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 회사, 2인자의 시작+작은 기업의 한계로 인해 퇴사
나는 내 이야기밖에 쓸 수 없는 것 같다. 소설을 써보려고했는데 (실제 단편하나를 썼다) 지루하기 짝이 없었고, 드라마작가교육원에서 시놉시스를 쓰면서 주인공 캐릭터 설정하고, 정반합 구조에 맞춰 사건을 흐름에 맞게 풀어내는 과정을 배웠는데 그게 너무 어려웠다. 둘다 때려쳤다. 그래서.
전편에 이어 나를 스쳐간 직장동료란 타이틀로 내가 거쳐온 회사와 ex 동료들에 대해 기록하는 일은 엄청 신나는 일인데, 내 이야기를 글로 옮기는게 그렇게 좋아할 일인가, 싶지만 나는 그 작업이 참 즐겁다.
자, 그럼 두번째 회사 이야기, 본론으로!
영국유학은....어떤 의미로는 성공적이었고 어떤 의미로는 실패였다. 성공적인건, 내인생 첫 연애를 시작하면서 모쏠을 탈피했기 때문이고 실패라는 건, 여러의미인데. 차분히 정리하자면 3가지 정도에서 실패했다. 1. 일단 2,500만원이라는 (퇴직금+엄마의 지원금) 큰돈을 날렸다는 것 2. 영어로 말을 할 수 있다 뿐이지, 주변에서, 영국까지 갔다온 애가 쯧쯧, 이란 반응을 보이는 것을 보면, 결과가 영 신통치 않은거다. 외국인 울렁증이 많이 줄어들었고, 현재도 외국계 기업의 외국인 mgr, HR과 영어로 업무를 진행하고 있지만 서바이벌 잉글리쉬라서 안타까울 때가 매우, 매우, 자주 있다. 하고 싶은 말의 십분의 1이나 표현할까. 지난주엔 hedgehog가 고슴도치인줄 찍어서 맞췄다고 큰조카한테 무시당했다. 마지막으로 3. 자존감이 올라가지 않았다는 것.
좋아하는 뮤지컬도, 가난한 유학생 신분이라 돈 아낀다고 오히려 한국에 있을때보다 더 못봤다. 그 좋아하는 라이온킹과 레미제라블도, 2시간 내내 영어로 이야기하고 노래하니까 어지럽기도했고;;;;; (영어 울렁증 안 나아졌구나;;) 그러니까 영국 유학은, 그냥.....내 인생의 황금기였다. 본머스라는, 제주도처럼 신혼여행 많이오는 바닷가마을에서 놀멍쉬멍 내 기분만큼이나 변화무쌍한 영쿡 날씨도 만끽하고, 연애도 하고, 이웃나라도 여행하면서. 벨기에 맥주 마시러 벨기에도 가고, 버스에 탄 채로, 배타고 도버해협을 지나서 독일 수제 소시지도 먹고 오고, 오, 샹제리제 거리도 걷고, 우피치 박물관도 다녀오고, 하면서.
하이드 파크에서 런더너인척 햇빛도 쬐고, 맥주도 마시고, 태닝도 하면서. 스물 여섯살 겨울로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퇴사하고 영국엘 갔을거다. 비록 돈도 잃고, 사랑도 깨지고, 영어스피킹도 제자리지만.
9개월 코스로 어학연수를 떠났는데, 안달희복달희 성격때문에 (내안엔 항상 두명의 달희가 더 살고있다) 한국으로 돌아가서 먹고사니즘이 늘 불안했다. 그러던 차 대한항공 기내잡지였나, 기자를 찾는다길래, 한달먼저 코스를 정리하고, 귀국해서 면접을 봤다. 떨어졌다. 한달간의 어학연수 수업비를 포기하고 왔거늘. 이럴줄 알았으면 한달 더 실컷 런던에서 놀다라도 오는건데. 후회가 막심했지만 모든게 내 결정이었다. 우울해하던 차, 대학동기인데 만학도 선배가, 한번 만나자고 했다. 주로 사업계획서 쓰는 일을 하는데, 같이 일해보는게 어떻겠냐고. 외국인 임대사업, (일명 릴로케이션), 사무실 이전에 필요한 인테리어 PM도 하는데, 나같이 ‘영어도 하고 글도 쓰고 커뮤니케이션 잘되는 애’가 딱이라는 것. 나를 필요로 한다는 데가 있다는 것에 일단 감사했고, 글도 쓰고, 영어도 활용할 수 있겠다 싶어, 바로 입사했다. 사실 입사랄 것도 없는, 대학선배인 사장님과, 나, 재무담당 여직원, 나의 일을 보조해줄 남자 사원, 감사이자 회계맡아주던 사장님 지인인 회계사 5명이 전부인, 작은 회사였다.
