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명부
<2024년 8월 29일>
루나는 그날 이후, 2주가 넘도록 불면증에 시달렸고, 처방받은 약도 효과가 없었다.
역시나 새벽 4시가 넘어서야 간신히 잠이 든 루나
[루나의 꿈속]
의식이 가라앉는 순간, 그녀는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장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점점 시야가 어두워지면서 눈을 감은 건지, 눈을 떴지만 눈앞이 칠흑 같은 어둠이 깔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건지, 전혀 가늠되지 않았고,
잠시 후, 눈을 떠진 건지, 어둠이 걷힌 건지, 시야가 밝아졌다.
그녀의 눈 앞에 펼쳐진 장소는 정류장이었다.
차가운 새벽 공기 속에서도 정류장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의자에는 이미 사람들이 앉아 있었고, 자리가 부족해 몇몇은 서 있었다.
그녀는 운 좋게도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으며, 그녀의 옆에는 남자가 앉아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핸드폰을 보지 않고 빽빽한 글자가 적힌
두꺼운 책을 읽고 있었고, 그녀는 문득 그 책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남자는 나직이 숨을 내쉬며 책장을 넘겼다.
얇지도 두껍지도 않은 손가락이 책 위를 미끄러지듯 움직였고, 그 움직임은 기계처럼 정확했다.
남자의 얼굴을 힐끔 보았지만, 마치 그림 위에 붓으로 뭉개놓은 듯이 이목구비를 알아볼 수는 없었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버스 한 대가 정류장에 도착했고, 그 버스는 평범한 시내버스와는 달랐다.
지하철 한 칸만큼 자체가 길었고, 문은 운전석 옆에 앞문과 뒷문이 있는 다른 버스와는 달리, 뒷문뿐이었다.
사람들이 서둘러 뒷문으로 줄을 지어 오르기 시작했고, 그녀도 남자를 힐끗 본 뒤 버스에 올라탔다.
요금을 내기 위해 카드 인식 단말기에 카드를 찍으려는데, 단말기 화면엔 뜻밖에도 그녀의 이름이 떠올랐고, 단말기 아래쪽에서 오히려 돈이 튀어나왔다.
“뭐지?”
그녀는 당황하며 돈을 집으려 했지만, 갑자기 누군가 뒤에서 강하게 그녀를 밀었고, 그녀가 돌아보기도 전에 그 남자가 자신을 욱여넣듯 팔을 붙잡고
끌고 가기 시작했다.
“뭐 하는 거예요? 놔요!”
거세게 저항했지만, 그의 힘은 너무 강했으며, 그는 마치 무쇠 같은 손아귀로 그녀를 붙들고 있었고, 그의 걸음은 빠르고 흔들림이 없어 그녀는 버스 앞쪽까지
거의 질질 끌려갔다.
앞쪽 좌석은 대부분 비어 있었고, 그는 창가 쪽 좌석으로 그녀를 데리고 갔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창문을 열었고, 버스 안으로 찬 공기가 거칠게 들어왔다.
순간적으로 소름이 돋은 그녀는 도망치려 했지만, 남자는 그녀를 강하게 끌어안았고, 그의 팔은 마치 강철로 된 족쇄를 연상시켰고, 숨이 막힐 정도로 단단했다.
“놓으라고! 뭐 하는 거냐고!”
그녀는 필사적으로 몸부림쳤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공허하게 울렸고, 버스 안에 있던 사람들은 아무도 반응하지 않았다.
모두가 이어폰을 끼고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남자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안은 채 창문틀에 앉았고, 그 순간, 그녀는 공포에 질렸다.
그의 몸은 점점 뒤로 기울었고, 그녀 역시 중심을 잃고 뒤로 넘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도로는 끝없이 멀어 보였고, 추락하면 분명히 치명적일 것 같았다.
“멈춰! 제발…!”
공포에 질린 그녀의 비명에도 남자는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던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깊었으며, 귀에 대고 콕콕 박히듯 명확히 들렸다.
“돈은 살아서 받아.”
그 짧은 말은 루나의 머릿속에 맴돌며 그녀를 혼란에 빠뜨렸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남자는 그녀를 안은 상태로 몸을 더 젖혔다.
두 사람은 그대로 창문 밖으로 떨어졌고, 곧 바닥으로 곤두박질쳤으며, 추락할 때의 공포가 온몸으로 느껴지는 순간,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눈을 번쩍 떴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루나는 숨을 거칠게 내쉬며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꿈에선 깨어났지만, 그의 목소리와 그가 한 말이 귀에 생생히 남아 있었다.
