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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말은 은이지만 침묵은 금이다

by 제나랑


<2024년 08월 16일>

AM 11:00

호텔에서 체크아웃한 후, ㅇㅂ 택시를 불러 샌프란시스코 공항으로 이동 중인 스텔라와 부모님


공항에 도착해 비행기를 타고 오헤어 공항으로 돌아오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와이너리 투어에 대해 너무 좋았다며 이야기하는 켈리와 재규를 보고


왜 더 이전엔 모시고 오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에, 본가에서 차로 1시간 반, 2시간 반 정도 걸려서도 갈 수 있는 와이너리가 있으니, 이번만이 아니라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모시고 가야겠다고 다짐했다.

본가로 돌아와 세 사람은 일주일에 2, 3번씩 골프도 치고, 옆집의 로드니 하고도 시간을 보내다 보니, 스텔라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벌써 달이 바뀌어


9월이 되었으며, 그동안에 회사 직원들과 줌으로 영상 통화를 하면서 계속 소통하며 작품에 대한 이야기, 여러 번의 회의와 미팅을 통해 영화 제작의 윤곽이

잡히고 있었다.

<2024년 09월 02일>

AM 10:00

스텔라는 일어나자마자, 노트북 전원을 켜고 줌에 연결한다.

연결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그동안 씻고 나온 그녀는 홈웨어도 그대로 입은 채로 노트북 앞에 앉았고, 곧이어 연결된 화면에는 오 대표가 나온다.

"하이, 대표님~"

"하이, 작가님~ 거기 몇 시지? 10시인가?"

"맞어~ 거기 한 7시 됐나?"

"응~ 오늘 미드나잇 블루 제작 확정됐어~ 이제 팀 꾸려야지. 일단 우리 소속 감독님들한테 시놉시스 보냈고 연락 기다리는 중이야~"

"엄 감독님이 해주시면 좋은데~ 그분 전작들 보면 그 감성이 미드나잇 블루랑 잘 맞을 거 같아서~"

"그래? 우리 소속 감독님 별로야? 물어보고 시놉 보낼 걸 그랬나?"

"아니야~ 내 희망 사항이지~ 누구라도 맡아주시면 좋지~ 요새는 이런 영화 잘 안 만들려고 하니까~"

"그렇긴 하지~ 그래도 엄 감독님한테도 보내 볼게~"

"응~ 아버지랑 통화했어? 불러 줘?"

"아니~ 우리 남매는 잘사냐, 잘 산다 이 문자 몇 통이면 돼~ㅎㅎ"

"남매는 다 그런 거야?"

"응~ 거의 다 그래~ 서로 주먹다짐하는 남매도 봤어~ㅎㅎ 원래 무소식이 희소식이고, 말은 은이지만, 침묵은 금이란다~"

"대표님, 혹시 직원들한테도 그런 말투로 얘기하는 거 아니지?"

"왜? 뭐, 잘못됐어?"

"응~ 한참 잘못됐지~ 난 그런 말이 좋은 말로 들리지만, 다른 20, 30대 직원들은 그냥 꼰대 소리로 들린다고~


나도 가끔 그런 말 하고 나서 아차 싶더라~ 어차피 그 나이대는 바른말이 잘 안 들리잖아~"

"에휴. 상전 모시지, 아주~ 그래도 다들 나 좋아해~ 다른 대표들이랑은 다르다고~"

"그건 맞지~ 돈을 많이 주니까요~ㅋㅋ 영화사들 중에서 연봉 젤 많이 주는 곳일 거다, 우리 회사가~"

"젋은 애들이 열심히 하는 만큼 줘야지~ 당연한 건데~"

"그치~ 그게 당연한 거지~ 근데 그게 쉽지는 않은 일인 것도 맞지~ 그리고 돈을 많이 줘서 더 열심히 하는 애들도 있을걸?


'오 여기 개꿀' 이러면서 최소한의 일도 하지 않고 돈만 받아 가는 월급 루팡들은 이제 거의 걸러내지 않았나? 아직도 있어? 적어도 우리 팀엔 없는 거 같은데."