(작은 회사 답게) 꽤 다양한 일을 했다. 지금은 디지털미디어씨티로 거듭난 상암동, 버려진 서울 서북부 활성화는 MB의 야심찬 계획 중 하나였다. MB를 돕고 싶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론 그를 도운셈이다. 그곳에 외국계 은행과, 국내 언론사, 방송사 등의 사옥을 정부보조금 받아 싸게 이전할 수 있도록 도와준 사업계획서를 썼으니까. 사장님, 회계사, 나와 고객사 TF팀이 협력해서 200페이지 넘는 분량의 사업계획서를 2세달에 걸쳐서 만들어냈다. 머릿속 기획과 생각을 파워포인트로 구현해내준 디자이너도, 외주로 계약해서 함께했다.
사업계획서를 쓰지 않을 때는, 릴로케이션 업무로 바빴다. 한국지사로 발령받은 외국인/대사관 엠버서더 등이 거주할 집을 알아봐주는 것. 대부분 평창동, 이태원에 있는 3-4층 건물이었고, 국내 로컬 부동산 업체 3-4군데로부터 고객이 원하는 정보와 부합하는 물건(집)을 검토해서, 내가 직접 그 사장의 부인 혹은, 그 사장인 당사자+ 국내 로컬 부동산사장과 집을 봐주는 일이었다.
개와 애들, 아내와 본인의 needs 네박자에 딱 맞는 집을 구해주는게 쉬운일은 아니었다. 구해줘 홈즈, 도 없던 시절이고. 개에게 좋은 마당이 있는 집은, 아내가 커뮤니티하기 어려운 동네였고, 아내가 좋다는 곳은, 남편 직장과 거리가 먼 곳이었다. 외국인들도 한국인 남편과 크게 다르지 않게 대개는, 아내가 좋다는 집으로 최종 결정되곤 했다. 그러니까 고객은 남편이라도, 그의 아내 타입을 파악해서 그녀의 스타일에 맞는 집을 추천하려고 애썼다. 집이 결정되면, 정원사, 일해주는 분 등도 arrange해주었고, 살면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에, 영어 커뮤니케이션을 맡아서 해줘야했다. 전세 금액의 일부 혹은 월세 (보통 천만원 이상이었다)의 일부를, 우리 회사 service fee로 청구해서 받았다.
지금도 연락하며 지내는 터키쉬 아내와, 잉글리쉬 남편 내외가 생각난다. 아이는 없고. 꽤 센서티브했던 여인. 비와서 썩어가는 데크수리, 주방에 고장난 오븐, 잔디의 문제 등으로 자주 그집을 방문하곤 했는데 갈때마다 내가 좋아하는 터키쉬 딜라이트를 줘서 좋았다. 첫직장에서 터키에 갔었다. 이스탄불 보스포러스 해협 주변 부동산 가격이 급상승하는 것에 대해, 한강의 주변 아파트 시세와 연계해서, 강을 낀 거주지가 좋다는 기획기사에 엮기 위함이었는데, 그때 엄청난 대접을 받았었다. 취재하는, 2주동안, 현지 가이드를 좋아해서, 터키에 남아 그랑 결혼하겠다고 또 울고불고. 금사빠에게 2주란 사랑에 빠져서 결혼을 결심하기까지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결국?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마흔이 된 지금 나는 여전히 솔로다. 이후로 한국에 올때마다 터키 가이드 아저씨는 1-2년에 한두번 내 직장근처로 나를 만나러와주었고, 터키의 불안정한 정세와 이슈들로 몇년전 한국으로 완전히 들어왔다. 종종 연락을 하지만, 햇빛이 내리쬐던 이스탄불의 거리를 걸으며 심장쿵쾅 거리고, 아스펜도스 원형극장에서 손끝만 스쳐도 찌릿하던 화양연화는 이미 지나도 한참 지났다.
