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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화

첫 번째 명부

by 제나랑

AM 09:44

다행히 주변 시민들의 발 빠른 신고 덕분에 의식을 잃은 루나를 이송하는 구급차가 골든 타임을 놓치지 않고 근처에 있는 [서울 조은희망 병원] 응급실에


도착할 수 있었고, 사고로 인해 그녀는 어깨와 팔을 잇는 상완골 간부 부위 골절상을 포함해, 얼굴과 팔 전체에 차량의 유리 파편이 박히는 상처를 입었으며,


바로 수술실로 옮겨졌다.

AM 11:00

그녀의 상완골 간부 골절 수술이 시작되고, 수술은 2시간 정도 소요됐지만, 성공적으로 마쳤으며, 회복실로 옮겨진 루나는 마취에서 깰 시간이 훨씬 지나고도


의식을 찾지 못해, 중환자실로 옮겨져 집중 치료를 받게 되었다.

그 후로도 그녀는 3개월 동안이나 의식을 찾지 못해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그녀의 육체와 분리된 영혼을 인도하기 위해 그녀의 영혼을 다시 데리러


이승으로 내려온 저승사자

그는 오랜 세월 동안, 저승과 이승의 경계를 지켜온 저승사자이며, 고독하면서도 숭고한 사명으로 망자를 저승으로 인도하는 일을 수행해 왔고,


차가운 얼굴에 감춰진 그의 눈빛은 날카로웠지만, 때때로 망자들의 한이 서린 사연들에 희미하게 동요하곤 했는데, 마치 정밀한 톱니바퀴처럼


정확하고 냉정하게 자신의 임무를 수행했지만, 내면 깊은 곳에는 인간 세상에 대한 연민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 감정은 스스로도 부정할 수 없었으며, 오랜 세월 동안 쌓아온 벽을 허물고 스며든 미세한 균열과도 같았다.

루나와의 첫 만남은 그 균열을 더욱 깊고 선명하게 만드는 운명적인 순간이었다.

그를 마주한 그녀의 영혼은 당황스럽고 두려운 상황에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

저승사자의 손과 루나의 두 손이 닿는 그 순간, 또다시 의식을 잃고 쓰러진 루나의 영혼


그녀가 눈을 뜨자, 갑자기 세상이 뒤집히는 듯한 충격과 함께 모든 감각이 깨어났고, 그녀의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믿을 수 없어서 천천히 일어나,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녀의 주변은 희미하게 빛나는 안개로 둘러싸여 있었지만,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칠흑 같은 어둠이 깔려있어, 두려움과 혼란이 교차했으며,


자신의 앞에 무엇이 있을지 모르는 공간을 정처 없이 걸으며 떠돌았다.

그러다, 어디선가 미세한 존재의 느낌이 다가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마치 시커먼 밤하늘에 밝은 별이 박혀 있듯이 밝은 빛이 멀리 보이기 시작했으며,


그 빛을 따라 걸었다.

그 빛의 정체는 흐릿한 형제의 '영혼'이 모여 빛을 내고 있었다.

그때, 저승사자가 그녀 앞에 다시 나타나 그녀를 앞서 걸었고, 그녀는 저승사자의 뒤를 따라갔다.

저승사자는 그녀에게 이곳이 그녀의 무의식 속 죽음의 문턱이라는 걸 알려주었으며, 어디론가로 인도했다.

그녀는 주변의 영혼들이 자신과 연결된 모습을 보며, 그들의 감정이 전해오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몸을 통과한 영혼들이 점점 또렷해지며 보이는 것도, 그들의 감정이 느껴지는 것도 모두 낯설었다.

슬픔, 그리움, 희망이 뒤섞인 감정의 흐름 속에서 자신이 육체와 분리된 존재임을 실감하며 외로움이 밀려왔다.

그리고는 과거의 기억들이 하나둘씩 떠오르며, 소중한 사람들과의 추억들이 그리워졌고,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려, 마음속 깊이에서 찬란한 빛과 함께


슬픔이 교차했다.

계속해서 저승사자의 뒤를 따라 걷고 또 걷다 보니, 모래로 덮여 있던 블랙홀을 연상케 하는 공간이 나타났고, 루나는 그 공간으로 빨려 들어가는데,


빠져나오기 위해 발버둥 칠 때마다 되려 진흙 구덩이처럼 더욱 빨려 들어 갔다.

산더미 같은 모래 속에 갇혀, 그녀의 숨통까지 점점 조여들자, 영혼들이 그녀를 구해줬고, 덕분에 그녀는 모래 속에서 벗어날 수 있었는데,


그곳에 빠지기 전에 공간은 그녀가 그곳을 빠져나온 후엔 밝고 환한 숲속이 그녀의 눈앞에 펼쳐졌다.

