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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화

D-2

by 제나랑


<2024년 8월 12일>

AM 10:30

루나는 팔에 꽂힌 링거를 바라보다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병원의 정원에는 병원 직원들과 환자들이 어울려 있었다.

그 평화로운 풍경과는 달리, 그녀의 심장은 두근거렸다.

예지몽대로라면, 사망 예정일까지 고작 이틀밖에 남지 않은 셈이다.

“밖에 나가지 않고 그날까지 이렇게 버티면 되는 걸까…? 정말 그렇게 하면 막을 수 있는 걸까…?”

생각에 잠겨 있던 루나는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병실 문 앞에는 카페 마감조 직원이 서 있었다.

여느 때처럼 따뜻한 미소를 띤 얼굴이었다.

>>이름: 임도운

나이: 26세

직업: 카페 [청월] 마감조 직원 3년 차

“누나, 괜찮아요?”

도운은 그녀 옆에 앉아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루나는 반가운 마음에 애써 웃었다.

“괜찮아. 수술도 잘 됐고, 재활치료만 열심히 하면 금방 퇴원할 수 있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요? 3개월 동안 올 때마다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구요. 3개월 만에 깨어난 사람이 어떻게 괜찮아요…


가게는 주은 누나랑 알아서 잘하고 있을 테니까 빨리 나아서 컴백해요~”

"알았어. 고마워~ 당분간 수고 좀 해줘."

"걱정 마세요~ 짬바가 있는데~"

"그래~ 걱정은 안 하는데 너네 힘들까 봐 그러지~ 그리고 하나만 더 부탁하자. 인수인계 일지, 매출 관리표, 재고 관리표, 마감일지까지 매일 톡으로 보내 줄래?


나 퇴원할 때까지만…"

"당연하죠! 알겠어요~"

"아! 너 휴가 못 가서 어떡해? 그것도 퇴원할 때까지만 보류해 주라…나 퇴원 하는 대로 니가 원하는 달에 휴가 줄게~ 몇 달만 고생해줘…"

"아휴~ 신경 쓰지 마세요~ 휴가는 언제든 가도 되니까 빨리 낫기나 하세요~"

"무슨 일 있으면 혼자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일단 전화해~"

"네네~ 컴백하실 때까지 카페 잘 보고 있을게요~"

“고마워. 도운이 덕분에 든든하다~"

"누나, 강한 사람이잖아요. 언제나 그랬듯이, 이번에도 잘 이겨낼 거예요~! 지금은 아무 걱정하지 말고 빨리 나아서 퇴원하는 데에만 집중해요~”

그의 말에 작은 위안을 느낀 루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불안이 자리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도운이 사 온 초밥으로 점심을 함께했고, 도운은 출근 시간이 가까워지고 나서야 병원을 떠났다.

PM 02:40

잠시 후, 다시 병실 문이 열리고, 이번엔 카페 오픈조 직원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들어온다.

>>이름: 정주은

나이: 28세

직업: 카페 [청월] 오픈조 직원 1년 차

"언니, 괜찮아요? 3개월 동안 안 깨어나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요?"

"미안. 수술은 잘 끝났고 괜찮아, 이제~"

"병원 답답하죠? 정원 잘 해놨던데 산책이라도 가요. 휠체어 어딨어요?"

"괜찮아...! 산책은..아침에 갔다 왔어…"

그녀가 다급히 소리치는 소리에 놀라 당황한 주은

"아..네…"

주은은 퇴근하고 오는 길이라 저녁 시간 때까지 수다 떨다가 갔고, 저녁은 병원 밥으로 해결했다.

그날 밤, 루나는 다시 같은 예지몽을 꿨고, 이번엔 더 선명했다.

그녀가 병원복을 입은 채 횡단보도를 건너는 모습이었다.

사방이 적막한 도로 위에서, 신호등의 파란불이 깜빡이는 순간, 검은 승용차가 빠르게 그녀를 향해 달려왔다.

“피해야 해!”

꿈속에서 그녀는 소리쳤지만,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차는 멈추지 않았고, 마침내 그녀의 몸을 덮쳤다.

놀라 깨어난 루나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하아..ㅎ 흐흡..하아…”

창문 너머로 비치는 달빛은 병실 안을 차갑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때, 시안이 병실에 나타났다.

그는 여전히 검은 수트를 입고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한 번 꾸는 것도 괴로운데 예지몽을 또 꿨어요…심지어 더 선명하게요."

“차량 번호는..봤나?”

루나는 다시 눈을 감고 예지몽에서 보았던 장면을 떠올려 보는데, 안개 때문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던 검은 승용차의 번호판이 안개가 천천히 걷히면서


서서히 보이기 시작한다.

