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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화

D-DAY

by 제나랑


<2024년 8월 14일>

AM 07:30

사망 예정일 아침.

루나는 병실 침대에 누운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해가 밝았지만, 그녀의 마음은 깊은 어둠 속에 갇혀 있었다.

차가운 아침 공기가 병실 창문을 통해 들어왔고, 창밖에는 여느 날과 다를 바 없는 서울의 한복판에 있는 병원의 평범한 일상이 시작되고 있었지만,


루나에겐 이 아침은 평범하지 않았다.

그녀의 사망 예정일, 바로 그날이 밝아왔기 때문이다.

그녀는 깊은숨을 내쉬었다.

밤새 꾼 예지몽과 그 속에서 일어난 변화가 분명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불안했다.

‘오늘 나에게 일어날 일을 막을 수 있을까?’

머릿속에서 되뇌며 손끝에 느껴지는 이불을 꽉 쥐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반복적으로 떠오르는 예지몽의 마지막 장면이 생생했다.

그 검은 승용차, 빛나는 헤드라이트, 그리고 바람을 가르며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던 루나 앞에 푸른 연기 속에서 시안이 나타났다.

그는 늘 그랬듯 매끄럽고 무뚝뚝한 태도로 루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오늘의 그의 눈빛에는 평소보다 더 깊은 어두움이 서려 있었다.

“그날이 밝았군.”

그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차가웠지만, 그 안에는 미묘한 흔들림이 느껴졌다.

“어쩌면 당신은 나에게 결국 무슨 일이 일어나도 결국엔 운명을 피하지 못한 거라고 생각하겠죠.”

그녀는 몸을 일으켜 침대 옆에 있는 버튼을 눌러 침대 헤드를 올린 후, 기대어 앉고는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런데도 난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꿈속에서 바꿨던 것처럼, 오늘도 바꿀 수 있을 거예요.”

시안은 그녀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 선택은 네 몫이다. 하지만 내 도움이 필요한 최후의 순간에 나를 소환해라.”

그는 그녀를 지키고 싶어 하는 듯했지만, 자신이 가진 한계를 이미 알고 있었다.

저승사자는 생과 사의 흐름에 직접적으로 개입할 수 없고, 그의 역할은 영혼을 인도하는 것이지, 운명을 바꾸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병실에서 조용히 시간을 보내던 루나는 예상보다 빠르게 긴박함을 느꼈다.

창밖은 이상할 정도로 어두운 구름이 몰려와 짙게 깔리고 있었고, 길거리의 자동차 경적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왔으면 그녀의 모든 시각, 청각, 촉각, 후각 등의


감각들이 예민해지는 것을 느꼈다.

시계를 보니, 시곗바늘은 오전 9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고, 예지몽에서 봤던 사고 시각까지는 이제 겨우 14분밖에 남지 않았다.

병실 문이 열리며 간호사가 들어왔다.

“루나님, 오늘 컨디션 어떠세요? 특별히 불편한 건 없으신가요?”

루나는 간호사의 친절한 물음에 짧게 미소를 지었다.

“네, 괜찮아요.”

"저랑 약속 하나만 해요. 하루 한 번 산책하기. 안 하시면 저랑 가는 걸로. 잠이 잘 안 오실 때 매일 꾸준히 아침 산책하면서 햇볕 쬐는 것도 도움이 되거든요."

"네, 알겠어요."

"아, 맞다! 형사님 방금 전에 연락하셨어요. 오후에 점심 먹고 방문하신대요~"

"아, 감사합니다."

"이제 정신건강의학과 병동으로 이동하실게요~"

"어? 건물이 따로 있나요?"

"네. 10층에 있는 구름다리로 가면 이어지기는 하는데 지금 보강 공사 중이어서 완공될 때까지만 저희 병동을 나가셔서


정원을 지나서 바로 왼쪽 병동으로 가시면 돼요~"

간호사는 병실 문 앞에 있던 휠체어를 침대 가까이 가져왔고, 루나는 간호사의 부축을 받아 휠체어에 앉았다.

그녀를 태운 휠체어를 끌어 병실을 나와 병원 복도 중앙에 있는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간호사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안엔 환자와 보호자들이 탑승한 상태였고, 휠체어 때문에 양쪽으로 비켜주었다.

1층 로비로 내려온 두 사람은 사람들과 함께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병동 출입구를 지나 밖으로 나간다.

응급실이 있는 정문 쪽 출입구가 아닌 후문 쪽 출입구 앞은 루나의 병실에서도 내려다보였던 정원이 있다.

