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지사 새옹지마
스텔라가 6살이 되던 해에 대사관 앞에서 시위하던 불법체류자들이 앙심을 품고 재규의 딸인 스텔라를 납치 및 감금을 계획했고,
빌리지 근처 공원에서 산책하던 재규와 스텔라가 놀이터에서 놀고 들어가기로 하고 그녀가 혼자 미끄럼틀을 타며 잘 놀고 있는 사이,
재규가 잠시 한눈을 판 순간에 그녀를 납치했으며, 재규의 순간 판단력과 빠른 추진력으로 경찰들보다도 먼저 그녀를 찾아내 구할 수 있었다.
그 이후로 언제 또 이런 일이 스텔라에게 벌어질지 모른다는 생각에, 일단 한국에 들어갔다가 몇 년 후에 다시 오기로 하고 한국으로 떠났던 것이고,
그곳에서 그녀는 경기도 의정부에서 유치원 1년 6개월, 초등학교 6년을 살았고, 일본 교토로 아버지를 따라가겠다고 한 건 그녀의 선택이었으며,
시카고로 돌아온 건 대학교 입학이 결정되고 난 후였다.
그 일이 있고 난 뒤로 부터 부모님은 온통 스텔라로 가득했고,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항상 노심초사 였으며,
특히 재규는 그녀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직업 특성상 출장이 잦아서 스텔라가 첫걸음마를 할 때, 처음으로 아빠라고 했을 때 등
그녀가 성장하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지 못하고 늘 켈리가 비디오 카메라로 찍어 놓은 영상들로 봐야 했다는 게 언제나 그녀에게 죄책감이 들었다.
이런 이유로 부모님은 스텔라에게 못 해준 것만 생각나 더욱 그녀를 금이야 옥이야 소중하게 키웠고,
그녀가 올바르게 성장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으며, 그녀 또한, 그런 그들을 너무나 잘 이해하고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스텔라는 별채를 나와 본채로 향했고, 방으로 들어와 핸드폰으로 누군가에게 연락을 한다.
>>꽃집 사장님
-사장님, 택배 부탁합니다. 제가 미국에 와 있어서요.-
/붉은 엉겅퀴 말씀하시는 거죠?/
-네, 그 ㄴ 집으로 딱 한 송이. 가장 시들한 걸로,
가는 길에 더 시들라고 우편 봉투에 넣어서요.-
/근데 전 꽃을 다루는 사람이라서 이 행위의
의미를 아주 잘 아니까 받으면 무섭고 불쾌
하겠지만 그 사람은 깨닫는 것도 없이 그냥
버리면 이것도 다 의미 없는 거 아니에요?/
-의미가 없진 않죠. 처음엔 뭐지? 하고 열여
봤을 거고, 기분 나빴을 거고, 무서웠을 거고,
또 보냈을 때도 혹시나 해서 열어봤을 거잖아요.
그다음부턴 안 열어보고 버렸더라도 내가 이 짓을
20년째 하고 있다는 거 자체만으로 불쾌하겠죠.
불쾌하고 무서워하면서 떠오르겠죠.
어렸다는 이유로 자신이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건지.
그리고 내가 꽃을 안 보내도록 하는 방법은 본인이
이미 잘 알고 있어요. 근데 안 하고 있짆아요.
마치 계속해달라고 때 쓰는 것처럼요.
얼마나 멍청합니까. 진심으로 미안했다, 그 한마디면
이런 짓거리는 나도 더 이상 안 해도 될 텐데…
딱 한 마디를 못 해서 택배 버리는 번거로움도
감수하겠다는데 어쩔 수 없죠.
/네, 알겠어요~ 늘 고생이 많으시네요.
작년처럼 잘 보내 드리겠습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사장님.-
꽃집 사장님은 몇 시간 뒤, 꽃시장에 가기 위해 스텔라와의 연락을 끝으로 잠이 들었다.
