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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흘의 시간

Oct 20, 2021 수

by 안개꽃

오늘이 월요일인데, 이제 이틀 후 수요일이면 열흘 명상 코스를 수행하러 떠난다. 어젯밤에 그곳에서 온 이메일을 읽다가 음식의 다양함이 (그래 봤자 베지테리언 식단이지만) 코로나로 인해 예전 같지 않을 거라고 강조한 부분이 자꾸 걸렸다. 남편에게 한마디 했다. '먹을걸 좀 챙겨 갈까? 하하하' 말하고도 좀 멋쩍다. 하루에 몇 시간을 해야 하는 명상보다 배고플게 더 걱정되었다. 내가 우리 집 주 요리사인데 열흘이나 자리를 비우게 되어 엄청난 요리를 하고 있는 요즘이라 더 그럴 수도 있다. 이 맛있는 음식들을 두고.. 난 빵 쪼가리와 티나 마시다 와야 하다니.. 강제 다이어트가 되겠구먼.


해리포터 시리즈를 최근에 다 읽었는데, 중간에 해리와 헐마이오니와 론이 순간 이동을 하면서 도망 다니면서 볼드모트의 영혼이 들어간 물건을 찾기 시작할 때 이런 내용이 나온다. 너무 갑자기 떠나와 먹을 음식을 챙기지 못한 그들은 잘 경험해 보지 못한 굶주림과 만나게 된다. 해리는 어렸을 때 많이 경험해 봤지만, 헐마이오니와 론은 부모님이 음식이 없어 굶주린 경험을 하도록 키우지 않았다. 먹을 게 없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처음 경험한 그들은 배고플 땐 더 까칠해지고, 화도 쉽게 나면서 용기도 부족해질 수 있음을 배운다. 내가 어디 고급 리조트에 휴양하러 떠나는 게 아니니, 나도 경험하지 못한 배고픔을 느낄 수도 있고, 정해진 식사 시간이 아닐 땐 먹을 음식이 없어도 괜찮을 수 있음을 배우고, 우리가 평상시 먹는 음식에도 더 감사함을 느끼게 되겠지?라고 긍정 주문을 미리 걸어본다.


오늘은 수요일이다. 드디어 오늘 점심 먹고 출발한다. 어제는 엄청난 양의 동그랑땡도 만들었다. 남편은 보통 뒷정리와 설거지 담당인데, 열흘 동안 혼자 식탁을 차려낼 생각에 요 며칠 열심히 내가 하는 걸 보더니, 어제 요리할 땐 주방 보조 역할을 척척했다. '계란 물이 부족할 것 같은데? 계란을 더 풀까?' 라던지, '부침 가루가 부족해 보이는데 더 부을까?' 라던지, 평소 같지 않게 필요한 부분과 다음 스텝을 잘 파악해서 도와주니 큰 도움이 되었다. 역시 시간을 많이 보내니 자연스레 센스도 늘어나도 또 그렇게 실력도 늘어나는 것 같다.


내일부턴 새벽 4시에 일어나야 한다. 아침에 종을 쳐주면 그 소리를 듣고 깬다고 한다. 두 번 다녀온 남편에게 궁금한 게 생각날 때마다 질문을 하고 있다. 원래 계획은 내가 먼저 다녀오고, 그다음에 본인이 가겠다고 했다. 남편이 누가 먼저 가는 게 낫겠냐고 했을 때, 난 내가 먼저 가겠다고 했다. 그리고 어제는 애들 둘과 남겨진 남편이 열흘을 잘 버틸 수 있을까 싶어 고생하라고 말하다 보니, 아마 내가 다녀오고 나면, 너무 힘들었어서 네가 애들 둘을 나에게 맡기고 차마 혼자 가겠다고 못하는 거 아니야?라는 희망적인 상상도 해 봤다. 예전엔 쌍둥이 동생들과 같이 살 때라 남편이 열흘 떠날 때, 동생들에게 용돈을 쥐어주며 언니와 누나를 잘 도와주라고 당부를 하고 갔었다. 지금은 아무도 없다.


하루 총 몇 시간 앉아서 명상을 배우는 것은 두렵기도 하다. 두려운 마음도 있지만, 한쪽에선 조용히 혼자 열흘을 보낼 생각에 설레기도 하다. 밥도 준다고 하지 잠도 재워준다고 하지, 원하면 쉬는 시간에 낮잠을 잘 수도 있다. 또 조용히 산책을 할 수도 있다. 평생 살면서 혼자 여행을 떠나본 적이 없다. 열흘이란 시간을 혼자서 가져본 적도 없다. 오늘부터 시작하게 될 이 새로운 경험을 온전히 잘 즐기고 돌아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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