"아직은 꼭 한 명씩은 있어~ 명분이 없어서 못 자르고 있을 뿐. 너네 팀에도 한 놈 있잖아~ 내가 이 회사 차리고 나서 너 처음 데리고 왔을 때 생각나?


그때 그놈이 너 겁나 갈구더라~ 계속 눈만 마주쳐도 꼽주고~ 둘이 무슨 원수 진 일이라도 있나 싶었더니 그런 것도 아니더만~


한 1년 뒤에 니가 내 조카라는 거 알고 바~로 태세 전환~ 와, 소름 돋았잖아~ 지금도 너만 보면 아양 떨지?"

"그렇지, 뭐~ 개 버릇 남 못 준다고. 사람은 안 변하지~ 아직도 그 사람이 나한테 아양 떠는 거 볼 때마다 소름 돋아~ 토할 거 같애~


다른 직원들한테는 안 그래? 다른 애들이 같이 일 못하겠다고 하면 명분을 만들어서라도 내보내야지~ 난 사옥에 가끔 가지만, 다른 애들은 매일 보잖아~


그 사람 나한테만 그래?"

"면담 시간에 편하게 해주려고 디저트 카페까지 데리고 가서 말해보라고 해도 그런 말 아직 없는 거 보니까 너한테만 그러나 봐, 그놈~"

"아이 씨~ 더 싫어~ 그럼 명분이 없잖아. 근데 또 한편으로는 다행이기도 하고~ 다른 직원들도 불편한데 말 못하는 게 아니라면, 진짜 나한테만 그런 거면...


같이 일하는 직원들만 안 불편하면 됐다 싶기도 하고~"

"으이구~ 착해가지구~"

"고모 조카 안 착해~ 착한 게 아니라 한 사람을 싫어하면서 더 미워하고 더 괴롭히기 위해서 내가 쏟아야 하는 에너지가 아까운 거지~


누군가를 싫어하는 것도 힘든 일이더라~"

"아...그 ㄴ은 잘 있다니? 남의 조카 힘들게 해놓고 지가 잘살고 있으면 안 되지~"

"못 살지는 않는 거 같던데 다 잊을까 봐 최소한의 에너지로 귀찮게 하는 중이야. 야금~ 야금~ 잊을 만하면 상기시켜주면서."

"아, 그 엉겅퀴인가, 뭔가 하는 거 아직도 보내? 너도 참..너다~ 독해~"

"그럼~ 내가 누구 딸인데, 누구 조카인데? 잘못 건드렸다는 거 알려줘야지~ 모르는 거 같아서~ 내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걸..."

"맞네~ 독한 건 그 ㄴ이지~ 멍청한 건가? 알려줘도 가만히 있는 거 보면? 아니, 사과 한마디면 되는데~


그 한마디를 못해서 지금 몇 년째 그 뻘~건 엉겅퀴를 생일마다 받냐~ㅎㅎ"

"지 팔자 지가 꼬는 거지, 뭐~ 여튼, 감독님 연락 오면 알려줘~"

"알았다~ 너 이번 달에 한국 오는 거 맞지?"

"응~ 27일 비행기~"

"그래~ 엄마, 아버지랑 좋은 시간 보내고 조심히 와라잉~"

"네~"

오 대표와의 영상통화를 마치고, 그제야 브런치를 먹기 위해 1층으로 내려가는 스텔라

오늘은 재규가 차렸는지, 그가 앞치마를 하고는 그녀가 내려오자, 다이닝 룸 식탁 위에 접시와 머그잔을 올려놓는다.

"일어나자마자 바쁘네, 우리 딸?"

"고모랑 통화~ 이번 작품 영화로 제작하는 거 확정됐다고~ 사실 작품에 따라 손익분기점 넘기 어렵다고 판단하면 투자자들이 안 모이고,


그렇게 되면 제작조차 무리니까 안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했는데 다행히 제작할 수 있게 됐어~"

"그런 걱정을 왜 해~ 누가 쓴 작품인데~"

스텔라는 웃으며 재규가 차려준 브런치를 맛있게 먹기 시작한다.