"28..로..3878…"

"혹시 아는 차량인가?"

그녀는 처음 듣는 번호에 고개를 젓는다.

"아뇨…"

"차종은? 차량 엠블럼이라도."

"모르겠어요. 안개 때문에 어두웠고 차도 어두운색이라…"

"어쨌든 그날까지 여기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마라. 그 사고만 피하면 막을 수 있다."

루나는 그의 말에 희미한 희망을 느끼며 그를 바라본다.

“만약..그날을 무사히 넘기고 제가 죽지 않으면…그다음은요? 명부…또 올까요?”

"그건 우리가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저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걸 하는 것뿐. 단, 너의 시간을 낭비하지 마라."

그의 말을 곱씹으며 혼란과 두려움을 애써 억누르는 루나.

그녀의 앞에는 두 가지 선택지가 놓여 있었다.

예견된 죽음을 받아들이거나, 그것을 바꾸기 위해 싸우는 거나…

"그리고…그날 이후에 말해줄까 했는데, 아까 그 여자 조심해라. 느낌이 안 좋다. 너무 많은 걸 맡기지는 마."

"우리 카페에서 일 한 지 1년은 넘었어요. 사고 칠 애였으면 이미 저지르고 날랐겠죠."

"20년 지기도 등 돌리고 사기 치고 죽이는 게 인간이다. 아, 부모도 죽이고 자식도 죽이는 인간도 있지."

"아…그렇긴..하죠…그 20년 지기도 그 인간이 자신에게 그럴 줄..몰랐겠죠…?"

"그 여자가 반드시 너에게 해를 가할 거라는 보장은 없지만, 엮이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네..조심해서 나쁜 건 없죠…"

병원에 머무는 동안 점점 더 자신에게 닥친 운명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그녀는 자신의 사망 예정일이 다가올수록 더욱 짙어지는 불안 속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어깨 치료와 재활치료를 하면서 몸 상태는 꾸준히 회복되고 있지만, 심리적인 압박은 더욱 커져갔다.

예지몽은 꿈속에서뿐만 아니라 현실 속에서도 계속해서 그녀를 괴롭혔고, 병실 안의 고요함은 그런 그녀를 점점 더 깊은 불안 속으로 몰아넣었다.

병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희미한 햇살은 루나의 얼굴을 간질였지만, 그녀는 미동도 없이 누워 있다.

사고 이후 병원에서의 시간은 그녀에게 또 다른 감옥 같았고, 매일 반복되는 치료와 검사, 그리고 재활치료를 거치며 겪게 되는 고통과 통증 속에서


그녀는 자신이 더 이상 예전의 자신이 아니라는 걸 점점 실감하고 있다.

지욱이 챙겨다 준 책 한 권을 꺼낸 루나는 병실에 홀로 남아 침대에 기대어 앉아 책을 펼친다.

간호사가 가져다준 약 봉투를 내려다보던 그녀는 문득 예지몽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횡단보도를 건너던 자신이 검은 승용차에 치이는 장면.

그 순간,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약 봉투가 바닥에 떨어진다.

"그날..막지 못하게 된다면… 나는 정말 이대로 죽는 건가? 그게 정말 나의 마지막이 되는 걸까?"

루나는 불안한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고개를 저었지만, 심장은 점점 빨리 뛰기 시작했다.

시안이 루나에게 한 말들은 그녀에게 희미한 희망을 주었지만, 동시에 더 큰 두려움을 안겼다.

PM 10:20

그녀는 다시 자리에 누웠지만, 밤새도록 잠들지 못했다.

그때, 병실 문이 아주 천천히 조심스럽게 열렸고, 퇴근하는 길에 들른 지욱이었다.

"퇴근하셨습니까, 설 변호사님~"

"아유~ 예. 또 뵙겠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 장난을 주고받으며 웃었고, 지욱은 루나 옆으로 간이 의자를 끌고 와 앉는다.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내일 오면서 사 올게~"

"음…ㅂㄹ 레인보우 샤베트랑 피치팡 망고팡~ㅋㅋ"

"응? 최애가 레인보우 샤베트였는데 하나 더 늘었어? ㅎㅎ"

"아니, 차애~ㅋㅋ"

"차애는 뭐야?"

"차선책 할 때 그 차. 최애 다음으로 애정하는 거~ㅋㅋ"

"아..ㅎ 어후~ 어렵다, 어려워~"

"고작 한 살 차인데 꼰대 같기는~ㅋ"

"그래도 이 꼰대가 고딩 때 너 많이 구해줬다?"

