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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개꽃 Oct 13. 2023

[퇴고] 나에게 연필은 성실함의 상징이다.

*정지우 작가와 글쓰기 모임에서 합평을 한 후, 퇴고를 하여 다시 올립니다. 첫 번째 글과 어떻게 달라졌는지 확인하고 싶으신 분들은 아래 글을 읽어 주세요 :)


https://brunch.co.kr/@jennifer008/276


나는 연필이, 학생들이 성실함을 갈고닦을 수 있게 도와주는 도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막상 학창 시절엔 살아가면서 성실함과 꾸준함이 왜 중요한지 깨닫기 전이었다. 나는 고 1 때 캐나다로 이민을 갔기 때문에 나의 학창 시절은 한국에서와 캐나다에서의 학창 시절 둘로 나눌 수 있다.


어느 날,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시험공부를 시키기 위해 아이들에게 깜지(아주 작은 글씨로 빼곡히 한 장을 채우는 시험 노트, 까만 종이)를 한 바닥을 완성해 오라고 하셨다. 처음엔 제대로 깜지를 만들기 위해 최대한 작은 글씨체로 열심히 적어 나갔다. 그러다 이런 속도론 내일 안에 다 숙제를 해 낼 수 없겠구나 싶어졌다. 그 순간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데, 글씨를 대왕만 하게 종이 한 바닥에 가득 차게끔 크게 적고 그리고 그 위에 또 다른 글씨를 적고 하면서 종이를 까맣게 만들어 버리자 라는 생각이었다.


난 용감하게도 그걸 실행에 옮겼고 다음날 숙제 검사 때 당당하게 그 말도 안 되는 종이를 펼쳐 보였다. 그날 선생님께 호되게 얻어터졌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난다. 하지만, 그날의 깜지 숙제 사건은 나 자신이 꼼꼼하고 성실한 학생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정체성에 이유를 붙여 준 것 같다.


시간이 지나 연필과 성실함에 대한 나만의 연결고리를 또다시 만나게 되었다. 중학교 2학년 때 나와는 달리 공부를 매우 잘했던 친한 친구가 있었다. 그리고 우연히 놀러 간 그 친구집에서 연필로 빼곡히 적힌 공책을 발견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이렇게나 열심히 공부해 왔단 말이야?’ 친구는 별거 아니라는 듯 매 시험 때마다 모든 과목을 이렇게 연필로 적어서 공책을 채워가며 암기한다고 했다. 난 마치 새로운 비밀을 발견했다는 듯이, 친구의 공부 비법을 바로 따라 하기로 했다. ‘그래 나도 이렇게 공부하면 친구처럼 반에서 일등도 할 수 있을 거야’라고 생각하면서.. 마치 이걸 안 해서 내 성적이 높지 않았다는 듯이 말이다.


결심은 언제나 그렇듯 오래가지 못했다. 손가락이 아파왔고 집중력은 떨어졌으며 내가 그 친구처럼 필기노트를 이쁘게 완성하는 걸 원하는 건지, 암기를 목표로 적고 있는 건지 도대체 잘 모르겠는 심정이 들면서 결국 포기하게 되어 버렸다. 그렇게 한국에서의 학창 시절은 연필로 얻을 수 있는 성실함과 끈기를 장착하지 못하고 캐나다로 이민을 가게 됐다.


처음 캐나다로 이민 갔을 때 난 영어로 고등학교 수업을 따라갈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은 상태였다. 모든 과목을 기초부터 다시 배운다는 심정으로 공부했다. 아시안 학생들은 모두 수학을 잘하는 줄 알았다며, 나의 수학 점수를 보고 놀라는 학생들도 있었다. 한국에선 장착하지 못했던 학생의 성실함을 캐나다 가서 처음부터 다시 연필을 쥐고 노력하기 시작했다. 늦었지만 거의 생존모드로 공부했다. 한영사전을 보고, 영영사전도 뒤져가며 공부하니 성적이 점점 올라갔다. 한인식당에서 요리사로 고생하시는 엄마와 잔디 깎아주는 일을 하는 아빠를 보며, 엉덩이 힘을 기르게 되었고 결국엔 캐나다에서 가장 유명한 대학에서 심리학과 사회학을 복수 전공하여 졸업했다.


한국에서의 학창 시절은 조금 여유로운, 연필과는 그다지 친하지 않은 시절이었다면, 캐나다에서 학창 시절은 잘 해내야 한다는 굳은 결심과 함께 연필을 손에 쥐고 그 시절에 얻을 수 있는 성실함을 몸에 익히면서 살아낸 것 같다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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