경기도 의정부에 위치한 꽃집 [꽃갈피]
AM 04:15
이미 꽃시장에 들러 예약받은 다른 꽃들과 붉은 엉겅퀴를 사 온 꽃집 사장님
분주히 오픈 준비를 마치고는 붉은 엉겅퀴 한 송이를 B4 사이즈의 갈색 우편 봉투에 넣은 후, 밀봉한다.
봉투를 뒤집자, 미리 적어둔 수취인 '서보희'의 주소와 번호가 적혀 있고 발신자 정보는 이름, 번호, 주소는 그 어떤 것도 없이 '가짜 작가 사과해'만 적혀 있으며,
잘 포장한 봉투는 카운터 한 쪽에 두고 다른 예약을 확인한다.
AM 08:35
꽃들을 정리하다가 문득 시간을 보니, 퀵 서비스 운영 시작 시각인 8시가 넘었다는 걸 알고 빠르게 퀵을 부르자,
10분도 안 돼서 오토바이를 몰고 온 퀵 기사가 가게 안으로 들어온다.
"퀵이요~"
꽃집 사장님은 카운터에 잘 포장해서 둔 갈색 봉투를 퀵 기사에게 건넨다.
"수고하세요~"
퀵 기사는 건네받은 봉투를 오토바이 뒤쪽에 있는 탑 박스 안에 넣은 후, 수취인 주소로 향한다.
의정부에 위치한 한 원룸 오피스텔 앞에 도착한 퀵 기사가 초인종을 눌러 오피스텔 안으로 들어간다.
엘리베이터 4층에서 내린 후, 404호 앞에서 초인종을 누른다.
안에서는 남자 목소리가 들린다.
"앞에 두고 가세요!"
"수취인께 직접 전달해야 합니다. 사인도 해주셔야 하구요."
한 여자가 욕을 뱉으며 문을 열었고, 여자 뒤엔 조금 전 목소리의 주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서 있다.
퀵 기사는 그녀에게 봉투를 전달했고, 그녀는 봉투를 받아 들고 이름을 확인한다.
[가짜 작가 사과해]
"서보희 씨? 여기 사인 좀."
퀵 기사가 내민 PDA 패드에 보희가 사인을 하자, 퀵 기사는 바로 돌아서 엘리베이터에 탑승했고,
보희는 봉투를 오피스텔 공동 복도 바닥에 힘주어 던지며 소리를 지른다.
"아, ㅆㅂ~~~!!!
그녀는 그대로 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고, 남자가 무슨 일이냐는 묻는 말에도 무시하며 짜증을 낸다.
퀵 기사는 오토바이 위에 앉으며 누군가에게 전화를 건다.
>>찐 의뢰인
"네. 고객님, 물건 전달 잘했습니다."
-네. 수고하셨어요. 꽃집 사장님이 결제하셨죠?
"네, 확인했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통화가 끝난 후, 퀵 기사의 오토바이는 출발했다.
<2024년 08월 03일>
[스텔라의 본가]
AM 08:55
지난 밤, 켈리와 스텔라는 흔들 벤치에 앉아 밤늦게까지 와인을 마시며 수다를 떨었는데, 다음날 아버지의 생일상을 차리고 싶다는 그녀의 말에,
켈리는 생일상 메뉴들을 메모했고, 혼자 하기 힘드니 각자 분담해서 차리기로 했다.
아침부터 1층 메인 주방은 켈리의 재료들을 손질하는 소리로 가득했고, 스텔라가 졸린 눈을 비비며 주방으로 내려와 함께 생일상 준비를 하기 시작한다.
스텔라는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진 큰 냄비에 새끼손가락 크기로 썰어 놓은 고기와 켈리가 미리 불려 놓은 미역을 넣어 고소한 참기름에 달달 볶다가 물을 부었고,
중간중간 간을 하고 맛을 보며, 소고기미역국을 끓인다.