<2024년 8월 10일>

[서울 조은희망 병원]

PM 02:00

서울시 용산구 한남동에 위치한 종합병원

본관 옆에 있는 외상센터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보이는 안내데스크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에서 내려 도착한 곳은 중환자실 중, 1인실이 있는 병동이며,


데스크에 있던 간호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두 번째 병실인 402호 안으로 들어간다.

새하얀 벽과 은은한 조명으로 가득한 병실. 창밖으로 따스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온다.

병상에는 링거를 포함한 여러 기계들을 연결하는 선 여러 개를 꽂은 채 누워있는 한 여자가 보인다.

간호사는 그녀의 상태를 살피고, 차트를 확인한다.

침상 앞쪽에는 그녀의 신상 정보가 적혀 있다.

[진료과: 외상센터 나이/성별: 29세/여 병실: 특실 402

벨 번호: 6 입원일: 2024년 5월 11일 수술 명칭: 상완골 간부 골절 술

수술일: 2024년 5월 11일 이름: 채 루 나]

그녀의 창백한 얼굴은 병상 생활이 어땠는지를 말해주듯 수척해 보인다.

하지만 희미하게 떨리는 눈꺼풀은 마치 금방이라도 눈을 뜰 것 같다.

병실 밖, 데스크 앞에서는 40대 초반의 온화한 인상의 주치의와 30대 후반의 차분하고 친절한 간호사가 루나의 차트를 보며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래도 상태가 많이 호전된 것 같아 다행이야. 뇌파도 안정적이고."

"네, 곧 의식이 돌아올 거 같아요."

그때, 루나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움직인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그녀의 눈꺼풀이 천천히 떠진다.

초점 없는 눈동자가 허공을 잠시 헤매다가, 이내 병실 천장에 고정된다.

그녀는 혼란스러운 듯 눈을 깜빡이며 주변을 둘러본다.

그녀의 상태를 확인하러 온 간호사가 그녀가 깨어난 것을 발견하고는 급히 주치의를 부른다.

뛰어 들어온 주치의는 그녀의 바이탈을 체크하고는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을 건다.

"정신이 드세요?"

루나는 아무런 대답 없이 주치의를 응시한다.

"여기 어딘지 아시겠어요? 제 말이 들리면 눈 한 번 깜박여 보실까요?"

그녀는 눈을 한 번 깜박이더니 갈라지다 못해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주치의가 그녀에게 이름을 물어보자, 그녀의 시선이 주치의와 간호사에게 닿는다.

"…채..루..나…"

그녀는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이다.

그녀의 눈빛 한편에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스쳐 지나간다.

주치의는 그런 루나의 모습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말한다.

"괜찮아요, 루나 씨. 여긴 병원이고, 전 당신 주치의예요."

루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뜬다.

하지만 여전히 혼란스러움으로 가득하다.

간호사는 그녀에게 그녀가 병원에 있는 이유와 그녀가 받은 수술에 대해 들려준다.

"루나 씨는 3개월 전에 큰 교통사고를 당해서 이곳에 실려 오셨어요. 어깨 골절 수술을 받아서 철심 3개가 박혀 있는 상태구요.


수술은 성공적으로 잘 마쳤지만, 3개월간 의식이 없으셨고, 지금 루나 씨의 상태는 안정적이고 너무 좋아요~

혼란스러우시죠? 괜찮아요~ 산소호흡기는 자가 호흡이 가능해지는 대로 떼드릴 거예요. 돌아오신 걸 환영합니다~"

그녀의 어깨를 따뜻하게 감싸고는 병실을 나서는 간호사와 주치의

그 순간, 저승사자가 다시 루나 앞에 나타났고, 그녀는 의식 불명 상태일 때 꾸었던 꿈과 깨어난 후에도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저승사자의 모습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공포감이 몰려와 눈물이 흘렀다.

"도대체...제가..뭘 잘못..했길래...자꾸..데려가..시려는..거예요…? 내가 죽는다니…내가 왜 이런 벌을 받아야 하죠?”

저승사자는 차가운 눈빛을 거두지 않은 채 대답했다.

“죽음은 잘못의 결과가 아니다. 모든 생명은 끝을 맞이한다. 하지만, 그 죽음을 한 번 피했다고 앞으로도 계속 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저승사자의 말에 그녀는 서러움이 복받쳐 덜덜 떨리는 손으로 침대 시트를 꽉 쥐고는 더욱 서럽게 울었다.

