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잠들면 생각할 여유가 생긴다
<2024년 07월 28일>
지난 나흘 동안, 스텔라는 시나리오 작업에 막차를 가하면서 글 쓰는 데에만 매진했다.
하루종일 펜션 밖으론 나가지 않고 작업을 하기도 하고, 점심때 산책하듯 카페[맨도롱]에 노트북을 들고 가, 커피를 마시며 작업을 하다가 해가 질 때쯤에
다시 펜션으로 돌아와서 작업을 이어가기도 했다.
잔잔한 음악과 함께 집중해서 글을 쓰면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하나하나 글로 옮겨가며 끊임없이 그녀의 키보드 타자 소리가 음악과 섞이면서
마치 하나의 선율처럼 들린다.
하루에 식사하는 횟수도 줄여가며 밤늦게까지 작업을 이어가면서 자신의 작품에 더욱 몰입했다.
아침 햇살이 부드럽게 비치는 하루의 시작을 시나리오 작업으로 시작해, 하루의 끝도 작업으로 마무리하는 나날들이 계속되었다.
스텔라는 시나리오 작업을 시작할 때마다, 항상 첫 문장을 쓰는 순간은 마치 오랜 시간을 기다려온 운명적인 순간을 맞이하는 것만 같고,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수많은 생각, 아이디어와 감정들을 작품 속에 녹여 스토리를 만들어 내는 것 자체도 마법사가 되어 마법을 부리는 기분이 때로는 가슴이 벅차오른다.
물론, 가끔은 글을 쓰다가도 영감이 떠오르지 않아 막막하고, 브레이크가 걸린 차량처럼 막히기도 하지만, 그럴 때마다 심호흡하며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작업에
몰두하거나 커피를 리필하고, 식사를 하거나 창문을 열고 환기를 시키는 등의 정화하는 동작들을 하고 나면 막혔던 작업에 속도가 붙기도 한다.
하루 중 모든 순간을 집중하며 작업을 할 수는 없지만, 낮보다는 특히 모두가 잠들고 고요한 시간인 밤에 더욱 집중력이 높아져서 평소에도 낮보다는 밤에
작업하는 경우가 많고, 더 익숙하기 때문에 눈 뜨자마자 작업을 시작했더라도 새벽이 되어서야 작업을 마치고 잠자리에 드는 날이 잦다.
계속해서 글을 쓰고 수정하며 챕터를 하나하나 완성해 나갔고, 잠시 작업을 쉬는 동안에도 시나리오에 필요한 아이디어들을 메모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제주에서 24일간 여행을 하면서 보았던 아름다운 절경, 트레킹과 등반을 통해 얻은 영감을 바탕으로, 다음 영화가 될 시나리오의 스토리를 만들어 갔고,
제주에서의 힐링이 확실히 그녀에게 도움이 되었으며, 4년간 그녀를 괴롭혔던 슬럼프 또한, 극복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여러 개의 챕터를 완성할수록 그녀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확신이 생겼고, 결말에 가까워지면서 그 확신은 그녀의 목표였던 시나리오 완성으로 이어졌으며,
마지막 챕터의 마지막 마침표를 찍는 스텔라
결과와는 상관없이 그녀가 시나리오의 마지막 마침표를 찍을 때의 쾌감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순간이며, 마지막 마침표 입력과 동시에 그녀는 뻐근했던
몸을 스트레칭하면서 굳었던 근육을 풀어낸다.
하지만 시나리오 완성이 작업의 끝이 아니라, 이제 검수와 수정 단계가 남았다.
그녀는 완성된 작품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었고, 이렇게 읽다 보면 오타와 조금 더 나은 표현으로 수정할 부분을 발견하기도 하는데, 반복해서 읽는 이유는
처음에는 발견하지 못했던 부분을 두 번째, 세 번째에 찾아내기도 하기 때문이며, 그로 인해 더 완벽에 가까운 시나리오를 완성하게 되는 것이다.
스텔라는 내일 회사 메일로 보내기 전에 한 번 더 검수하기로 하고, 4년 만의 두 번째 슬럼프를 극복하고 다음 시나리오를 완성했다는 성취감에 후련한 마음으로
야외 자쿠지에서 위스키를 마신다.
