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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화

예지몽

by 제나랑


[루나의 꿈속]

루나가 깊은 잠에 빠져들자, 꿈속의 세계가 루나의 눈앞에 펼쳐졌다.

안개가 자욱하게 낀 한적한 도로가 보이고, 횡단보도 앞에 서서 보행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

건너편에는 무인 편의점과 카페가 있는데, 카페 간판은 안개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그 순간, 저승사자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 보고, 잘 기억해라. 니가 마지막 숨을 거두게 될 순간이다."

그때, 한 대의 검은색 차량이 거칠게 타이어를 갈아대며 빠른 속도로 루나에게 다가오고 있다.

루나는 공포심에 온몸이 얼어붙어 꼼짝도 할 수 없었고, 심장이 터질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안 돼!”

루나가 소리쳤지만,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꿈속의 시간은 느리게 흘러갔고, 저승사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가 알려준 날짜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이렇게 죽는 건가?'

루나는 절망에 가득 차 있었지만, 동시에 그 순간을 피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차가 가까워질수록 루나는 자신의 몸이 저항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대로 그 차량에 받혀 그녀의 몸은 허공을 날아 100m쯤 떨어진 곳에 추락했다.

그 순간, 그녀는 꿈속에서 깨어났고, 침대 위에서 땀으로 흠뻑 젖은 채로 심장이 쿵쿵 뛰고 있었다.

엄청난 고통이 밀려와 꿈에서 깼지만, 그 이후에도 실제로 생생하게 느껴지는 통증과 기억 때문에 괴로워했고, 링거 주사에 연결된 버튼을 누르자,


진통제가 투여되면서 통증이 점점 잦아들었다.

마치 수술 부위처럼 실질적인 통증인 것처럼 진통제에 의해 통증이 사라지고 진정되는 상황 자체도 그녀에게는 혼란스럽고 당황스러웠다.

그때, 저승사자가 또다시 나타난다.

"아, 깜짝이야!"

"예지몽이다."

"예..예지몽이라구요?그럼..내가 진짜 그 횡단보도에서 죽는다는 거예요?근데..전 퇴원하려면 멀었는데 왜 횡단..보도에 서 있다가 그런 일을..당하는 걸까요…?"

"그건 두고 봐야 알겠지만, 일단 병원 밖엔 나가지 말고 조심해라."

"저승사자랑 '조심해'라는 말은 진짜 안 어울리긴 하네요. 혹시 이름이 뭐예요?"

"저승사자가 되는 순간, 이승에서의 기억뿐만 아니라 존재 자체가 사라진다. 이름까지도..."

"아...그럼, 하나 만들어요."

"필요 없다."

"그럼, 뭐라 불러요? 아저씨는 싫고, 그냥 저승사자, 이렇게 부를까요?"

"니가 만들어 주던가."

"그래도 돼요? 음...그럼, 시안. 시안 어때요? 영어, 한자, 한글 다 쓸 수 있는 이름인 거 같아서요."

"...좋네."

갑자기 병실 밖에서 누군가가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리자, 시안은 또 푸른 빛 연기로 사라진다.

병실 안으로 문을 열고 들어오는 한 남자

>>이름: 설지욱

나이: 30세

직업: 대형 로펌 [누리] 소속 신임 변호사

“루나, 괜찮아? 의식을 찾았다고 연락받자마자 오려고 했는데 맡은 사건이 있어서…3개월 동안이나 안 깨어난 거 알아?


산소 호흡기도 떼고, 많이 좋아진 거 같아서 다행이다~”

"숨 좀 쉬면서 말해~"

"고등학교 때부터 손이 많이 가는 건 알았지만, 늙어서도 참~"

"뭐~ 그 뒷말해 봐, 어디~"

"팔 하나로 뭐, 어떻게 하게? ㅋㅋ"

"이씨~ 퇴원만 해봐, 아주~"

"돌아왔네, 채루나~"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오고 나니까 안 보이던 게 자꾸 보여."

"뭐가 보이는데?"

"세상엔 밝게 빛나는 것들만 있지는 않다는 거. 그 뒤에 어둠도 함께 공존한다는 거."

"오~ 너, 뭔가 달라졌다?

"요단강 건널 뻔했는데 달라지는 게 없으면 그게 더 이상한 거 아니야?"

출근 전에 잠깐 들른 거라 대화를 오래 나누지는 못하고, 지욱은 내일 또 오겠다며 병원을 떠났다.

루나는 그의 다정함에 오랜만에 안정을 느꼈지만, 그녀의 마음 한구석에는 예지몽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떠나지 않았고, 다시 혼자 남겨졌다.

시안이 다시 나타났다.

"잘생겼네."

"마음이 더 잘 생겼어요."

