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나는 죽는다
<2024년 5월 11일>
서울의 한 사거리 한복판.
여러 대의 차들이 엉킨 도로 위로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찌그러진 차량 안에서 한 여자가 고통의 신음 소리를 내며 희미하게 눈을 떴다.
차량 밖으로 삐걱거리며 다가오는 그림자가 보였다.
긴 다리에 날렵한 실루엣, 그리고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로 차갑고 날카로운 눈매에, 검은 수트 차림을 한 남자
그 남자는 엉망이 된 사고 현장을 가로질러 걸어오다가 여자가 있는 차량 앞에 걸음을 멈췄다.
"갑술년 경오월 기묘일 출생. 채루나. 본인 맞습니까."
낯선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여자는 두려움에 온몸을 덜덜 떨며 고개를 돌렸지만, 주변에 그를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누..누구세요…?"
"망자 채.루.나. 당신의 마지막을 인도한다. 가자."
"네? 망..망자요…? 제..가요?"
그때, 여자는 의식을 잃었고 구급대원들이 다가와 여자의 맥박을 확인했다.
여자의 맥박이 느껴지며 코 밑에 가져간 손에 여자의 숨이 느껴지자, 소리쳤다.
"생존자 발견했습니다!"
"문짝 뜯어야 할 거 같은데요."
구급대원들이 개문 도구를 이용해 차량의 문을 강제 개방하고 여자를 끌어내 들것에 싣는다.
남자는 한 발 뒤로 물러서 여자가 구출되는 과정을 지켜본 후, 그의 형제가 푸른 빛이 도는 연기로 변했고, 연기가 사라지면서 남자도 함께 사라졌다.
-30분 전-
여자의 차량은 역삼동에서 한남대교 방면으로 가는 길에 마주한 신사역 사거리를 지나고 있었고, 신호등에 걸려 대기 중인 와중에 갑자기 졸음이 쏟아지다 못해,
그녀도 모르는 사이에 마치 블랙 아웃이라도 된 것처럼 정신을 잃었으며, 횡단보도와 횡단보도 사이에 위치한 교통섬에 있던 볼라드를 박고 나서야 정신이 들어
그 충돌로 인한 굉음과 충격으로 차량 앞부분의 엔진룸은 완전히 구겨지다시피 찌그러졌다.
이마가 찢어지는 찰과상 외에는 다친 곳이 없던 그녀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정신없이 핸드폰을 들어 보험사 번호를 찾기 시작했고,
그녀가 보험사와 통화하는 사이, 직진 차선에서 신호를 무시한 채, 달려오던 대형 덤프트럭이 중앙선을 넘어 그녀의 차량 운전석을 덮쳤다.
신사역 사거리는 불빛이 번쩍이며 혼란으로 가득 차 있었고, 트럭은 여자의 차량을 덮치기 전에 이미 세 대의 차량이 들이받는 바람에
세 대의 차량은 서로 뒤엉켜 그 사이로 연기를 내뿜고 있는 모습은 마치 지옥의 한 장면처럼 보였다.
사고 현장에선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졌고, 곧이어 근처 관할서에서 출동한 경찰들과 구급대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트럭 운전사는 사고 당시 음주 상태였으며, 그의 무책임한 행동은 한순간에 차량 네 대를 파괴하는 일을 초래했고,
이 끔찍한 사고 속에서 여자는 구출되기 전까지 오랜 시간 동안 갇혀 있어야 했다.
한편, 검은 수트 차림의 남자는 근처 건물 옥상 위에서 검은 봉투에 담긴 명부 여러 장을 손에 든 채, 사고 현장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푸른 빛 연기 속으로 사라졌다가 다시 현장 속에서 나타났다.
그가 여자에게 다가오는 모습은 마치 세상의 모든 고통을 짊어진 듯했다.
그의 눈매는 차가운 빛을 띠고 있었고, 그 속에는 수많은 영혼들의 슬픔이 서려 있었다.
여자의 출생일과 이름이 적힌 명부는 사라졌고,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이송되자, 남자는 현장에서 즉사한 망자들의 영혼들을 순차적으로
출생일과 이름을 확인한 후, 어디론가로 인도했다.
사고로 인해 목숨을 잃은 세 명의 영혼들이 한곳에 모였다.
그들은 각기 다른 모습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두려움과 슬픔이 가득한 눈빛을 교환했다.
60대 초반의 여자 영혼은 자신의 차에 있던 가족사진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렸고, 30대 후반의 여자 영혼은 친구들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
후회를 하며 고개를 숙였으며, 40대 초반의 남자 영혼은 결혼식을 일주일 앞두고 있어 예비 신부인 여자친구에 대해 미안함에 두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연신 닦아냈다.
"근데, 당신은..누구죠?"
"난 당신들을 저승으로 인도할 저승사자다. 이제 당신들은 저승으로 가야 할 시간이다. 이곳 이승의 고통에서 벗어나야 한다."
영혼들은 저승사자의 말에 반응하지 못하고, 그저 서로를 바라보며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저승사자는 다시 한번 단호하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두려워하지 마라. 당신들의 여정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일 수 있다."
그러자 세 영혼들은 저승사자가 이끄는 길로 따라가기 시작했다.
그들이 지나가는 길은 한줄기 환한 빛과 저 멀리서 따뜻한 빛으로 반짝였다.
그 순간, 세상의 모든 슬픔과 고통이 사라지는 듯했다.
영혼들은 사고의 여파로 가슴이 아팠지만, 한편으로는 평안한 곳으로 가고 있음을 느꼈다.
저승사자는 영혼들을 저승의 문 앞에 데려다 놓고, 마지막으로 그들을 돌아봤다.
"이승에서의 모든 아픔이 사라지길 바란다. 이 문을 지나면 당신들은 49일에 걸친 재판을 받게 된다.
재판의 결과에 따라 천국과 지옥으로 가게 되며, 천국으로 가는 영혼은 자유로워지게 될 것이다."
"지..옥으로 가면요?"
저승사자는 질문한 60대 초반의 여자 영혼에게 다가가며 차갑다 못해 서늘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지옥으로 가는 영혼은 이승에서 받지 못한, 받지 않았던 벌에 따라 인간 따위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천벌을 받게 될 것이다.
죽어서도 죽고 싶어질 정도로, 처절하고 잔인하게."
저승의 문이 열리고 세 영혼들은 그 문을 지나고, 저승사자는 그들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바라봤다.
저승의 문이 닫히고 나서야 저승사자는 다시 이승으로 향한다.
현장은 사고가 수습되고 점차 고요함을 되찾아갔다.
저승사자는 여자가 이송된 병원으로 향했고, 여자는 왼쪽 어깨가 심하게 부서지는 중상을 입어 이송되자마자, 상완골 간부골절술이라는 대수술을 받아야 했으며,
어깨에는 철심 3개가 박혔고, 그 수술 이후에도 그녀는 3개월 동안 의식불명 상태로 중환자실에 꼼짝없이 누워만 있었다.
이 끔찍한 사고는 여자의 몸과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러나 더 큰 변화는 그녀가 3개월간 의식 불명 상태일 때 시작되었다.
그날 이후, 그녀는 단순히 고통스러운 후유증만을 겪는 것이 아니라 삶과 죽음 사이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모든 것에는 균형이 있다. 모든 생명에 따른 죽음이 있고, 모든 죽음에 따른 생명이 있다. 모든 삶과 죽음은 연결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