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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읽는 헤드헌터 Jul 08. 2020

나를 스쳐간 직장동료들 I

첫직장. 어리버리 취재기자+매너리즘에 빠진 퇴사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가, 나의 6번째 회사다. 올해 14년차니까 2년 3개월 꼴로 이직을 했다. 용케도 지금 회사에서 6년차. 기회가 될때마다 자랑하고 싶다. 한곳에서 2년을 버티기 힘든 나란 인간이, 6년째 몸담고 있는 회사라니. 


카톡에서 첫 직장 K 대표님 생일을 알려줬다. 아, 오늘이 그분 생일이구나. 카톡의 생일알람을 그냥 못지나치는 성격이다. 그 핑계삼아 오래된 인연들에게 안부인사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타입. 반갑다며 바로 전화를 주셔서 다음주 화요일 약속을 정했다. 그곳에는 아직, 나에게 소개팅도 주선해줄만큼, 애정을 주셨던 finance 부장님도 계시기에 셋이 같이 만나기로 했다. 다시 나를 만나는게 감개무량하다고 해주셔서, 내가 더 감개무량했다.


이를 계기로 문득, 지나온 나의 14년을 한번 정리해보고 싶어졌다. 회사인간 14년차, 나를 스쳐간 사람들 혹은 그때 기억들을. 



첫번째 직장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이력서를 썼는데, 내세울 스펙이 하나도 없어서 아침저녁으로 (밥 먹을때를 제외하곤) 자괴감이 들던 때였다. 절친 조씨랑, 방구석에서 만화책을 보고 뒹굴다 한숨짓고 밤이되면 좁다란 나의 침대에 둘이 부둥켜 안고 울기도 했던 나날들.  대학에 다니는 동안 거의 매년 장학금을 받을만큼 열심히 생활했지만 이렇다할 자격증은 물론이고 토익점수 하나가 없었다. 스펙을 위한 스펙같은 걸 만들어놓지 않았으니까. 

글 잘쓰고, PPT 발표도 조리있게 잘한다며 전공과목 교수님이, 당신이 자문으로 계시는 회사를 소개해주었다. 지금 기자를 찾고 있다는데 한번 지원해보지, 라면서. 


기자라니. 국민학교 시절부터 막연히 라디오 작가나, 방송작가, 기자 같은 글을 쓰는 직업을 동경해왔지만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심지어 문창과 지원했다가, 패러독스에 대해, 제대로 설명하지 못해서 떨어진 기억도 있고. 그런데 갑자기 기자라니. 그렇게 생각지도 않았던 타이밍에, 어느날 갑자기, 나는 잡지사 기자가 되었다.


모든 일이 그러하듯 부푼 꿈을 안고 시작했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기사를 써본적이 없으니 당연히 취재도 어려웠고, 마감일이 되면 허구헌날 편집장겸 실질적 대표였던 지금의 K사장에게 끌려가 눈물 쏙뺄만큼 혼이 났다. 간단한 샵소개나 영화/책 소개를 하는 10줄 글에도 밤을 새야했다. 언제나 내 원고는 딸기밭(빨간펜으로 여기저기 수정된 원고)이었다. 그나마 위안이 된 건, 5년차 선배의 원고라고해서 딸기밭이 아닌 건 아니라는 것. 그래 해보자. 까짓거. 기사야 밤을 새서라도 쓰겠는데, 기사에 대해 일방적으로 까이는 방식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생긴건 사내대장부 같이 잘생겼지만 속은 여린 유리멘탈 개복치같은 나는, 그런 대우를, 구박을 견디기 어려웠다. (그만둘 각오로) 용기를 내서, 어렵사리 편집장님을 찾아갔다. 기사를 까고 취재과정을 취조하는 건 이해하는데, 공개적으로 까지 말아달라는 게 나의 요구조건이었는데, 역시나 보기좋게 또 까였다. 앞으로도 본인은 옛날방식을 고수할 거라는 것. 그런 소리 듣기 싫으면 알아서 취재 잘하고 글 써오라는 속뜻이 내포되어 있어겠지만, 왜 그렇게까지 다그쳐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해주지 않았다. 정은 넘치지만 친절한 타입의 리더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 있는 회사 사람들 모두 다 알았다. 편집장님이 굵직한 메인 부동산 기사를 주로 내게(만) 맡길 만큼 내가 신뢰받고 있다는 것을. K대표의 구박은 두가지였다. 애정기반, 진짜 무시. 다행히랄지 나는 전자였고 나름 인정받으며 잘 다녔다. 두번째 직장으로 이직했다가, 다시금 글 쓰는일에 갈증을 느껴, 첫직장으로 돌아가서 1년을 더 일했다. 그러니까 첫직장에 재입사한 셈. 한창 가르쳐놓으니 회사를 떠난다고 아쉬워했고, 그래서 괘씸하게 여기셨을 수도 있는데 내게 한번 더 기회를 주셨다. 모두 K사장 덕분이다. 