접시 위에는 바삭하게 구운 베이컨, 겉은 바삭하게 속은 촉촉하게 잘 구워진 프렌치토스트, 스크램블 에그 그리고 머그잔에는 향긋한 향을 풍기는


드립커피가 있고, 이어서 토스트에 발라 먹을 버터, 잼과 시리얼을 담아 먹기엔 작고 음료를 담아 마시기엔 약간 큰 크기의 컵을 가져오는데,


그 안엔 단호박 스프가 담겨 있다.

"오~ 단호박~ 좋은데?"

"커피 있어서 하지 말까 하다가 우리 딸, 빵 먹을 때 스프에 찍어 먹는 거 좋아하니까~"

"역시~ 우리 아버지밖에 없네~"

재규는 주방 정리는 마치고, 스텔라 앞에 앉는다.

"엄마는?"

"로드니네~"

"아~ 할매, 할배 보러 가야 되는데~"

"안 그래도 엄마랑 그 얘기했어~ 중순쯤 가자는데?"

"중순? 그래, 그러자~ 더 일찍 가자 할 줄 알았지~"

"계속 영통하면서 회의하길래, 바빠 보여서~"

"아~ 아직 감독이나 제작팀이 꾸려진 게 아니어서 그전까지는 회의 자주 할 거 같아~ 그리고 엄마 생일 어떻게 할까?


아버지랑 나랑 생일상 차릴까? 받으셨으니 갚으셔야지~ㅋㅋ"

"뭐야~ 이걸 뭐라고 하더라? 답? 답 뭐였는데?"

"답정너? ㅋㅋ"

"어~! 답정너 다, 너~ 그래~ 생일상 차리자~ 아빠가 실력 발휘 좀 하지~"

"미역국은 나 시켜줘~"

"알았어~ 얼른 먹어~"

스텔라가 창밖의 야외 정원을 보며 브런치를 먹는 모습을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는 재규

브런치를 다 먹은 후, 그녀가 설거지를 하려고 하자, 어느새 뒤에 와 있던 재규가 난리가 난다.

"노노노~ 냅둬, 냅둬~ 설거지 아빠가 할게~"

"아니야~ 설거지 정도는 하게 해줘~"

"놉~ 안 돼~! 산책이나 하고 와~"

"아이 참~"

그녀는 재규의 뒤에서 그의 허리를 감싸 안고는 3층 작업실로 올라간다.

작업실 안으로 들어가자, 이젤 위에 미완성된 그림이 있고, 이젤 앞에 간이 의자를 가져다가 앉으며 그림을 마저 완성하기 위해 붓을 든다.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글을 쓰는 서재뿐만 아니라 그림을 그리는 작업실도 있을 정도로 자신의 전공이자 취미인 그림에 진심인 스텔라는


2년 전에 그리다 만 그림을 오랜만에 마주하니 한숨이 저절로 나온다.

본가에 한 번 오면 짧게 있다가 가는 것도 아닌데, 그림 하나를 완성하지 못하는 게 늘 아쉬웠다.

그녀는 그림을 바라보다가 팔레트를 들고 한켠에 그림에 칠하다 말았던 색을 다시 만들어내기 위해 물감을 고른 뒤,


많지 않은 시도로 거의 같은 색을 만들어냈고, 붓을 움직여 그림 위에 덧칠해본다.

동일한 색임을 확인하고는 칠하기 시작했고, 2년 전에 이 그림을 그리며 창작의 기쁨과 함께한 설렘이 다시 떠오르면서 머릿속엔 어떻게 이 그림을 완성하고,


어떤 색을 더해야 하는지에 대한 청사진이 그려졌다.

처음엔 다소 조심스러운 손길이었지만, 점점 속도를 높여 빠르게 그려 나갔고, 그녀가 칠하는 색이 덧칠되고 일부의 색은 석이기도 하면서


그녀의 마음속에 있는 감정들도 격렬하게 일렁이는 것을 느꼈다.

그림을 완성해 나가면서 점점 더 깊은 몰입에 빠져들었고, 몇 시간을 집중해서 그리다가 마침내, 마지막 붓 터치를 끝으로 그림이 완성되었다.