<2024년 07월 29일>
AM 10:40
다음 날 아침, 눈을 뜬 스텔라는 어제 완성했던 시나리오를 다시 한번 읽어보았고, 최종 검수와 수정을 마친 작품 시놉시스를 회사 메일로 전송하고는
오 대표에게 전화를 건다.
>>스타라이트 필름스 오 대표님
"대표님~"
(어~ 오 작가~ 우리 조카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네~)
"메일로 시놉시스 보냈어~ 확인해보고 피드백 줘~"
(보냈다고~ 진짜? 알았어! 역시 우리 오 작가~)
"일단 시놉시스만 보냈고 괜찮으면 서울 가서 미팅합시다~"
(그래요~ 오 작가~ 아이고, 너~무 잘했다~ 장하다, 우리 조카~)
"아이, 그만해~ㅋㅋ 나 담달부터는 두 달 동안 시카고 본가에
있을 거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네~ 오빠랑 언니한테 생일 축하한다고 전해줘~)
"알았어~"
오 대표와 통화가 끝난 후, 스텔라는 벌써부터 편한 마음으로 부모님을 만날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오후 내내, 시카고로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어디를 갈지, 찾아보던 중에 송악산 둘레길을 발견해 제주에서의 마지막 일정으로 정했다.
PM 09:20
오늘은 하루 종일 메이든과 핸드폰으로 연락을 주고받다가 갑자기 걸려 온 전화에 왠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여 전화를 받은 스텔라
>>메이든
(작가님, 잠시 들어가도 될까요?)
"응? 펜션 앞이야?"
(네. 잠시면 돼요. 너무 갑작스러우실까 봐 미리 전화 드렸어요.)
"응. 알았어, 잠시만."
그녀가 전화를 끊고는 바로 정문으로 나가 문을 열자, 불안해 보이는 메이든이 서 있다.
펜션 안으로 들어와 거실 소파에 앉은 메이든에게 그녀는 커피보다는 따뜻한 차를 주기 위해 커피포트에 물을 끓였고, 캐모마일 차를 우린 머그잔을 가져와
그에게 내밀었고, 머그잔을 받아든 메이든은 머그잔의 온도로 잠시 손을 따뜻하게 하고는 한 모금 마신다.
"무슨 일이야?"
무거운 공기만이 감싸던 침묵을 깬 건 스텔라였고, 메이든은 담담하게 조금 전에 자신이 목격한 것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2시간 전-
메이든은 어제 들어온 룸메이트 지호의 환영회를 겸해서 게스트 하우스 투숙객들과 곽지해수욕장 근처에 있는 횟집에서 술자리를 갖게 되었는데,
지호는 제주도로 오기 일주일 전에 해병대에서 제대했다면서 줄곧 해병대 군 생활 이야기나 순발력과 수영 실력에 대한 자신감을 드러냈고, 게스트 하우스
투숙객들이 아무리 그래도 밤바다 수영은 위험하다, 수영 선수들도 하지 않는 행동이다, 라는 말에 오기가 생겼는지, 계속해서 호기롭게 허세를 부려댔으며,
사람들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바다 수영을 감행했다.
처음엔 그의 대범함과 수영 실력에 사람들은 환호를 질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가 갑자기 허우적대기 시작했고, 이상한 낌새를 먼저 알아차린
메이든의 긴급 신고로 구급차가 출동했으며, 응급실로 실려 갔다.
룸메인 메이든이 함께 구급차를 타고 응급실로 향했고, 그가 깨어날 때까지 대기 의자에 앉아 기다리던 메이든에게 경찰이 찾아와서 지호가 자살 시도를
한 것이 아니냐는 의심에 대한 확인 조사가 필요하다며 참고인 자격으로 조사를 요청했다.
1시간 정도 경찰 조사를 마치고 나온 메이든은 다시 응급실로 향했으며, 지호는 그사이에 의식을 찾았다.
함께 게스트 하우스로 돌아와 지호가 방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확인하고는 곧바로 스텔라를 찾아왔다.