잡지사 취재기자로 3년간 일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도합 9번 정도 편집장이 바뀌었다. 한 계절이 다 가기도 전에 조직의 리더가 바뀌는 곳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는 어디까지나 내 기억을 바탕으로, 나는, 그 모든 윗사람들과 별탈없이 잘 지냈다, 고 자부한다. 편집장이 바뀔때마다 어떤 식으로 내글이 까일까 걱정되고 두려웠지만 그 사람이 원하는 방향에 맞춰 그시간들을 잘 지내려고 나름의 노력을 했던 것. 편집장님들의 생각은 다르려나?하하하.


(내가 책을 내기만 하면 무료로 교정을 봐주겠다는) 교정교열 언니, 편집팀, 동료 기자들, 영업 광고팀, 하다못해 support 부서 사람들과도 두루두루 잘 지냈다. 그래서 인지 첫직장을 그만두고 꽤 오랫동안 후회했다. 내가 다시 또 이렇게 좋은 사람들과, 리더에게 인정받으면서, 자부심 갖고 일할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 까닭에서다. 지나고 나면 모든 힘든 시간도 행복한 기억으로만 남는건지, 크고작은 이슈가 있었는데도 글을 쓰다보니 좋은 기억들만 새록새록 떠오른다. 


퇴사를 결심한 최초의 계기는 매너리즘 때문이었다. 2년 만에 찾아온 어줍잖은 그것. 암만 열심히 취재하고, 구박 당하며 기사를 밤새 써내도, 대체 누가 내 기사를 읽어줄건가. 읽긴 하는건가. 신문사 기자도 아니고 잡지사 기자의 미래는 있는가. 별의별 꼬투리를 다 잡아서 떠날 이유를 만들었다.


인쇄과정에 오타가 있을 수도 있지만, 그게, 애드버토리알(광고성 기사로, 고객사에게 돈을 받고 쓰는 기사)일 때는 엄청난 압박이 다가온다. 마침표대신 쉼표라도 찍었다고 득달같이 컴플레인을 해오는 광고주들.....

이미 잡지부수가 몇만 부 발행된 후에 발견된 오타라는 건, 휴...벌써 십여년 전일인데도 아찔하다. 대체 무슨 대단한 일을 한다고, 죽고 사는 문제도 아닌데 이렇게 심장떨리게 오타를 잡아내야하는건지, 마감때마다 회의감이 들었다. 


그러다 그 사건이 생겼다. 남해 힐튼에 새로 스카웃된 프랑스 쉐프의 인터뷰. 남해 힐튼까지 가서, 그 좋은 자연경관아래, 공짜로 숙식도 제공받고 너무나 호화로운 대접을 받았다. 그런데 머무는 내내 또 심장이 쪼그라들고, 내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옆엔 통역사가 있으니까 say hello나 thank you for your time 정도의 인사만으로 충분했는데, 그한마디를 못하는 내가 얼마나 한심하게 느껴지는지. 영어가 대체 뭐라고. 잡지사 일도 어느정도 적응이 되어 매너리즘에 빠진건지, 외국인 울렁증때문인건지, 특히나 자존감이 낮아졌던 시점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세가지가 기폭제가 되어 결국 퇴사, 라는 결론을 이끌어냈다. 유학만 갔다오면 모든게 편해질 줄 알았다. 자존감도 올라가고. K사장은 본인의 아들이 공부하고 있는 미국으로 나를 보내고 싶어했다. 미국에 가면 용돈조로 소정의 금액을 회사에서 지원해주겠다고 했다. 바로, 거절했다. 비록 몸은 미국에 있을지라도, 여전히 회사에 다니는 기분으로 매어 있을 것 같았다. 돈을 받는다는 건 그런거니까. 