오래 걸리는 닭볶음탕과 돼지 갈비찜, 그리고 재규가 좋아하는 치즈케이크는 두 사람이 전날 밤에 함께 미리 만들어 놨고, 소고기미역국이 끓는 동안,
스텔라는 두부샐러드부터 황태 강정, 각종 볶은 채소들을 무쌈에 말아 놓은 월남 무쌈 말이까지 만들기 시작했고, 켈리는 잡채부터, 진미채 호두 볶음,
소불고기, 팽이버섯 베이컨 말이, 육전 튀김까지, 매일 호흡을 맞춰온 사람들처럼 동선조차 꼬이지 않고 요리들이 하나씩 척척 완성되어 가고 있다.
PM 12:15
드디어 모든 요리가 완성되었고, 스텔라는 엄마와 함께 완성된 요리들을 식탁 위에 하나씩 올려놓으며 예쁘게 플레이팅까지 하는 동안,
재규가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계단을 내려오고 있다.
"아버지, 부르면 내려오시라니까~"
"아니, 이렇게 맛있는 냄새가 나는데 참을 수가 있어야지~ 우와~ 뭘 이렇게 많이 했어~ 맛있겠다~"
"미역국은 꼭 우리 딸내미가 대디한테 만들어 줄 거라고 하더라~"
"어디 한 번 맛 좀 볼까?"
스텔라가 직접 끓인 소고기미역국을 한 스푼 떠서 맛을 본 재규가 눈이 동그랗게 커진다.
"너무 맛있는데? 우리 딸, 엄마 닮아서 요리도 잘하네~"
스텔라는 치즈케이크에 6과 6 숫자 모양으로 된 촛불을 꽂고 불을 켠다.
"해피 벌ㅆ데이 투 유~ 해피 벌ㅆ데이 투 유~ 해피 벌ㅆ데이 디얼 마이 대ㄷ~ 해피 벌ㅆ데이 투 유~"
스텔라와 켈리의 생일 축하 노래가 끝나자, 재규는 촛불을 불어 껐고, 환하게 웃으며 기뻐했으며, 그가 12가지의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을 맛있게 먹으며
기뻐하고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전날 밤부터 생각하고 오늘 아침부터 고생하며 준비한 두 사람은 모두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거실로 자리를 옮겨 치즈케이크와 과일들을 함께 먹으며 이야기를 나눈다.
스텔라는 아버지의 64번째 생신을 축하하며, 미리 면세점에서 구입한 버번위스키 [버팔로 트레이스] 1병을 선물로 준비했고 재규는 저녁에 함께 먹자고 한다.
"루이빌에 버번 양조장 있던데 엄마랑 셋이서 놀다 올까?"
"그르까? 예약은 내가 할게~"
"우리 딸내미랑 같이 간다고 며칠씩 노트북 끼고 살더라~"
"여기서 차로 15분만 가도 양조장 두 개나 있는데 투어처럼 쭉 돌자~ 와이너리도 찾아 놨어~ 우리 딸내미랑 같이 갈라고~
작년에 얼굴을 못 봐서 우리 딸내미 언제 오나, 오매불망 기다리면서 이 노인네가 할 일이 없으니까 눈 빠지게 노트북, 그 작은 모니터로 하루 종~일 찾아봤지~
왜 컴퓨터 많이 하는 애들이 거북목인지 알겠더라니까~"
"2달 동안 있을 건데 울 아부지 가고 싶다는 데 다~ 가보자~ 오메가3는 드시고 계시죠? 노트북, 핸드폰 화면 많이 보면 백내장 이런 거 와~"
"그건 나보다 우리 딸내미가 먼저 올까 봐 걱정이구만~"
"아, 그건 그렇네~ 그래서 그런가, 시나리오 완성하고 나면 노트북이나 핸드폰 잘 안 보게 되는 거 같어~"
"그래~ 의식적으로라도 그렇게 해~ 눈도 좀 쉬어 줘야지~ 아빤 여기 정원에 초록 초록한 거 많이 봐서 괜찮어~ 아직 팔팔해~ 켈리가 문제지~"
"내가 뭐~ 내 친구들 중에 내가 제일 젊거든?"
