지어주기로 약속했지만, 외할머니보다 5년 먼저 돌아가셨고,


스텔라를 위해 재규가 그 평면도를 보고 직접 지었기 때문에 그녀에겐 작업실만큼이나 소중한 그녀의 아지트이다.

"와~ 여기도 이렇게 깔끔하게 유지하신다고? 정정하시네, 우리 아버지."

하지만 우편함처럼 태풍의 여파로 여기저기 보수한 흔적들이 보였고, 얼마 전엔 허물고 다시 짓자는 말도 하셨으나, 아직은 괜찮다고 했다.

1년의 몇 번 쓰지도 않는 3층과 별채를 이렇게 깔끔하게 유지하기 위해 매일 매일을 얼마나 힘들게 쓸고 닦고 하셨을까 라는 생각에


코끝이 찡하도록 뭉클해진 스텔라는 눈시울을 붉혔다.

작업 테이블과 소파 사이에는 벽난로가 있어 겨울에는 아버지가 손질해서 별채 뒤에 쌓아놓은 장작을 가져다

벽난로를 피워 놓고 생크림과 마시멜로를 올린 핫초코를 마시던 때가 생각이 났고, 금방 또 웃음 지었다.

옆집 아이와 싸워도 여기로 와있고, 짝사랑하던 아이가 다른 아이를 좋아한다는 걸 알았을 때도 여기 와서 울고, 화가 나고 슬픈 일이 있으면


항상 여기서 마음을 달래곤 했으며, 그녀의 부모님은 그녀가 방에 없으면 처음엔 없어진 줄 알고 놀랐지만, 별채에 와서 창문 너머로


잘 있나 확인하고 가곤 하셨다.

외동딸이라서 더욱 아끼셨던 것도 있지만, 이유가 된 다른 계기들도 있다.

스텔라가 태어나기 전에 그녀의 오빠가 먼저 태어났었다.

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아팠던 오빠는 태어난 지 백일도 채 채우지도 못하고 사망했고, 자식을 잃은 부모를 칭하는 말은 존재하지 않을 정도로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의 고통이었으며, 그 이후, 두 사람에게는 태명만 남은 아들을 애써 떠올리지 않으려 금기어처럼 생각해왔다.

그러다 5년 후에 스텔라를 임신했고, 아직 아들을 잃은 슬픔이 가시지 않은 상태라 잘 키울 자신이 없었지만, 서로 노력해보자며 스텔라를 잘 낳아 키웠다.

그러나 그게 끝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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