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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화

D-1

by 제나랑


<2024년 8월 13일>

다음날이 밝았음에도 오지 않기를 바라는 그날이 점점 가까워져 가기에 두려움만 증폭되어 차라리 아침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들 뿐이었다.

루나는 병실 창가에 앉아 정원의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는데, 간호사가 들어와 그녀에게 검사 시간을 알린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복도로 나선 그녀는 간호사의 안내를 받아 검사실로 향한다.

검사를 마치고 병실로 돌아오는 길.

그녀는 갑작스러운 현기증을 느끼며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고, 근처에 있던 의료진들에 의해 병실로 옮겨졌다.

그 사이, 또다시 예지몽이 반복되었으며, 그녀 앞에 펼쳐진 광경은 더욱 생생했고 또렷했다.

이번에도 같은 장소의 한적한 도로 앞 횡단보도에 서 있었다.

짙은 안개가 길을 덮고 있었고, 주변은 너무도 고요했다.

익숙한 풍경 속에서 숨이 멎을 정도로 선명한 감각을 느꼈고, 횡단보도 앞 인도 위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 파란불이 켜진 신호등, 안개가 자욱한 도로,


차가운 아스팔트의 질감, 아스팔트 위로 반짝이는 물기, 그녀의 뺨을 할퀴던 차가운 바람, 그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 그리고 그녀에게 돌진하는


검은 승용차의 날카로운 엔진소리까지 꿈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모든 것이 사실적이었으며, 그녀의 모든 감각을 뒤흔들었다.

어김없이 검은 승용차가 빠르게 다가오는 소리가 귀를 찢을 듯이 날카롭게 들려왔고, 그녀의 심장은 마구 뛰었지만 그저 넋을 놓고 서 있던 이전과는 달랐으며,


말뿐이 아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이번에는 달라야 해, 작은 거 하나까지도..”

주변을 재빨리 둘러보았다.

머릿속에서 반복적으로 떠오르는 질문.

‘왜 항상 같은 방식으로 죽어야만 하는 걸까?’

예지몽 속에서 몇 번이고 죽음을 맞이했지만, 이번만큼은 다를 수 있다는 왠지 모를 강한 확신이 들었다.

차가 그녀를 덮치기 직전, 시안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진짜 이대로 죽고 싶은 거냐?! 예지몽이 바뀌면 너의 운명도 바뀔지 몰라.”

그리고는 그녀를 덮쳐오는 검은 승용차의 헤드라이트가 보였다.

몸이 얼어붙어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지난 꿈이 떠올랐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그녀는 신발이 닳도록 땅을 차며 옆으로 몸을 날렸다.

그 순간, 차량은 아슬아슬하게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피했다…?”

그러나 긴장이 풀릴 새도 없이 차량은 빠르게 U턴을 하더니 다시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마치 사냥감이 된 듯한 느낌을 받았지만, 본능적으로 도망쳤다.

횡단보도를 벗어나 주변에 있는 어떤 것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눈앞에 작은 골목이 보였고, 그쪽으로 뛰어들었지만, 아직 안심하기에는 일렀다.

차량은 골목 입구까지 쫓아오며 그녀를 몰아넣으려 했기 때문이다.

검은 승용차가 횡단보도로 달려든 건 사고라고 생각했지만, 그녀를 추격하는 상황이, 어쩌면 단순 사고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그녀를 코너로 몰았고,


그녀는 당황스러움에 소리를 질렀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물론 공허하게 사라졌다.

하지만 이번엔 당하고만 있을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방향을 틀어 골목 사이로 계속해서 달렸지만, 차 역시 그녀를 따라 움직였다.

마치 그녀를 목표로 삼은 사냥감처럼.

그녀는 가로수 뒤에 숨고 골목으로 몸을 날렸지만 차는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왜 이렇게 되는 거지? 어떻게 해야 이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절망감이 그녀를 잠식했지만, 곧 깨달았다.

단순히 도망치는 것만으로는 이 꿈을 끝낼 수 없다는 것을.

골목 끝에 다다른 그녀는 벽을 등지고 숨을 고르며 생각했다.

