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일이다. 점심 식사 후 다시 일하러 컴터 앞으로 가야 했다. 식탁에 회사 노트북을 셋업해 놓고, 점심은 거실 티비 앞에서 먹었다. 소파에서 일어나기 싫다.. 컴퓨터에 가서 아침에 이메일 보낸 손님은 답장이 왔는지, 싸인 받아야 할 게 있어 보냈는데 싸인을 해 줬는지, 확인하는 일 조차 부담으로 다가왔다. 새로운 회사에 적응하려다 보니, 자동으로 오는 서류/싸인/미팅 썸머리/점검 메세지에도 큰 부담을 느낀다. 내가 뭔가 잘못하고 있나, 나 이 회사에 잘 적응하고 있나.. 이 또한 배움의 과정이고, 이런 지적을 자동 프로그램을 통해서 받는 것이 내가 완벽해지고 적응해 나가는 게 큰 도움이 된다는 걸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럼에도 매번 매니저까지 첨부해서 받는 이메일이 부담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손님들은 처음에 다급해서 미팅했을 때와 달리 이미 볼일 다 봤다는 생각에 내 연락에 바로바로 응답해 주지 않는다. 그래도 열심히 해 보겠다고 식탁에 노트북을 들고 지하 오피스로 내려갔다. 앞으로 두 시간 동안 나를 찾지 말라고 하고..
전화를 돌려볼 참이었다. 회사에서 잠재 고객 리스트를 뽑아서 내가 전화 걸어 연락해 볼 만한 손님을 추려주니 프로파일 검토 후 전화해서 재정 상담이 필요한지 필요하지 않다 하면 당신이 왜 재정상담을 꼭 받아야 하는지를 설득하는 일이다. 답정너의 통화라고나 할까. 10명 중 7명은 연결이 안 된다. 괴로운 두 시간 후 애들을 데리러 가려고 나왔을 때 성훈이가 한마디 한다. 원래는 4월에 성훈이 먼저 퇴사하고 나는 좀 더 일하는 게 목표였는데, 따로따로 하는 게 말이 안 되는 거 같으니 같은 날 퇴사하자고. 그리고 너 사슴도 꿈에 나왔는데 뭘 그렇게 괴로워하면서까지 하려고 하냐고 한다. 꿈 해몽 사이트에 의하면 사슴이 나오는 꿈은 길몽이고, 귀인이 찾아오는 거라고 했다. 성훈이 해석은 귀인이 다른 게 아니고 '너의 그 괴로운 마음'이 귀인이라고 한다. 싸인이 다른 게 아니라, 네가 괴로워서 정말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은 게 그게 싸인이라고 한다. 뭐 원래 꿈 해몽이라는 것이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아니겠는가. 오늘 오전에 다시 그 손님에게 이메일 보냈다. 주말 안에 싸인해서 보내달라고 (오늘은 금요일). 성훈이는 다음 주부터 2주간 휴가를 냈다. 나도 그러고 싶은데 취직한 지 3달밖에 안됐는데 지금 휴가를 2주나 신청하는 게 부담스럽기도 하고, 캐나다는 2월 말까지 작년 소득신고용 은퇴 적금 가입하는 시기라 내가 지금 쉬겠다는 건 일하고 싶지 않다고 너무 대놓고 말하는 거라 차마 용기가 아질 않는다 (지금 1월 말). 난 이사 오기 전 토론토에서 이 은행에 지원할 때만 해도 한 5년은 더 일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사 와서 이직이 확정되고도 '뭐 집에서 일하고 좋네~'라고 편하게 생각하면서 크게 스트레스 안 받고 있었다. 그런데 잘하고 싶고, 지금보다 더 실적이 있어야 할 것만 같은데 언제까지 계속 트레이닝을 핑계로 조용히 있을 수만은 없다는 압박을 느끼자 (아무도 나에게 압박을 준 사람은 없다) 5년이고 1년이고 지금 할 수만 있다면 이런 압박감 안 느끼고 살고 싶은 욕망이 생기기 시작했다. 조용히 소박하게 소비하면서 따뜻한 햇살 아래 나를 속박하는 소속감에서 벗어나 나에게 새로 주어진 엄청난 시간들을 내가 컨트롤하면서 즐기고 싶다. 성훈이와 계획하고 있는 프로젝트들을 재밌게 해 나가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