"알았어, 알았어~ 이뻐, 이뻐~"
"그래도 두 분, 곧 있음 70인데 방심하면 안 돼~"
"어후~ 벌써 그렇게 됐어, 내가? 너 스물셋에 낳았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눈 깜짝하니까 금방이네~"
"나도 그런데 아부지는 오죽할까~ㅋㅋ 나도 시카고 예대 합격해서 기숙사 입주하는 날, 엄마, 아부지가 데려다주던 때가 엊그제 같다, 아부지~"
"이젠 같이 늙어가는 거지, 뭐~"
"맞다~! 너 어렸을 때 같이 놀던 옆집 애, 기억나? 대학교 때도 같이 다니고 그랬잖아~"
"아~ 로드니? 기억나지~"
"로드니네 엄마가 우리 옆집에 계속 살았는데 지난달에 죽었어, 폐암으로. 엄마 간병한다고 뉴욕에 있던 직장도 때려치우고 왔었는데...
근데 그 이후에도 계속 옆집에 살어~ 어제 마주치면 너 왔다고 말해줄라고 했는데 안 보이드만, 어디 갔나?"
"잘 사는 줄 알았는데 걔도 많은 일이 있었네. 왜 꼭 착한 애들한테만 그런 일이 생길까…뭐, 옆집인데 두 달 동안 얼굴 한 번을 못 보겠나. 인연이면 보겠지~"
"그래~ 만나면 맛있는 거라도 사줘라~ 뭘 통 못 먹는지 말랐더라~"
"알았어~"
"다음 작품은 뭐야?"
"에이~ 아시잖아요~ 개봉 전까지는 말할 수 없는 거~"
"힌트 좀 줘봐~"
"그냥 감성 로맨스 정도?"
"으구~ 짜다, 짜~"
"판타지가 아니네? 미드나잇 시리즈 아니야?"
"미드나잇 시리즈 맞아~ 심플 이즈 더 베스트?"
"그치~ 때로는 정통이 먹히기도 하지~"
"난 판타지보다 그런 감성 로맨스가 더 좋더라~ 벌써 기대된다~"
"아직 시작 전이라 1년은 더 걸릴 텐데~ 개봉 일 잡히면 알려 줄게~"
"언제 기다리나~ 난 우리 딸내미 작품이 제일 재밌더라~"
"다~ 원동력은 우리 엄마, 아부지의 사랑 덕분이니까 재밌는 거지~"
"누굴 닮아서 말도 이쁘게 하지, 우리 딸?"
"그것도 다~ 엄마, 아부지한테 배웠지~ 근데 말만 그런 게 아니라, 진짜 시나리오 쓰면서 두 분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쓰다 보니까 그게 또 원동력이 되는 거지~"
"근데 그게 너도 모르게 부담이 돼서 슬럼프가 온 건 아니고?"
"그런 거 아니야~ 슬럼프는 온전히 내 문제지. 내가 이제 너무 늙어서 구상이 막 잘 안 떠오르나 싶기도 하고,
그렇다고 어린 친구들이 구상해 오는 것들이 또 와닿지는 않고. 그러다 보니까 온 거지~ 이미 지나갔고~"
"그래~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다~ 지나간다~ 지나가고 나면 또 별거 아니고~"
"그치~ 지나가긴 하더라고~ 지나가기까지 오래 걸려서 그렇지."
"그냥 하던 일 계속하다 보면 후딱 지나간다~"
스텔라는 두 사람의 따뜻한 말에, 앞으로 본가에서의 소중한 시간을 통해 다시 한번 그녀의 작품은 부모님의 사랑 덕분이라는 걸 잊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작품에 대한 확신은 더욱 짙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