"2주 전에 작가님이 꿨다는 꿈 있잖아요. 그거 예지몽이었을까요?"
"글쎄, 난 메이든이 오늘 목격한 일을 듣고 나니까 그런 생각이 들긴 한데, 우연일 수도 있지."
"하아...아직도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요."
메이든은 스텔라의 손목을 잡아 자신의 가슴 위에 올려놨고, 그녀의 손바닥으로 전달되는 심장 박동의 진동이 느껴졌으며, 굳이 귀를 가져다 대지 않아도
그의 심장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많이 놀랬구나?"
"이런 일, 진짜 처음이에요. 진짜 처음. 하아...오늘 작가님 얼굴 못 보면 진정이 안 돼서 잠을 못 잘 거 같아서 민폐인 거 아는데...왔어요."
"잘했어. 차도 다 마시고 천천히 있다 가."
"네...작가님 저 수요일에 서울 간다고 했잖아요. 이틀 전에 이게 무슨 일인지..."
"그러게. 몇 시 비행기라고 했지?"
"6시 25분이요. 작가님도 31일에 간다고 하셨죠?"
"응. 내가 좀 빠르네. 난 5시 10분 꺼. 근데 서울 들렀다가 엄마 아버지 보러 시카고로 가~ 차도 놓고 가야 하고, 여기서 바로 가는 국제선도 없어서
차는 탁송으로 보내서 인천 공항에서 받고 바로 시카고로 가려고~"
"엄마, 아버지 너무 좋아하시겠다~ 근데 시카고에 얼마나 있다가 오시는데요?"
"아버지 생신이 8월이고 엄마 생신이 9월이라 두 달 조금 안 되게 있다가 올 거 같아."
"헤에~ 주차비 많이 나오겠는데요?"
"아, 그건 환이한테 부탁했어. 인천 공항 도착 시간 맞춰서 오기로 했고 환이 만나서 차 인계하고 난 출발~ 환이는 우리 집에 차 갖다 놓고~"
"아~ 작가님 친구분들 다 좋은 분들인 거 같아요~"
"그치~ 다들 의리 빼면 시체지. 내일 마지막으로 송악산 둘레길 걸을 건데 같이 갈래?"
"마지막까지 트레킹? 와~ 트레킹이랑 등산에 진짜 진심이시네요~ 좋아요! 언제 다시 볼지도 모르는데..."
"인연이면 만나겠지~"
"그렇겠죠~"
그렇게 차를 마시며 한참 대화를 나누다 내일 카페[맨도롱] 앞에서 만나기로 하고 숙소로 돌아간 메이든
<2024년 07월 30일>
PM 02:45
오후 늦게 송악산 둘레길을 걷기 위해 트레킹 준비를 마친 스텔라가 카페[맨도롱] 매장 옆에 차를 세워두고 안으로 들어와 카페 사장님과 익숙하게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어디 가시나 봐요?"
"사장님~ 저 내일 제주 떠나요~ 그래서 이렇게 돌아다니는 것도 마지막이네요~"
"아, 그래요? 아휴, 아쉬워서 어떡해요~ 이제 작가님 언제 보나?"
"담에 엄마, 아버지 모시고 또 올게요~"
"영화는 언제 개봉해요?"
"이제 막 회사로 시나리오 보내서 1년은 더 걸릴 거예요~"
"요 며칠 저희 카페에서 작업하시는 거 보다 보니 벌써 기대가 돼서요~"
"미팅도 해야 되고, 감독님, 연출팀도 모여야 되고, 촬영도 해야 되고~ 아직 멀었어요~"
"그렇구나~ 오늘은 어디 가요?"
"송악산 둘레길이요~ 아, 아 한 잔도 주세요~"
"아, 네!ㅋ"
그때, 메이든이 카페 안으로 들어오고, 함께 커피 한 잔을 마신 후, 메이든 또한 카페 사장님과 인사를 나누고는 스텔라의 차량을 이용해 송악산 둘레길로
이동한다.
서귀포에 위치한 송악산까지는 차로 40분 거리에 있으며, 주차장에 도착한 두 사람은 차량을 세워두고는 입구로 향한다.
