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K에게
올해 4월 지방선거가 끝난 다음주 우리팀에 조인한 K.
지난주 목요일 처음으로 같이 맥주를 마셨다. 한잔 해야지, 생각만하다가 세달이 지나버렸다. 그 사이 이친구가 결혼을 했는데 신혼인지라 늦게들여보내는 게 미안하기도 했다.
그런데, 목요일 아침 기운빠지는 사건(;)이 생겼다.
우리일은 고객사가 필요로 하는 후보자를 찾아 인재채용을 돕는 것. 일주일 간 열심히, 후보자를 찾아서 야심차게 목요일 아침에 추천을 했는데 고객사에서 바로 연락이 온거다. 그 포지션은 이미 마무리가 됐다고. 그 사이, 충분히 포지션이 마무리됐다고 서로 공유했을 수도 있었는데, 애써서 후보자 사전인터뷰하고 이력서 편집하고 좋은 결과를 기대하며 후보자를 추천했을 K가 떠올라 화가 좀 났다. 대신 고객사 HR 에게 말씀드렸다. 앞으로는 마무리된 포지션은 꼭 공유해달라고, 그래야 우리가 같은 시간을 그곳에 허비하지 않고 다른 포지션 후보자를 서치할 수 있다고. 고맙게도, 고객사 HR 도 내뜻을 이해해주었다. 가능하면 되도록 피드백을 공유하겠다고. 우리일을 하다보면 흔한 일이다. 6개월간 4차까지 긍정적으로 인터뷰가 진행되다가 갑자기 포지션이 없어지면서 그야말로 낫띵, 이 되기도 하고, 이직 시점에 갑자기 아내의 건강에 문제가 생겨 새로운 회사로 조인, 하는 걸 포기하는 후보자도 있고. 10년차 HR 을 서치하고 추천했는데 갑자기 5년차로 봐야겠다고해서, 처음부터 다시 재서치를 해야하는 경우도 있다. 우리가 예측할 수 없고, 관리할 수도 없는 <비욘드 컨트롤> 시츄에이션이 정말 다양하게 일어나는 <삶의 현장>이다.
무튼, 이 고객사랑은 올해 7월부터 처음 일을 시작한 곳이고 이러저러한 일을 겪으면서 서로 맞춰가면 된다. 서로를 잘 알게되면 예측할 수 없는 상황도 어느 정도 가늠해볼 수 있고 예비하기도 하니까.
그리고 실패로 마무리되는 일에서도 항상 우리 일은 경험이 쌓이고, 그 일로 만난 사람(후보자나 고객사)이 남는다. 그래서 같이 일하는 분들에게 우리 일은 실패로 끝나는 일도 결코 실패가 아니라는, 말을 자주하는 편이다. 문득 글로 쓰고 보니, 그간 참 와닿지 않았겠구나 반성하게 된다. 실망하고 사기저하될까봐 한 말인데 꼰대처럼 들렸을 것 같다;;;; 어쨌든 실패는 실패니까.......
부장님 저는 제가 힘든지 안힘든건지 잘 모르겠어요.
근데 아무래도 오늘 아침 추천하자마자 포지션 마무리됐다는
그 project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은 것 같기는 해요.
너러첨 감정에 무딘 타입은,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해, 그러니까.
지가 힘든지 안힘든지도 모르고, 최소한 내가 힘들구나, 알아야하고 몰로 스트레스 풀수 있는지, 그런건 좀 알아야지. 잔소리를 했는데
오늘 김창옥 교수 강의를 보다가 부끄러워졌다.
내면의 소리, 같은 소리하고있네, 참.
정작 내 내면은 돌보지도 않았으면서.
나는, 나에 대해 다 안다고 생각했다. 오만했다;;
나는, 문제없이 살고 있고, 문제가 와도 그걸 예민하게 감지할 수 있고, 예배 통해 회개하고 회복하고, 책 읽고 음악듣고 자연에서 새소리 듣는걸 좋아하니까 그런걸로 심신을 쉬게 해주면 된다고, 자신했다.
근데 인생이란게 그렇게 심플할리가 없잖은가.
몸의 이상신호-이석증과 자궁에 생긴 혹-를 통해 내가 스트레스가 심했구나, 처음 깨달았다. 김창옥 교수 강의를 찾아 들으며 그간 나도 누군가로부터 위로 받고 싶었구나,
를 알았다 .
나도 모르는 사이
나는 무언가에 지쳐있었고, 쉼과 위로가 필요했고, 모든 것이 권태로웠다.
열정기가 지나고, 권태기가 찾아오지만(다행히 그 권태기가 지나면), 그 다음엔 관록이 느껴지는 성숙기가 온다고, 했던가.
나는 내 일에, 권태기를 느꼈다. 애인이 있었으면 애인에게 권태기를 느꼈을텐데;; 괜히 아무 잘못도 없는 내 일에 모든 원망을 몰빵했다. 마치 지금 이 일만 떠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행복해질것처럼.