스텔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팔레트와 붓을 작업대 위에 올려놓으며 뻐근해진 손목을 풀었고, 한 발자국 뒤에 서서 한동안 그림을 바라보는데,


2년 전에 그리기 시작해서 2년 만에 완성한 그림은 단순한 작품이 아니라 2년 전의 감정과 지금 현재의 감정이 한 곳에 담겨있는 느낌이었다.

완성된 그림은 작업대 위에 올려놓고는 오른쪽 귀퉁이에 자신의 사인을 표시한 후, 표면의 물감이 마르도록 바닥에 내려 벽에 기대어 세워 놓았고,


다른 쪽 벽과 바닥에 세워둔 종이 덮개에 싸여있는 새 캔버스를 이젤 위에 놓는다.

바로 다른 그림을 그리려는 건지, 이번엔 붓이 아닌 2B 연필을 들어 스케치부터 시작한다.

간단히 기본 스케치만 해둔 후, 조금 전에 사용했던 붓보다 더 두꺼운 붓으로 배경이 되는 색과 베이스가 되는 색을 먼저 칠하며 깔아주고,


그 위에 켜켜이 색을 덧칠해 원하는 색이 나올 때까지 쌓아간다.

이번 그림은 이전 그림보다 비교적 빠르게 완성해 나갔고, 그녀가 가장 얇은 붓으로 디테일한 부분이나 명암 등을 잡아가면서 완성도를 높이면


이윽고 그림 하나가 완성된다.

붓과 팔레트를 내려놓은 후,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서 그림을 바라보는 스텔라

그녀가 완성한 그림은 제주도에서 보았던 검은 자갈이 깔린 해변가, 에메랄드빛과 밝은 파란색의 바다, 푸른 하늘과 그 위에 새하얀 뭉게구름이 떠 있는


한담 해변이었고, 사진을 꺼내 보지 않고 그녀의 기억에만 의존해서 그린 그림이었는데도 마치 사진이나 엽서 같은 느낌이 드는 그림이었다.

그림이 완성되고 나서야 핸드폰을 꺼내 한담 해변 사진을 찾아 그림 옆에 두고 비교해 보는데, 물론 완전히 똑같지는 않겠지만 거의 비슷해 보일 정도여서


그녀 또한, 그녀가 그린 그림에 만족했다.

한담 해변 그림은 한국 집으로 가져가 걸어놓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고, 어떻게 가져갈지 고민했다.

역시나 오른쪽 귀퉁이에 사인을 한 후, 이전에 완성한 그림 옆에 함께 세워두고는 작업실을 나온다.

미처 작업복으로 갈아입는 걸 잊고 홈웨어를 그대로 입은 채로 그림을 그리는 바람에 물감이 여기저기에 튀어서 더러워졌다.

바로 드레스룸으로 들어가 다른 홈웨어를 꺼내 갈아입고는 물감이 묻은 홈웨어를 방문 앞에 놓여 있는 세탁 바구니 안에 넣어도 되지만,


빨랫감을 옮기는 부모님의 번거로움을 조금이나마 덜어드리려 세탁실로 내려가 세탁기 앞에도 놓여 있는 세탁 바구니 안에 넣는다.

세탁실에서 스텔라가 나오자, 세탁실로 들어가려던 켈리와 마주친다.

"어? 딸~ 왜 거기서 나와?"

"아, 잠옷 입고 그림 그리다가 물감이 튀어서~"

"아~ 그림 다시 그렸어?"

"응~ 재작년엔 그림 그리다가 말아서 한 점도 완성 못 했는데, 오랜만에 다시 그렸더니 그 그림도 마저 완성 하고 다른 그림도 또 그렸어~"

"진짜? 보여줘~"

켈리는 스텔라를 따라 작업실로 향했고, 바닥에 세워놓은 그림 두 점 앞에 서서 그림을 바라본다.

"와~ 이 바다 그림 너무 좋다~ 너무 예뻐~ 이거 거실에 걸어두면 안 돼?"

"앗, 한국 가져가려고 했는데~"

"그래? 그럼 똑같이 그려줘~"

"알았어~ㅋㅋ"

어느덧 저녁 시간이 되어 저녁을 먹은 후, 켈리의 요청대로 한담 해변을 한 장 더 그리기 위해 작업실 안으로 들어가 이젤 앞에 앉았고,


기본 스케치를 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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