"...흐흐흑...흐흡...흑..."

다른 영혼들을 대할 때와는 달리, 서럽게 우는 그녀를 측은하게 바라보는 저승사자

"뚝."

"...흐흐흡..흐흑...ㄴ..네?"

"뚝 하라고. 시끄러."

그녀는 조금씩 진정이 되는지 안정을 되찾아갔다.

산소호흡기가 답답했는지 자신의 손으로 턱 밑까지 내린다.

"시끄러우면..그냥...아저씨가...가면..되잖아요..."

"아..아저씨?"

"딱 봐도..30대 후반처럼 보이는데...아저씨지, 아줌만가…?"

그녀의 말을 잠시 생각하다가 뒷말에 실소를 터뜨리는 저승사자

처음 보는 저승사자의 웃는 모습에 당황하는 루나

"웃을 줄 모르는 사람인 줄..."

"나를 웃겼으니 선택권을 주마."

"무..무슨?"

"우선, 난 짐작했듯이 망자의 영혼을 저승으로 인도하는 저승사자다.


위에서 망자의 명부를 배부하면 난 그 명부에 적힌 사람들의 마지막 순간을 찾아가 육체로부터 분리된 영혼들을 저승의 문 앞까지 인도한다.

3개월 전, 너의 사고 때 내가 받은 명부는 분명 너를 포함한 4장이었다.


하지만, 현장에 도착했을 때 갑자기 너의 명부가 사라지면서 너의 숨은 돌아왔고 나머지 명부에 적힌 세 영혼들을 인도했다.

그리고 오늘 또다시 너의 명부가 왔다. 이 명부에는 출생일과 이름, 그리고 사망 예정일과 사인이 적혀 있다.

정말 니가 살고자 하는 의지가 간절하다면 알려줄 수도 있다. 알고 싶지 않다면 모른 채로 너의 마지막을 막을 수 없을 테고,


미리 알게 된다면 적어도 막으려는 시도는 할 수 있을 테니까. 물론 실패할 수도 있겠지."

"그러니까..사망 예정일과 사인을 알려줄지, 말지를 내 선택에 맡기겠다는 거네요..."

"선택해라, 지금."

"지금요? 꼭 지금 해야 되나요? 고민할 시간도 없이?"

"고민, 하는 건 나랑은 상관없지. 하지만 고민하다가 그사이 죽게 되면 선택권도, 니 인생도, 니 영혼도 전부 사라져 버리는데, 고민해 보든가."

"...아..."

저승사자는 잠시 병실 안에 있던 의자에 앉아 기다린다.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루나가 입을 뗀다.

"...저...결정 했어요..."

루나의 말에 의자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저승사자

"그 전에,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되나요?"

"뭔데?"

"왜 나한테 이런 걸 알려주는 거예요? 뭔가 다른 사람한테 누설하면 안 될 거 같은데...이렇게 쉽게..."

허를 찌르는 그녀의 질문에 저승사자는 헛기침을 한다.

"나도 처음이다...누구한테 누설하는 거...하지만 넌 그럴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그날, 너의 숨이 다시 돌아온 신의 뜻이 있겠지...나도 궁금해서..."

'그날, 나는 죽었다…

하지만, 다시 숨이 돌아왔다…

그날 이후, 저승사자가 보인다…

왜 이런 일이 나에게 벌어진 걸까...'

"알려 주세요. 알고 싶어요. 나의 마지막을 미리 안다는 거...나쁘지 않은 거 같고...적어도 막으려는 시도 정도는 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것만으로도 이유는 충분할 거 같아요..."

저승사자는 손에 든 그녀의 명부를 꺼내 읽는다.

"갑진년 임신월 경술일. 사인, 교통사고."

"또요? 차라면 이제 치가 떨리는데..."

"차 대 차만 교통사고가 아니지. 사람 대 차, 사람 대 오토바이, 사람 대 자전거도 교통사고라고 하지."

"아...근데, 갑진년 임신월 경술일이면 몇..일이지…?"

"하아...2024년 8월 14일. 요즘 것들은 왜 옛것을 소중히 하지 않는 거지? 그냥 모르면 그만인가?"

"왜..화를 내..."

루나는 자신의 사망 예정일이 4일 후라는 사실에 저승사자가 사라진 이후로도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과 변화를 무시할 수 없었고, 오랜 시간 잠들지 못하다가 겨우 잠이 들었다.


=인생은 영화와 같다. 마지막 장면을 직접 결정하라. 믿음을 가지고 그대로 행동하라.=

-짐 헨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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