한때 새벽까지 일하고, 또 아침일찍 출근하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체력자체가 안된다. 그때 그 강도로 일하면 다음날 몸살난다. 한창때 건강관리를 너무 안했다.
언젠가부터 일에 대한 집중이 흩어지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성과도 나빠지고, 당연히 일에 대한 재미도 반감되어가는 악순환에 들어섰다. 그런때마다 세트로 찾아오는 고민. ‘행복하지 않게' 일을 한다는게 의미가 있나, 라는 것.
아싸리 일을 그만둘까, 주 몇회만 나올까, 출퇴근 시간을 조절해볼까. 별의별 생각을 다했다(대표님 이문장 안본척해주세요;;). 애꿎은 '일'만 붙들고 시비를 걸었다. 나를 가장 빛나게 해주는 소중한 일인데, 지금은 왜 그랬나 싶다.
내가 열심히 쌓아온 지금의 자리와, 나의 사람들과, 팀장이라는 위치는 괜히 얻어진게 아닌데. 누군가는 꽤 부러워하는 자리일텐데 나는 어쩌다 감사함을 잃게 된걸까. 그러던 어느날, 먹고사니즘이 현타로 다가왔다.
그간 내가 도망갈 핑계를 찾았구나.
건강 핑계대면서 일에 소홀하고 게을렀던 내 자신을 돌아봤다. 게으름을 피워놓고 결과가 좋지못하니까 이 핑계 저핑계대는, 나란 인간을 마주한 뒤,
다시, 프로젝트 하나하나를 꼼꼼히 관여하기 시작했다.
우리 일은 결국 성과를 통해 자기 가치를 증명하는 것. 참, 정직하게도 열심을 낸 만큼 조금씩 성과가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은, 권태기의 막바지 언덕 어딘가에 서있는 기분이 든다. 이 길만 무사히 지나면 살랑살랑 기분좋게 부는 바람 맞으며, 길가에 핀 민들레도 보면서, 아 이런게 관록이구나, 성숙함이구나, 라는 걸 느끼며 살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날이 오면, 아마 말해줄 수 있을 것 같다. 저기 멀리서 권태기 언덕을 오르며 포기하거나 돌아가려는 이에게, 조금만 더 앞으로 오면 여기, 조금은 여유로운 템포로 갈 수 있는 또 다른 길이 보인다고.
그러니 자꾸 뒤돌아보지말고, 너를 믿고, 바람을 맞으며, 앞으로 나아오라고.
그렇게 너무 서둘러 숨가쁘게 오면 지치니까, 쉬엄쉬엄오라고, 어차피 오르막길도 끝이 있다고.
성과위주 집단에서 성과를 못낼 것 같아 불안하고
예전의 명성을 유지하지 못할 것 같아 두려웠던 나는 <박수칠 때 떠나는 심정>으로, 도망갈 길을 찾았던 거다. 그런데 이제는 안다. 불안하고 두려워서 떠나는게 아니라, 내가 정말 새로운 시작을 위해서 떠나야 그 떠남에 후회가 남지 않으리란 것을.
그리고 세뇌가 필요하다. 나는, 몇억의 매출을 달성하기 위해 태어난+가족들에게 돈을 쓰고+주변인에게 펑펑 베풀어야만 인정받는 제니퍼가 아니라, 그냥 오롯이 나라는 인간자체로 충분하다는 것을. 남들을 도와주지 못하는 자리에 서게되는 걸 못견디는 타입이다. 이것도 오만함에서 비롯된 태도니 버려야한다. 내가 누굴 돕는단 말인가. 나라는 인간, 하나 잘 도우면 그 인생 잘 사는거지,어줍잖게 누굴 돕는단 생각따위+인정받아야만 하는 그 오만함, 찌질한 생각을 버려야한다.
K에게 감사한 밤이다.
내면의 소리 드립에 대해 민망하단 생각을 시작으로 정작 내가 외면했던 나의 내면의 소리와 마주할 수 있었다.
1. 제대로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나를 안다고 자신했던 2. 누군갈 도와야하는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오만한,
나란 인간.
그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기분좋은 메세지를 받았다.
아직은 우리 팀에서 3개월 차인 K.
직장인들 누구에게나 3개월마다 찾아온다는 3-6-9 고비가 6개월과 9개월에, 그녀에게 찾아올수도 있지만,
바라기는, 그때도 우리가 같이 그 상황을 잘 이겨내서 열정기-권태기-성숙기를 끝끝내 같이 보냈으면 좋겠다.
어쩌면 내가 기다렸던 초긍정 캐릭.
우리 팀에 와줘서 고맙다.
몸과 마음 모두 건강하게 잘 지내보자.
아프지마 케이 도토 잠보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