퇴사시점에 편집장을 하던 J는, 광고주와 딜을 잘해서, 내 턱을 돌려깎는데 드는 비용 30%를 절약하게 해줄테니 퇴직금으로 턱을 깎으라고 (꼬셨..) 조언했다. 어느 잡지사 기자의 턱 돌려깎기, 한약으로 살빼기 등의 체험기사가 한두꼭지 홍보성으로 들어가던 시절이었다. 혹, 했다. 그러나 원체도 이쁘게 생긴 얼굴이 아니라 턱만 좀 깎는다고해서 내 인생이 그리 드라마틱하게 달라질 것 같지도 않네요 라며, 거절했다. 지금은 후회한다.

한살이라도 어렸던 그때 할걸....

애시당초 얼굴덕 보고 살아온 인생이 아니다. 미인계는 남의 일이었다. 

그래도 이왕지사 말 나온 김에, 턱을 돌려깎는 대신, 생애 첫 보톡스 주사를 맞았다. 왼쪽 턱과 오른쪽 턱에 각각 8방씩. 2006년 당시 가격 54만원 내외. 2020년 삼상동 주변시세 17만원 내외. 상전벽해라더니, 세상 참 많이 변했다. 그리고 보톡스 덕인지, 긴 휴가를 얻은 직장인의 자유로운 기운덕인지, 그곳에서 잊지못할 첫사랑을 만났다. 그건 다음에 다른 계기로 하기로 하고. 


그러고 보니 첫직장에서 인연이 되어 현재 우리 회사로 후배 한명을 스카웃해온 적이 있다. 첫직장 finance team에서 사원으로 일했던 그녀에게 애정을 많이 줬었다. 언젠가 좋은 회사를 다니면 이친구를 스카웃해야지, 싶을 정도로, 일처리가 믿음직해서 신뢰하던 아이였다. 이후 5군데 회사를 거쳤지만, 회사 규모나 재정상태 등이 이 친구를 데려올 정도가 아니라 기회를 엿보다, 2015년 즈음에, 현재의 회사로 스카웃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녀는 이 회사를 떠났다. 2년 조금 못 되어서 회사를 그만두고, 결혼했다. 지금은 두 아이의 엄마로 잘 살고 있다는 소식을 인스타그램을 통해서 본다. 가끔 생각한다. 그때 이 친구를 이곳으로 오게 한 게 잘한 결정이었는지, 아니었는지. 첫직장에 그대로 있었다면 finace 부장님과 알콩달콩 잘 지내면서 직장맘으로 지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if 가정법. 나는 다만, 후보자나, 애정하는 후배와 친구에게 기회를 주었을 뿐, 모든 결정은 언제나 그들의 몫이었다, 라고 생각한다.


카톡에 뜬 첫직장 K 대표님 생일 축하 메세지로 시작해서...여기까지 왔다.

내친김에 브런치 작가공모전 <실패에 대한 기록, 두려움?> 이란 주제에 글도 내봐야겠단 생각이 든다.

어떻게 보면, 내 모든 지난날 이직에 대한 경험은 어쩌면 실패와 두려움에 대한 기록일 수도 있으니까. 


두번째 직장에서는, 

대학선배가 차린 작은 회사에서 외국인 임대주택 소개, 릴로케이션, 버려진 서울의 서북부 도시재생을 위한 디지털미디어시티 사업계획서, 언론사 이전을 위한 사업계획서 편집, 회사 이전에 따른 인테리어 매니징, 등 다양한 일을 했다. 한번에 현재 직장까지 스토리를 쓰고 싶지만, too much detail한 스탈이다보니, 한곳한곳 쓸 이야기가 정말 많아서 스압주의, 라고 부제에 넣어야 한다. 그래서 걍, 나눠서 써볼 작정이다. 


애니웨이, 

to be continue .....




나를 스쳐간 직장동룡들 2편

https://brunch.co.kr/@jennifernote/297


나를 스쳐간 직장동료들 3편

https://brunch.co.kr/@jennifernote/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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