두번째 직장에서 기억에 남는 건, 재무팀 여직원과 인테리어 PM을 할때 일을 도와줬던 남자 주니어. 역시 사람이다. 상처를 드러내지 않는 묵직한 E와, 말 많고 실수많았어도 대화가 통해서 종종 술을 마셨던 B. 두번째 회사를 떠난 후 한참이 지난 후에, B가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단 소식을 듣고 축의금인지, 돌 축하금 정도를 보내줬던 것 같은데 이후로는 따로 연락을 하지 않고 지낸다. 새로 사무실을 이전할때 부지 선정에서부터, 인터넷선, 인테리어까지 모두 총괄해서 PM역할을 한적이 있는데 그때 내 일을 도와준 Y는 꽤 성실했던 걸로 기억한다. 올해초에 거의 십년만에 링크드인 통해 누님, 저 oo이에요 하면서 연락이 왔다. 어머나, 그래 oo이구나. IBM, Oracle 등에서 sales mgr 로 나름 탄탄한 경력을 쌓아오고 있었다.
최근 이 아이가 이직에 대한 고민이 시작됐다면서, 링크드인을 통해 연락을 해왔다. 문득, 사장님 소식도 궁금해서 (이글을 쓰면서) 연락을 드렸더니, 지금은 박사과정을 마치고 중대에서 겸임교수로 지낸다고 했다. 대학동기이자, 사장님인 그녀를 통해 새삼 참 다양한 경험을 했었구나 싶다. 한 남자의 아내이자, 아이둘의 엄마인, 여자가, 사장이 되어, 회사를 이끌어간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도 배웠고.
이 많은 일들을 했는데도 마음의 갈증이 심했다. 다시 글을 쓰고 싶어서 바쁜와중에 업무를 마치고 여의도까지 가서 방송작가 교육원에서 드라마 쓰는 법을 배우기도 했고, 서평학교 같은데서 글 쓰는 법을 배우며 지냈다. 막판에 사세가 기울어 소호사무실로 옮기게 됐는데, 사장님께 부담이 되는 것도 같고, 다시 내가 원하는 길을 가기 위해 스스로 회사를 그만뒀다. 마침, 첫직장으로부터 러브콜을 받고, 다시 거기로 돌아갔다.
세번째 직장은 다시 첫직장이었다.
세번째 직장이 된 첫번째 직장에서 추가로 재직하는 동안 스펙타클한 일이 참 많았다.
그중에서도 엄마가 뇌경색으로 쓰러지는 일이 생겼는데, 당시 막 생긴 애인도 걷어차고, 회사도 나와서, 프리랜서 기자로 전향하며 엄마 병간호를 했다. 후보자들과의 사전 인터뷰때 이직사유나 퇴사사유에 대해 물어보면, 부모님 병간호 하느라 그랬다는 대답이 절반 이상은 차지한다. 진짜일 때도 있고, 핑계일 때도 있다고 생각되는데 내경우에는 진짜 진짜 진짜였다. 미저리랑 돌아가며 병원에서 엄마의 재활을 1년간 도왔는데, 그러는 동안 잡지가 폐간되서 돌아갈 곳이 없어졌다.
그러던 차, 첫직장에서 같이 일하지도 않았는데, 우연한 기회에 ex멤버들 모인 술자리에 갔다가, 나보다 앞서 기자 생활을 했던 어느 여자분을 만났다. 괴짜선배. 이 선배로부터 꼬꼬마 시절 친구가 시작했다는 어느 스타트업 홍보팀장 자리를 제안받았다. 기자 출신에 홍보담당자를 찾는 다는 것. 거기가 나의 네번째 회사가 되었다. 교대의 작은 사무실, 4층에서 시작된 스타트업. 이곳에서 또 잊지못할 사건사고가 있었다. 그 이야기는,
다음편에서
to be continue .....
나를 스쳐간 직장동료들 1편
https://brunch.co.kr/@jennifernote/296
나를 스쳐간 직장동료들 3편
https://brunch.co.kr/@jennifernote/2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