‘계속 도망치는 건 답이 아니야. 내가 뭔가를 해야 해.’

“바꿀 수 있어. 이번엔 내가 바꿀 거야.”

마음속에 자리 잡은 확신이 그녀를 움직이게 했다.

다가오는 검은 승용차의 헤드라이트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그녀는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멈춰, 루나!”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시안이 서 있었고, 처음 보는 그의 표정엔 걱정과 놀라움이 가득했다.

"분명 이거 사고 아니라구요. 이 새끼가 누군지는 몰라도 날 죽이려 한다구요! 가만히 당하고만 있어요? 뭐라도 해야죠! 이래도 죽고 싶냐면서요?!


예지몽이 바뀌면 내 운명도 바뀔 수 있다면서요!"

차량은 굉음을 내며 속도를 높였고, 그녀는 도로 위에 떨어진 금속 파이프를 발견했다.

망설임 없이 그것을 집어 들고 차량의 보닛 위로 뛰어 올라간다.

동시에 파이프로 앞 유리를 향해 온몸에 힘을 실어 내리쳤다.

(쾅!)

차량은 운전자가 급브레이크를 밟는 바람에 급제동했고, 그로 인해 차체가 흔들리면서 멈추어 섰다.

차량 앞 유리는 충격에 의해 산산조각이 났으며, 차량 밖으로 튕겨져 나온 운전자의 핸드폰이 보였다.

그 핸드폰 화면엔 오전 9시 44분을 나타내는 시계가 떠 있었다.

차량이 멈추자, 그녀는 차량 아래로 내려갔고, 자신이 방금 전에 뭘 한 건지, 예지몽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는지, 놀란 것도 잠시, 운전자의 반응을 기다렸지만


차량에선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잠시 후,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비틀거리며 내렸다.

그는 고개를 들어 루나를 바라보았고, 그녀는 운전자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

그녀는 운전자가 어딘가 낯이 익었지만, 누군지 금방 생각이 나지 않아 답답했다.

그는 3개월 전, 음주 운전으로 인한 4중 추돌 사고로 3명의 사상자를 내고, 그녀를 사지로 몰아넣은 가해자이자 대형 덤프트럭 운전자였다.

사고 당시, 순식간에 일어난 사고의 충격으로 그녀는 정신을 잃었었고, 수술이 끝난 이후에도 3개월간 깨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가해자에 대한 기억은 없는 데다,


뉴스에 보도되었던 모자이크 된 모습이 전부였기에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가해자는 그녀의 뒤에 서 있는 저승사자를 발견하고는 마치 그의 존재가 뭔지 아는 듯이 더이상은 다가오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고,


곧이어 그녀를 향해 소리치기 시작했다.

"니가 그 자리에 없었으면 됐잖아! 왜 살아서…니가 왜 살아서! 니 년만 없었으면, 다 뒤졌으면 없었던 일이 될 수 있었는데…니 년 때문에…


그냥 그 자리에서 같이 뒤졌어야지! 니 년이 일을 다 망쳤어! 니 년 때문에 내 인생 ㅈ됐다고! 너 같은 건 없어져야 돼!"

그때, 꿈에서 깨어난 루나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손을 떨었다.

“하아..또야….”

사망 예정일이 다가올수록 밤마다 찾아오는 예지몽에 사로잡혀 처음엔 흐릿했던 사고 장면이 점점 선명해지며 그녀를 옥죄었고,


그녀는 머리를 감싸 쥐고 중얼거렸다.

“내가 움직였어…예지몽이 달라졌어…그리고…그 새끼…”

몇 번이나 반복된 꿈이었으나 이번에는 달랐다.

꿈속에서 루나는 자신이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단순히 끌려다니던 이전과는 달리, 그녀는 스스로 상황을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느꼈고,


예지몽 속에서 자신이 죽음을 피할 수 있다는 작은 가능성은 그녀의 가슴 속에 희망의 불씨를 피웠다.

