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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읽는 헤드헌터 Feb 21. 2021

타인에 대한 연민

혐오의 시대를 우아하게 건너는 방법


혐오의 시대를 우아하게 건너는 방법, 이라는 부제가 마음에 들어 산 책이다.

작년 말이었는데, 이유없이 다른사람으로부터 시기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피해의식이 들었던 시기였다.

(피해의식에 사로잡힐 정도는 아니었고, 그런 생각이 조금씩 고개를 들던 찰나였다)


상대방의 입장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하기보다 비난부터 하고 보는 이 시대에 (나조차도 그럴때가 많다)

이 책은 과연 어떤 메세지를 줄 수 있을까, 싶어서 읽었는데, 결론적으로는  not bad.


마사 누스바움이라는 저자가 부유한 집안에서 나고 자라, 좋은 고등학교, 대학교 과정을 밟은 사람이라 선입견이 먼저 생기긴 했다. 삶에 깊은 고민을 해본적 있겠는가, 어려움이 뭔지는 알겠는가. 가난한 사랑노래를 부른 시인의 마음따위 알 수 있을까, 싶어서. 뭐 꼭 인생이 고통스러워야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던 예술가들의 작품을 더 인정해왔던 바, 미국의 마사라는 철학자의 호소가 그다지 큰 울림을 주지는 않겠지, 라는 생각으로 책을 읽어내려갔다.


하버드 대학에서 철학, 고전, 윤리학을 가르치는 석좌교수이며 100대 지성인에 두번이나 선정된만큼,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힘이 있었고 글에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오래된 고전과 철학자들의 사상과 생각을 비교적 잘 정리했다고 생각한다.  

다만, 호들갑스럽게 진짜 대박이다, 라고 평할 정도는 아니라는 것.



편애하는 밑줄


깊이 사고하기란 어려운 일이지만,

두려워하고 비난하기란 쉬운 선택지다.


소크라테스식 개념에 따르면,

철학은 무언가를 강요하지도, 위협하지도, 무시하지도 않는다. 공허한 주장을 하지 않되 듣는이가 반박할 수 있는 전제로부터 결론을 도출하는 사고의 구조를 세운다. (38)


마틴 루터킹 주니어는 분노가 아니라 사랑으로 상대에게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낭만적일 필요도 상대를 좋아해야 할 필요도 없다. 그가 요구했던 사랑은 선한 의지와 희망이 인류에 대한 존중과 결합되는 것이었다.

상대의 의견을 경청하고 스스로 사고하며 결국 아름다운 목표를 위해 뜻을 같이할 사람들로 타인을 대해야 한다는 뜻이다. (41)


두려움은 사실 지독한 자기애적 감정이다.

어떤 형태로 뿌리내리든 타인에 관한 모든 생각을 몰아낸다.

유아의 두려움은 전적으로 자신의 신체에 집중되어 있다. (59)


철학은 그 자체로 구체적인 정책 선택을 좌우할 수는 없다.

정책은 철학, 역사학, 정치학. 경제학, 법학. 사회학을 아우르며 다양한 맥락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철학은 우리가 누구인지 눈앞에 어떤 문제들이 놓여 있는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다양한 상황에서 우리는 보복을 소망한다. 이혼을 생각해보자. 배신당한 배우자는 위자료와 자녀 양육권을 요구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 통해 힘의 균형이 되돌아오거나 손상된 존엄이 회복되기라도 할 것처럼 느낀다. 하지만 보복의 기능은 보통 이에 미치지 못한다. 두사람 모두 과거에 집착해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아이들, 가족들에게 엄청난 이차적 피해를 끼치기도 한다. 배신한 쪽이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은 결국 무엇을 위한 것인가? 배신당한쪽의 삶이 개선되는 것도 아니다. 과거에 집착하면서 새로운 가능성의 문을 닫아버리고 심지어 더 쓸쓸해지거나 참담해지기도 한다. 보복하고자 하는 사람은 미래의 행복과 자기존중을 원한다. 하지만 보복으로는 결코 이를 이룰 수 없고 세상을 훨씬 암울한 곳으로 만들뿐이다. (110)


마틴 루터 킹은 미래를 위해 인간의 가장 큰 욕구 중 하나이 보복 충동에 저항했다. 정치에서 가장 까다로운 문제 중 하나는 두려움이 우리를 분노로 이끌지 않도록 경계하며 단호한 자세로 해법을 찾아나가는 것이다. 두려움과 비난에 사로잡힌 비난은 어떤 문제도 해결해주지 못한다. 아테네와 로마에서 그랬듯이 응보적 폭력이 소용돌이로 우리를 이끌 뿐이다. (127)


단도진입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아무리 원인이 정당해도 시기심에는 문제가 많다고 본다. 시기는 '내가 잘 살기 위해 당신을 불행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외치며 사회적 협력을 제로섬 게임으로 만든다. 이는 형제자매 사이의 시기심과 비슷하며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즉 시기하는 아이는 사랑과 관심을 원한다기보다 다른 형제자매가 사랑과 관심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한다. 그런데 과연 시기없는 경쟁은 가능할까?

시기심은 타인이 가진 것에 주목하고 자신의 상황은 그보다 못하다고 비교하면서 느끼는 고통스러운 감정이다. 라이벌이 필요하다. 시기하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없느 좋은 것을 라이벌이 갖고 있기 때문에 고통스러워한다. 이 운좋은 라이벌을 향한 적대감이 생겨난다. 시기와 질투는 매우 비슷해보이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다. 시기와 질투 모두 가치있는 것을 소유한 라이벌에 대한 적대감을 포함한다. 하지만 질투는 내가 가진 것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관련이 있다. 인간관계에서의 사랑과 관심이 그렇다. 시기가 대상의 부재에 대한 감각인 반면 질투는 가치 있지만 불안정한 대상의 존재 자체에 집중한다. 질투는 자신의 가장 소중한 관계에 집중하기때문에 라이벌이 사랑하는 사람의 애정을 두고 경쟁한 적 없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해소되기도 한다. 병적인 질투는 상상속의 라이벌을 만들기도 하지만 질투가 늘 병적인 것은 아니다. 반대로 시기심은 쉽게 충족되지 않는다. 시기심의 독특한 환상은 내게 없는 좋은 것을 다른 사람이 갖고 있다고 여기게 한다. 행복한 인간관계 적당한 직업, 충분한 사회적 관계망이 자신에게만 없다고 생각한다.

시기하는 사람들은 모욕을 받았다는 환상에 젖어 비난받아야 할 이유가 없는 사람들의 행복까지도 비난한다. 요약하자면 비판은 늘 타당하지만 시기는 단순한 비판이 아니다. 파괴적인 적개심일뿐이다. (180)


시기심의 뿌리는 두려움이다.                                         


사춘기 시절 시기심에 휘둘리지 않도록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경쟁대신 협력이 필요하며 감정의 소용돌이를 표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드라마나 음악 등의 예술 과목을 육성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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