"아주 푹 빠졌네."

"빠지긴 뭘 빠져요. 그런 거 아니에요."

"고등학교 같이 다녔구나."

"그런 거까지 보여요?"

"몇 장면만."

"고등학교 선배예요. 저 신입생 때 2학년이었고 사기캐였어요.


공부도 항상 상위권이고 운동도 잘하는데 모든 사람에게 성실하고 잘생기기까지 하니까요.


인기는 뭐, 말할 것도 없고 점심시간 때마다 농구를 하면 학년별로 구경하면서 응원하는 팬클럽도 있었거든요.


저도 거기 껴서 같이 구경하다가 농구공에 맞은 적인 있어요.


선배가 미안해하면서 매점에서 바나나 우유를 사줬는데,


그날 이후로 계속 마주치면 인사하고 말 걸고 곤란하거나 어려운 일 있을 때마다 도와줬어요.


선배가 졸업하면서 잠깐 연락이 끊겼다가 제가 대학 가고 SNS로 연락이 와서 그때부터 지금까지 쭉~"

"사귀었네."

"안 사귀었는데요?"

"근데 니가 의식 불명 상태였던 3개월간 매일 병문안을 왔다? 이상한데?"

"매일..왔다구요?"

"그래. 간호사한테 확인해 보던가. 다른 사람이 말 안 하면 매일 온 것도 모를 텐데 매일 퇴근하고 와서 혼자 떠들어 대다가 가더만.


근데도 안 사귄다? 그건 너무한 거 아닌가?"

루나가 시안에게 무슨 말을 하려다가 의료진이 들어오는 소리에 말을 멈춘다.

주치의는 점심 먹기 전에 일반 병실로 옮기자며 병실을 나섰고, 간호사는 그녀의 바이탈을 확인한다.

"아까 그분 왔다 가시던데 얘기 많이 나누셨어요?"

"아, 선배요? 오늘 처음 온 게 아닌가 봐요?"

"어? 말씀 안 하셨어요? 루나님 3개월 동안 의식 불명 상태일 때 매일 저녁마다 오셨는데요?"

"아, 진짜요?"

"네~ 참 다정하시던데~ 오실 때마다 저희 커피도 사다 주시고~ 카페 사장님이시라면서요? 커피 맛있던데요?"

"감사합니다. 나중에 저 퇴원하면 더 맛있는 커피 쏠게요~"

"진짜요? 벌써 기대되는데요? 잠시 쉬고 계시면 일반 병실로 옮겨 드릴게요~"

"네~"

간호사도 병실을 나간 이후로 얼마 지나지 않아서 루나는 일반 병실로 옮길 수 있었다.

[일반 병동 1인실 517호]

루나는 자신의 병실로 들어가기 전, 옆 병실의 이름을 스쳐 지나가면서 보게 되었다.

[518호 방영길]

병실을 옮긴 후, 3개월 동안 의식이 없었던 그녀의 짐이라고는 옷과 운동화, 그리고 가방 하나가 전부였다.

그에 비해 미니 냉장고엔 지욱이 채워놓은 음료와 간식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하지만 아직은 왼쪽 팔을 움직이는 것조차 쉽지 않은 일이라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

그녀가 냉장고에서 꺼낸 음료수의 뚜껑을 따기 위해 낑낑대고 있는데, 시안이 나타난다.

"도와줘?"

"엇, 네!"

시안은 돌려서 따는 플라스틱 뚜껑을 엄지와 검지를 이용해 튕기자, 날아간 뚜껑은 병실의 벽과 냉장고 문, 그리고 수납장 문을 차례로 맞은 후,


수납장 아래에 있던 휴지통 안으로 안착한다.

"오~ 빨대도.."

시안은 한숨을 쉬며 마지못해 냉장고 위에 이 빠진 머그잔에 꽂혀 있는 빨대 하나를 집어 개별 포장되어 있는 비닐을 까서 음료수병에 꽂아 준다.

"병간호할 사람 있어야 할 거 같은데."

"없어요. 지욱이는 변호사라서 바쁘고, 직원들은 나 대신 열일 하느라 미안해서 안 되고."

"부모님은?"

"없어요. 저 고3 때 두 분 다 한날 한 시에 돌아가셨거든요."

"언제?"

"11년 전에요. 그 얘긴 여기까지만 말하고 싶어요. 더이상은.."

부모님 생각에 씁쓸한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숙인다.

-11년 전-

<2014년 5월 31일>

고등학교 3학년 수험생인 루나가 공부에 집중할 수 있도록 집을 비운 그녀의 부모님은 겸사겸사해서 오랜만에 두 사람이 오붓하게


강원도의 조용한 펜션에서 하루 정도 있다가 오기로 했다.