정원 벤치 앞에 휠체어를 세운 간호사는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며 다시 병동 안으로 들어갔고, 그렇게 그녀는 정원에 혼자 남겨졌다.

주변을 둘러보니, 정원 곳곳에 다른 환자들과 병원 직원들이 있었지만, 그녀와 조금 떨어져 있었고, 정원은 외부인도 쉽게 드나들 수 있도록 인도와 도로가


이어지는 정원 입구의 경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 길 건너편에서 낯익은 검은 승용차가 보였다.

그녀는 마른 숨을 삼켰다.

바로 예지몽 속에서 그녀를 덮쳤던 차와 똑같았다.

서늘한 공포가 그녀의 몸을 얼어붙게 했다.

‘이 순간이구나, 나의 마지막 순간…’

그 순간, 고정되어 있던 휠체어 바퀴의 고정 장치가 풀리면서 바퀴가 인도와 도로 쪽으로 굴러가기 시작했다.

정원에서부터 인도와 도로까지는 약간의 경사로 되어 있어 멈추지 않으면 어딘가에 부딪히지 않는 한, 휠체어는 도로까지 굴러가고 말 것이다.

당황한 그녀는 바퀴 고정 장치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한 상황에서 아무리 더듬거려봐도 고정 장치 손잡이가 손에 닿지 않았고, 휠체어 발판에서 발을 내려


멈추려고 해도 설상가상으로 발판에 왼쪽 발이 껴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이대로 가다간 도로까지 멈추지 않을 거고, 도로 앞은 예지몽에서 나왔던 장소인데다, 저 검은 승용차…'

루나는 떨리는 두 손으로 휠체어 팔걸이를 꼭 쥐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지만, 그녀는 다치더라도 넘어지는 방법 말고는 휠체어를 멈출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고, 동시에 두 다리에 힘을 주고는 수술한 왼쪽 어깨가


아닌 오른쪽으로 몸을 바닥을 향해 틀었다.

그 바람에 그녀는 휠체어에서 떨어져 바닥에 그녀의 몸이 곤두박질치며 넘어지고 말았고, 그녀와 분리된 휠체어는 넘어진 상태로 경사로를 내려가다가


횡단보도 앞에서 멈춰 허공에 바퀴만 한참을 굴렀다.

그때, 넘어진 그녀를 발견한 간호사가 그녀에게 다가와 그녀를 부축했고,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병동 1층

로비에 있던 다른 빈 휠체어를 가져와 그녀를 앉혔다.

자신의 부주의를 연신 사과하는 간호사에게 괜찮다고 말하며 빨리 이동하자고 하는 루나

정신건강의학과가 있는 병동으로 이동해 상담을 마친 후, 다시 그녀의 병실로 무사히 돌아왔다.

그녀는 아직 회복되지 않은 상태인데다, 정원에서 넘어졌던 후유증에 의해 오른팔과 다리에 근육통이 있어 침대로 최대한 천천히 이동해 누웠고,


간호사는 그녀가 넘어지면서 바닥에 긁혀서 생긴 타박상을 치료했다.

치료를 마친 간호사가 병실을 나가고, 시계를 보자 시간은 어느새 오전 9시 5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고는 갑자기 그녀의 앞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지는데, 역시나 시안이었다.

그는 그녀를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돌아온 걸 환영한다. 다시 보니 반갑네."

"진짜 똑같은 검은색 차가 있었어요…"

그녀의 말에 그녀를 바라보는 시안의 눈은 여전히 차갑지만, 그 안에 어딘가 따뜻함이 담겨 있는 듯했다.

"시간..지났으니까…나 산 거 맞는 거죠? 막은 거 맞죠?"

그녀는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시안의 손에 들려 있던 명부는 연기처럼 사라졌다.

동시에 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는 가볍게 토닥였다.

숨을 몰아쉬며 심장에 손을 얹고는 심호흡하는 루나

“바뀌었어..내 운명이…”

시안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운명을 바꾸는 대가는 크다. 하지만 니가 원했으니, 지금은 그걸로 충분하다.”

루나는 그의 말에 의문을 품었지만, 더 이상 묻지 않았고,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그러다가도 문득 그의 마지막 말이 마음속 깊이 남아 머릿속에 맴돌았다.

'운명을 바꾸는 대가는 크다.'

그녀는 그 대가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앞으로의 날들은 그 답을 찾아가는 시간이 될 것임을 짐작했다.

PM 12:40

시안은 병실 밖 인기척을 느끼고 급하게 사라졌고, 병실 문이 또 한 번 열렸다.

이번에는 처음 보는 남자가 문 앞에 서 있었고, 루나는 바로 그녀의 사고를 담당했던 형사라고 직감했다.