"어후~ 50이 넘어도 우려먹을 거야, 저거~ 12년째다, 12년~"

"우리 처음 만난 게 너 농구공 맞았을 때잖아~ 그때 내가 미안하다고~ 미안하다고, 바나나 우유 바치고~"

"뭘 또, 바쳐~ㅋ"

"그날 이후로 내 고생길이 활짝 열렸지~ 좀 손이 많이 가야지~"

"내가 일부러 그랬나~? 엄마, 아버지 없는 고아 은따라서 그런 걸…"

"은따? 누가 은따야? 니가? 다른 애들을 니가 은따 시킨 거지~"

"그 말도 맞는데~ 은따였던 것도 맞아~ 대놓고 따 시키고 괴롭히는 건 아닌데, 뭐랄까~

은근~히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누가 봐도 실수 같고 일부러 그런 게 아닌 거 같은데 당하는 사람만 아는,

그 오묘~한 느낌, 뭐 그런 거 있잖아~ 설명할 순 없는데, 나만 느끼는 거…

예를 들면 나 창고에 갇혔던 거 기억나? 그거 걔네, 일부러 그런 거야."

"아, 창고? 기억나. 그때도 내가 꺼내주지 않았나? 근데 걔 이름이 뭐였지? 되게 특이했는데~"

"조이나."

"맞다, 조이나. 걔야말로 은따 아니었나? 존재감이 없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러니까. 누가 봐도 누굴 괴롭힐만한 일진, 이런 애들이 한 짓이 아니라 존재감 1도 없던 은따가 순진하고,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 하는 얼굴로 내가 창고에 배구공 담겨 있는 트레이 가져다 놓으러 간 거 뻔히 알면서 애들 다 나간 틈 타서 밖에서 문 걸어 잠갔잖아.


걔가 체육관 담당이어서 체육쌤은 의심 없이 걔한테 열쇠 줬을 거고. 그다음 날 쌤한테 물어봤거든, 어제 체육관 문단속 누가 했냐고.


쌤이 그러더라고, 어제 조이나가 와서 문단속은 자기가 하고 갈 테니까 일찍 퇴근하시라고 했다고. 그래서 열쇠 꾸러미 줬대.


그러고는 나한테 와서 그러더라, '미안해, 아무도 없는 줄 알았어.' 그러면서 울어. 아니, 지가 왜 울어? 갇혀서 무서웠던 건 정작 난데?


허, 참나. 걔가 우니까 누가 봐도 실수 같은데 내가 사과 안 받아주고 째려보고 있으니까 애들은 되려 나한테 뭐라 하더라?


실수라는데, 미안하다는데 받아주지 그러냐. 아니, 피해자는 나라고. 실수라고 인정 해주는 것도, 사과를 받아주는 것도 피해자가 하는 거지,


왜 지들이 더 난리야?"

"무서웠어? 그래서 내가 너 찾아다니다가 빨리 발견하고 구해줬잖아~ 근데 왜 그땐 말 안 했어?


지금도 이렇게 생생하게 기억할 정도면 많이 억울했다는 거고, 상처받았다는 건데.."

"말한다고 뭐..선배가 난리나 치지. 오해가 풀렸겠어? 조이나가 나를 가둘 이유가 없는데 왜 그랬겠냐,

왜 가만히 있는 애 나쁜 애로 몰아가냐, 이랬겠지. 안 봐도 뻔하지..


그리고 내가 굳이 소명할 이유를 모르겠고 오해가 있든 말든, 내 알 바 아니라고 생각했어.


졸업하면 그만이고, 어쩌면 평생 한 번도 못 볼 수도 있는 애들한테 뭐 하러 감정 소모를 하나 싶어서.."

"그래. 가치도 없어~ 나한테만 잘하면 돼, 그러니까~"

"으이구~ㅋㅋ"

'선배는 나에게 희망이라는 그 자체였다.

만약, 희망이 형제가 있다면 선배를 닮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지루했던 고등학교 시절과 엄마, 아버지를 잃은 슬픔과 아픔은

선배와 함께할 때면 잠시라도 잊을 수 있었고, 방공호 같기도 했다.

가끔 엄마, 아버지 따라 삶을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있었지만,

선배 덕분에 그 시간들을 버틸 수 있었던 것 같다.'

두 사람은 자정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고등학교 시절 얘기를 나눴고, 지욱이 왔다 간 후엔 지욱과의 대화로 마음이 편해져서인지 어느새 스스로 잠이 들었다.

=희망은 삶을 포기하지 못하게 만드는 가장 큰 고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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