'돈은 살아서 받아. 그게 무슨 의미일까?'
루나는 그 꿈의 의미를 시안에게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어느새 나타나 그녀를 보고 있던 시안은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먼저 말을 가로채며 말했다.
“너 남자 만났지?”
루나는 깜짝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안은 계속해서 말했다.
“그 남자가 널 도와줬을 거고, 아니, 널 살려준 거지. 책을 읽고 있었고. 그 책, 글자가 빽빽했나?”
루나는 그 말에 얼어붙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남자는 분명 지혜롭고 똑똑한 사람일 거다. 만약 명부를 보고 있던 거라면 간단하고 명료했을 테니까.
목숨을 바쳐 구해주는 사람이라면, 가족이거나 배우자일 가능성이 높다.”
그 말에 루나는 갑자기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설마 꿈속의 남자가 지욱 선배가 아닐까…?'
지욱은 변호사이며, 항상 두껍고 글자가 빽빽한 법전을 읽는 게 일일 테고, 법정에서 의뢰인을 대변하는 것이 그의 직업이기에 당연하게도 가장 먼저
그가 떠올랐다.
그 와중에도 그녀가 더욱 신경 쓰였던 부분은 그 남자가 한 말이 어떤 의미인지였다.
'돈은 살아서 받아라.'
그 말이 계속해서 그녀의 귓가에 메아리쳤다.
"더 중요한 게 있다."
시안의 말에 내쉰 그녀의 한숨 소리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혹시…또 명부가 왔나요?"
시안은 더 깊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갑진년 계유월 신묘일. 2024년 9월 24일. 사인, 과다출혈."
"아니, 분명 저는 살아남았잖아요. 운명을 바꿨다고 생각했는데! 진짜로 또 명부가…"
"첫 번째 명부가 사라지고 니가 살아남은 건 너의 운명에 변화가 온 것일 뿐이다. 누군가가 니 명부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증거일 수도 있지.
계속 너의 명부에 올라오는 건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시안의 표정은 흔들림 없이 차가웠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이전과 다른 무거운 기운이 담겨 있었다.
루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시안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이죠? 명부에 영향을 미친다고요? 그런 게 가능해요?"
시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드문 일이지만, 인간의 의지라면 가능은 하지. 즉, 누군가에게 그 의지가 생겼다는 뜻이기도 하다.
죽음의 명부는 인간의 운명과 생명을 기록한 절대적인 규칙인데, 그 규칙을 깨뜨리는 건 저승의 법칙을 어기는 거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너의 명부가 반복적으로 바뀌고 있고, 그것이 그 인간의 의지에 달려 있다."
시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루나는 갑작스러운 현기증을 느끼며 눈앞이 흐릿해졌다.
그리고 곧바로 예지몽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루나의 예지몽 속]
이번에는 병원 복도였다.
그녀는 자신의 병실에서 나와 복도를 걷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복도는 비어 있었고, 조용한 공기가 그녀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빠른 발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본 순간, 첫 번째 예지몽에서 검은 승용차로 그녀를 덮쳤던, 바로 그 60대 남성이었다.
그는 병원 복도 끝에서 그녀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의 오른손에는 날카로운 식칼이 들려 있었고, 그의 눈빛은 광기로 가득 차 있었다.
본능적으로 도망치기 시작한 그녀는 복도를 따라 전속력으로 달렸지만, 아무리 달려도 복도가 길어지기만 할 뿐, 도망칠 수 있는 어떠한 문도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모퉁이를 돌며 숨었지만, 그는 그녀를 금방 찾아냈다.
그리고 칼을 치켜들며 그녀에게 다가왔고, 그는 식칼을 두 손으로 말아 쥐고는 체중을 실어 그녀의 심장에 꽂았고, 그 칼이 그녀의 심장까지 관통해
파고 들어가는 느낌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루나는 비명을 지르며 꿈에서 깨어났다.
병실 안은 여전히 고요했지만, 가쁜 숨을 몰아쉬는 그녀의 숨소리로 가득했다.
땀으로 젖은 이불을 걷어차며 그녀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병원 안이라니… 이건 말도 안 돼."
그녀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중얼거렸다.
시안은 그녀를 지켜보며 조용히 말했다.
"아무래도 그..인간의 의지라는 게…그 남자인 것 같다."