그는 병실 안으로 들어와 그녀 옆에 간이 의자를 가져와 앉았다.

“루나 씨, 좀 어떠세요? 깨어나셨다는 얘기 듣고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많이 괜찮아졌어요. 제 사고 담당하셨던 형사님이시죠?”

규호는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그녀에게 내민다.

[연남경찰서 수사과 수사관 이규호]

"아, 저를 모르시겠구나. 이규호입니다. 저에게 묻고 싶은 게 있으시다고…"

"네. 다름이 아니라, 3개월 전의 그 사고에 대해 자세하게 듣고 싶어서요."

“아…일단, 가해자는 대형 덤프트럭 운전기사 60대 남성이구요. 음주 상태로 운전하다 루나 씨의 차량과 충돌하기 전에도 3대의 차량과 충돌하고도


계속 질주하다가 루나 씨의 차량을 덮치고 나서야 멈추면서 루나 씨를 제외하고 3명이 사망한 큰 사고였어요. 가해자는 음주 운전은 시인하고 있지만,


브레이크가 고장 난 상태였다고 주장하고 있어요. 사건은 검찰로 송치됐고, 아직 재판은 날짜만 받아 놓은 상태지만, 실형 나올 가능성이 크죠.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회복에만 집중하세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연다.

“형사님, 사실은 오전에 그 사람을 본 거 같아요…”

규호는 그녀의 말을 듣고, 급히 핸드폰을 꺼내 사진 몇 장을 그녀에게 보여준다.

“이 남자 맞나요? 어쩌다가 보신 거예요? 병실을 찾아왔어요?"

루나는 규호가 내민 사진을 보고 심장이 내려앉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사진 속 남자는 그녀가 예지몽에서 본 검은 승용차의 운전자와 같은 얼굴이었다.

“맞아요, 이 사람…검은 승용차를 타고 병원 앞에 있었어요.”

다급한 목소리로 묻는 규호

“그가 덮치려고 한 거예요?”

잠시 그를 바라보았고, 예지몽에 대한 이야기를 할지, 말지 망설였지만, 믿어주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 다시 병실로 돌아와서 의도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그 사람이었어요!"

빠르게 핸드폰 메모장을 켠 규호

"차종이 뭐였어요? 혹시 차량 번호는 보셨나요?"

"제가 차종을 잘 몰라서…검은색 승용차였고 차량 번호는…28로..에…음…37..87…인 거 같아요…"

핸드폰 메모장에 차량에 대한 정보를 받아 적은 규호는 걱정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는 루나를 위로한다.

"너무 걱정 마세요. 제가 서에 들어가자마자 차량 조회하고 가해자 위치 파악도 하고 병원 주변 순찰도 강화 할게요!


뉴스에도 보도된 사건이라 저희도 손 놓고 있지만은 않을 거니까요~"

"근데..현장에서는 왜 바로 잡을 수 없었죠?"

그녀의 허를 찌르는 질문에 잠시 말문이 막힌 그는 재빨리 답변을 생각해냈다.

"아…그건 그 가해자가 루나 씨 차량과 충돌 이후에 트럭을 버리고 도주했어요. 주변 시민들의 신고를 받고 저희가 출동했을 때는 이미 트럭 안엔 사람이 없었고,


신고자도, 목격자들도 도망치는 뒷모습만 봤다고 진술해서요…"

"…어쨌든 그 사람이 병원 앞에 왔다는 건 분명히 의도가 있다는 거고, 이번엔 실패했지만, 다음엔 지인이라고 둘러대고 제 병실까지 올 수도 있는 거니까…


부탁 좀 드릴게요…전 퇴원하려면 아직 멀었다구요…"

"네, 네. 그럼요! 그럼, 빨리 조치 취해드리려면 서에 들어가 봐야 해서요…"

"네. 그래도 제 상태 확인도 해주셨다고 하고..이렇게 와주셔서 감사해요…퇴원하면 한 번 찾아뵐게요…"

규호와의 대화가 끝나고 병실에 다시 혼자 남겨진 루나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병원이라고 안전할 것 같지만은 않으면서도, 다음 예지몽에선 병원 안에서 벌어지지 않으리란 법은 없으니까.

다음 명부가 언제 올지 모르지만, 미리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만약, 단순히 죽음을 피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면?


스스로에게 던지는 물음표가 그녀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 여전히 쉽게 잠이 들지는 못했다.

=타석에 들어서지 않고는 홈런을 칠 수 없고, 낚싯줄을 물에 드리우지 않고는 고기를 잡을 수 없으며, 시도하지 않고는 목표에 도달할 수 없다.=

-캐시 셀리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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