루나도 흔쾌히 조용하게 공부할 수 있겠다며 수험생 신경 쓰지 말고 놀다 오라고 했고, 부모님은 오전부터 분주히 준비하고는


강원도 양양군에 있는 한 가마골 펜션으로 향했다.

펜션은 집주인이 펜션을 운영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예약도 많이 받지 않으셔서 비수기 때는 비워두고 별장처럼 집주인만 왔다 갔다 하며


사용하고 있었는데, 전화로 예약 당시, 수험생 딸 얘기로 사정을 얘기해서 겨우 예약을 할 수 있었다.

조용하고 깔끔한 펜션에서 부모님이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동네 주민으로 보이는 60대 초반의 한 여자가 현관 앞에 병음료 세트를 두고 사라졌고,


인기척에 문을 열어본 루나의 아버지가 포스트잇에 적힌 메시지를 보고 펜션 안으로 가지고 들어왔다.

|작은 성의예요.|

부모님은 집주인이 두고 간 서비스라는 생각에 아버지는 토마토 주스, 엄마는 야채 주스를 꺼내 마셨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정신을 잃고 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병음료 세트를 두고 사라진 여자가 다시 돌아왔다.

여자는 집주인이 펜션에 있는 줄 알았는지 적지 않게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쓰러진 두 사람을 집주인이 발견한다면 자신의 범행이 발각되는 건 시간 문제라는 생각에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고 말았다.

여자는 다시 돌아올 때 준비해 온 휘발유를 펜션 곳곳에 뿌린 후, 라이터를 이용해 불을 붙이고는 재빨리 현장을 벗어나 자신의 집 뒤에 있는


비닐하우스로 도망쳤다.

여자의 방화로 인해 불길은 펜션 전체를 순식간에 집어삼켰고, 부모님은 그 자리에서 펜션과 함께 전소되어 사망했으며, 루나는 어린 나이에 부모님 모두를


하루아침에 잃고 혼자 장례를 치러야 했다.

방화범은 집주인과 가깝게 지내던 이웃이었고, 집주인에게 1000만원을 빌린 상태였으며, 평소에 자신에게 매일 폭력을 일삼는 자신의 남편과는 달리


집주인은 남편을 잘 만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살고 얼마 전부턴 자식들이 마련해준 주택을 개조해 펜션을 운영하면서 여유롭게 사는 집주인에게


자격지심, 열등감과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동네 주민들이 많이 모여 있던 마을 회관에서 돈을 갚으라고 하면서 모욕감을 준 것이 시발점이 되어


집주인이 죽으면 1000만원을 갚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면서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그 이후, 펜션 하나를 통째로 잃는 재산 피해와 정신적 피해를 당한 집주인은 자식들이 사는 서울로 이사를 해야 했고, 방화범의 범행으로 억울하게


고아가 되어 버린 루나는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일을 시작했으며, 편의점 알바, 마트 직원, 호텔 프론트 직원으로 일만 하면서 살아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기를 극복하려는 강인한 성격인 그녀는 악착같이 일해서 번 돈을 착실하게 차곡차곡 모아서 25살이라는 어리다고 하면 어린 나이에


연남동 골목에 작은 카페를 오픈하게 되었고, 처음 오픈 당시 대출을 끼고 월세로 들어온 매장을 잘 운영하면서 꾸준히 매출을 올려, 지금은 연남동 도로변으로


매장을 확장 이전 하여 건물도 매입하고 두 명의 직원을 두면서 코로나19 팬데믹도 견디며 여전히 운영 중이다.

11년 동안 혼자서 힘들게 살다 보니, 겉으론 내색하지 않아도 내면에는 방화 사건으로 부모님을 잃었던 상처와 왠지 모를 불안감이 그녀를 갉아 먹었고,


여태 감추려고 애쓰며 살아왔다.

-현재-

루나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흐를 것처럼 눈가에 그렁그렁 맺혔고, 급하게 닦아냈다.

"그러고 보니, 올해는 부모님 기일도 못 챙겼네. 매년 5월만 되면 엄마, 아버지 보러 갔었는데…"

"회복 잘해서, 퇴원한 후에, 재활까지 다 마치고, 멀쩡한 모습으로 다시 가면 되지."

"뭐야, 저승사자 맞아요? 무슨 저승사자가 위로를…"

"하지 말까?"

"아뇨. 감..감사하다구요…"

루나는 이후, 퇴원할 때까지 재활치료를 병행하게 될 예정이고, 그녀의 사망 예정일까지는 이제 3일밖에 안 남았지만,


자신의 죽음을 기다리기만 하지는 않을 거라고, 어떻게든 운명을 바꾸겠다고 마음먹었다.

=내일 운명은 오늘 만들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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