병실 침대에 누워 창문 밖을 바라봤고, 창 너머로 보이는 하늘은 소나기가 내린 후로 잔뜩 흐려 있어 안개가 자욱했으며, 꿈속에서의 풍경과 너무나도 흡사한


하늘은 방금 전, 꾸었던 꿈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사망 예정일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는 사실이 더욱 그녀를 옥죄었다.

병실 안은 고요했지만, 그녀의 가슴 속엔 희망과 결심이 가득했다.

꿈에서 자신의 의지로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한 그녀는 자신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그때, 간호사가 루나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온다.

"루나님, 좀 괜찮으세요? 갑자기 복도에서 쓰러지셔서, 다행히 즉시 발견돼서 여기서 한 3시간 정도? 주무셨어요.


요새 통~ 잠을 못 주무시던데 그래서 그런 거일 수 있어요. 마침 내일 정신건강의학과 상담 있으시니까 교수님께 꼭 말씀 하세요~?"

"네~ 아, 혹시요. 저 찾아온 경찰분 계셨나요?"

"아, 네. 정확히는 형사분이요. 처음 여기로 실려 오셔서 수술하실 때랑 3개월 동안 의식 없으실 때 몇 번 오셨고, 지금은 의식 찾았는지, 상태가 어떤지,


전화하셔서 물어보곤 하세요."

"혹시..또 전화 오시면 여기 한 번 와주실 수 있는지, 아니면 통화라도 할 수 있는지 여쭤봐 주시겠어요? 묻고 싶은 게 있어서요…"

"네. 그럴게요~ 연락 오면 알려 드릴게요~ 좀 안정되신 거 같네요. 뭐, 또 필요한 거 있으시면 부르세요~"

"네. 감사합니다."

간호사가 나가고, 병실 안은 또다시 적막이 흐른다.

루나가 예지몽에서 깨면 어김없이 나타나던 시안은 한참을 나타나지 않다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모습을 드러냈고, 침대 옆에 서서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그의 표정은 복잡했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그녀는 스스로 길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왜 이제 와요?! 할 말이 너무 많아서 참기 힘들었다구요! 예지몽이 변했어요. 그리고..범인을 봤어요..근데..좀…낯이 익은 얼굴이었는데 기억이 안 나요…”

“니가 예지몽을 바꿨다는 거에 집중해라. 범인은 나중에 생각해도 늦지 않아.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알아요."

루나는 운명을 향한 싸움을 절대 멈추지 않을 것이라 다짐하며 창밖 어두운 하늘을 응시했다.

이제 그녀는 더 이상 예지몽 속의 희생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것 같으면서도, 여전히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시안의 말에 루나는 차가운 공기를 느끼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내일이네요…내가 현실에서도 꿈에서처럼 막을 수 있을까요?”

시안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근데요…꿈에서처럼 막았다고 치더라도 그 새끼가 병원까지 쳐들어오면 어떡해요?"

"예지몽에 나오지 않은 장면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번엔 제가 죽기 전 장면에서 끝나버렸어요. 그다음 장면이 뭐였을까요?"

"그게 뭐였든, 니가 죽는 장면은 아니라는 거다. 니가 내일 살아서 니 명부가 사라진다면 선물을 하나 하지."

"사자가 인간에게 선물도 해요? 어떤 선물인데요?"

"그 어떤 인간도, 그 누구도 너에게 해줄 수 없고 나만이 줄 수 있는 거."

"그게 뭔데요?"

"곧 알게 될 거다."

"치사해. 근데요…예지몽에선 살아도 현실에선 죽으면요? 그게 예지몽이 아니었다면요?"

“그건 니 선택에 달려 있다. 하지만 운명이 반드시 정해진 건 아니지. 언제든 바뀔 수 있다.”

루나는 그의 말을 곱씹으며 결심했다.

자신의 마지막을 기다리지 않고, 앞으로 닥쳐올 운명과 예지몽의 상황을 바꾸기 위해 무언가 행동하기로.

=운명에 겁내는 자는 운명에 먹히고, 운명에 맞서는 사람은 운명이 길을 비킨다.

대담하게 나의 운명에 맞서라! 그러면 물새 등에 물이 흘러 버리듯 인생의 물결은 가볍게 뒤로 사라진다.=

-비스마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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