루나는 충격으로 떨며 물었다.
"그럼 그 새끼의 의지를 꺾지 않으면 날 계속 죽이려 할 거라는 건가요?"
시안은 잠시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그 남자를 설득하지 못한다면 잡힐 때까지 안심할 수 없을 거다. 하지만 잡히더라도 그 의지가 여전히 꺾이지 않는다면 출소 이후에도 널 노릴 수도 있고,
너의 죽음을 피할 수 있겠지만 너의 고통은 계속될 거다."
시안의 말에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자신의 운명이 가해자의 의지에 달려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원망스러웠고, 잔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그 의지를 반드시 꺾어야겠네요. 제가 뭘 어떻게 하면 되죠?"
시안은 그녀의 결심에 눈을 좁혔다.
"그 또한 너의 의지에 따라 다르겠지."
루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대가가 무엇이든 상관없어요. 그 새끼의 의지를 꺾을 수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어요!"
시안은 잠시 망설였지만, 그녀의 눈에서 강렬한 결의를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
깊은 고민에 빠져 병실 창가 앞에 서서 창밖으로 회색빛 새벽을 바라보고 있다.
그의 머릿속은 어둠으로 가득 찼다.
저승사자로서 그는 수많은 죽음을 지켜보았고, 인간의 생과 사가 정해진 명부를 따르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그러나 루나의 상황은 전혀 달랐다.
그녀의 명부는 계속 바뀌고 있고, 그것도 한 인간의 악의적인 의지 때문이라는 사실이 용납할 수 없었다.
그녀의 사고 가해자는 단순히 4중 추돌 사고를 낸 가해자뿐만이 아니었다.
가해자는 자신의 잘못을 사죄하기는커녕, 어리석은 착각에 빠져 그녀를 죽이겠다는 강렬한 집착을 품고 있고, 가해자의 의지가 단순한 악의를 넘어선
저주와도 같음을 느꼈다.
'이대로 두면 안 되겠는데.'
시안은 가해자가 체포 될 때까지 그녀의 고통은 계속될 것이고, 체포되어도 그의 의지가 꺾이지 않는 한, 출소 후에도 마찬가지로 그녀를 끊임없이
고통 속에 밀어 넣을 것이며, 그녀를 자신의 손으로 죽일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저승사자는 인간의 생과 사에는 직접적으로 개입할 수 없다는 것이 저승의 법 중 하나이며, 지금까지 시안은 그 법을 단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지만,
루나의 고통을 끝낼 수만 있다면, 저승법까지도 어길 각오를 하기로 결정했고, 그 결정을 다짐하자마자 망설임 없이 푸른 연기 속으로 사라졌다.
시안은 한 허름한 폐가 앞에 나타났고, 가해자가 숨어있는 한 반지하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먼지 냄새와 곰팡이 냄새가 섞여 그의 코를 찌르는데, 불안한 듯 방 안을 서성이고 있는 가해자가 보였다.
아직 가해자는 저승사자의 기운을 느끼지 못한 상태였지만, 시안은 가해자 눈앞에 천천히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가해자는 자신의 눈앞에 갑작스레 나타난 검은 형상의 남자를 본 그는 당황하며 뒤로 물러섰다.
"다..당신, 누구야?"
가해자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그 안에 서늘한 광기가 숨어 있었다.
"너의 마지막을 인도하러 왔다."
시안은 오금이 저릴 정도로 냉철한 목소리로 말했다.
"니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었는지 알고 있다. 그리고 이제, 너의 악의는 여기서 멈출 것이다."
가해자는 머리를 흔들며 뒷걸음질 쳤다.
"개소리하지 마! 당신이 뭘 알아!"
그의 목소리는 점점 더 격앙되었지만, 시안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고,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천천히 손을 들자, 그의 손끝에서 미묘한 어둠의 기운이
뿜어져 나와 가해자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가해자의 몸은 그 자리에서 굳어졌고, 그의 눈동자는 흔들리며 깊은 혼돈 속으로 빠져들었다.
"사자의 눈을 보아라."
시안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간담이 서늘해질 듯이 차가웠다.
=施勞於人 而欲望祐 殃咎歸身 自遭廣怨. (시노어인 이욕망우 앙구귀신 자구광원.)
남에게 고통을 줌으로써 자신의 행복을 구하는 자는 원한의 사슬에 얽매어서 원한에서 벗어날 수 없다.=
-부처님 말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