PM 04:00
송악산 둘레길은 99개의 작은 봉우리가 모여 있는 송악산을 둘러싼 둘레길로, 가파도와 형제섬, 마라도까지 훤히 보이는 송악산은 세계적으로 유래가 적은
이중 분화구가 있으며, 화산학적 가치가 높은 산이다.
송악산 둘레길은 완만한 길의 연속으로 험하지 않고 누구나 쉽게 오를 수 있어 가족과 반려동물이 동반하여 산책하기 좋은 구간으로, 말 방복지가 있어
특별한 볼거리를 제공하며 탁 트여 있어 제주의 바람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해안 절벽에 난 길을 따라 걷다 보면 갈림길이 나오고, 1시간이 소요되는 정상으로 가는 길과 2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
전망대로 가는 길, 두 가지 코스가 있으며, 가벼운 계단을 따라 올라 가면 정산에서 풍경을 바라볼 수 있는데,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탁 트인 바다가 아름답다.
이뿐만 아니라 송악산 둘레길은 일제강점기 역사를 들여다볼 수 있는 곳으로, 일제강점기 일본군이 제주의 도민을 강제로 동원하여 만든 해안 동굴인
'제주 송악산 해안 일제 동굴 진지'를 비롯하여 올레길을 따라 인근의 '제주 셋알오름 일제 고사포 진지', '제주 모슬포 알뜨르비행장 일제 지하 벙커' 등,
일제강점기의 흔적이 남아 있어 제주의 아픈 역사를 돌아볼 수 있다.
스텔라와 메이든은 해안을 옆에 끼고 둘레길을 걸으면서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바닷가 풍경을 구경했다.
분화구가 있는 정상과 전망대로 갈라지는 표지판 앞에서 고민하다가 1시간밖에 걸리지 않으니 정상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오면서 둘레길을 걷기로 했다.
산이수동 포구에서 해안을 따라 정상까지 도로가 닦여 있고, 분화구 정상부의 능선까지 여러 갈래의 소로가 나 있어서 방문하기 수월하며, 총 3개의 전망대와
주상절리도 볼 수 있다.
해안 절벽에 부딪히는 파도는 장관이었으며, 그늘이 없어서 햇볕이 뜨거운 날씨엔 힘들 수도 있지만, 내리던 비가 그친 구름 많은 날씨였기에 멀리 가파도와
마라도는 흐리게 보였어도, 걷기엔 좋았다.
정상에 올라 2중 분화구를 보고 내려오는 길에 둘레길을 걷기 시작했다.
정상에서 탁 트인 바다를 내려다보는 것도 좋았지만, 3개의 전망대를 거쳐 가는 둘레길을 걸으며, 산방산과 주상절리의 풍경도 이국적이고, 스텔라의 제주
한 달 살기의 마지막 여정으로도 충분했다.
저녁은 아직 냉장고에 남아 있는 재료들로 만들어 먹기로 한 스텔라는 5~8월엔 수국, 8월부턴 핑크 뮬리를 볼 수 있다는 카페에서 디저트를 먹기 위해
수목원 카페 [ㅁㄴㄹ블랑]으로 이동했다.
차로 15분 거리에 위치한 [ㅁㄴㄹ블랑] 제주의 아름다운 바다와 산방산, 형제섬이 보이는 가든 카페로, 독특한 프랑스식 건축과 세련된 인테리어로 유명하며,
내부에는 영국을 포함한 유럽의 아름다운 티웨어와 각종 피겨린을 감상할 수 있고, 유럽의 귀족 문화를 느낄 수 있는 소품과 그릇들이, 바깥 풍경을 보면서
느긋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테라스도 마련되어 있다.
2,000여 평 정원 속에 향기 나는 수국 산책로가 있으며, 산방산과 송악산 사이로 형제섬과 사계 앞바다가 보이는 환상적인 조망 또한 이곳의 자랑거리이고,
인생샷을 남길 수 있는 다양한 포토존과 피아노 연주 버스킹을 즐길 수 있는 야외 잔디 정원도 수많은 여행객들이 방문하는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