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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둘레길에서

Letters to Juliet

by 책읽는 헤드헌터

친구야.

나는 과감히 휴가를 내고, 한달 간의 길다면 긴 혼자만의 여행을 시작했어.

지금은 지리산 둘레길 3코스 부근 **게스트하우스에 머물고 있어. 왠지 예전의 싱글일때 너네 떠오르지 않니?

혼자 며칠씩 산을 다녀오시던ㅋ

언니의 바통을 넘겨받아 나도 싱글의 삶(사는게 헛헛해질때 종종 한번씩 산에 다녀오기도 하는, 그런 삶;;)을 잘 살고 있다고, 나중에 언니에게 좀 전해줄래?


오늘은 지리산 ‘뱀사골’이란 데를 갔다 왔는데 부여에서 온 ‘화요산악회’ 어르신들과 여수에서 온 ‘산악회’분들을 만났어. 만나는 분 마다 족족 아가씨가 간도 크다고. 시집을 안 갔으면 애인하고 둘이 와야지 혼자 심심하지 않냐고. 다들 어찌나 물어보시는지...

나원참, 애인없는 여자는 혼자 산에 갈 자유도 없나.


다른게 아니라 <반달곰 주의 현수막>을 보면서 니 생각이 났어.

영화 볼 때마다 영화관 비상구를 체크하던 니가 급 떠오르더라고. 알다시피 나는 뭐가됐든 메뉴얼도 제대로 안보고, 비상구는 더더구나 체크 안 하잖아. 근데 왠지 저 반달곰 주의보는 꼼꼼히 보게 되더라고. 정말 나타날 수 있을 것 같은 위협이 들어서 그랬나봐.

그런데 칭구야. 그 반달곰 주의 현수막에, 반달곰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된다고 써있는 줄 알아?

(괜히 읽었어…;;)

2인 이상 동행을 추천한대.

나, 원참! 아니 정말, 그게 대안이 된다는 거야?

아니 물론, 둘이 걸음 더할나위 없이 좋겠지. 근데. 없으니까, 둘이 걸을 사람이 없으니까 혼자 걷는거지!!!!!



무튼 대한민국에서 36살 싱글로 살아간다는 것은 대부분의 시간 심간 편하기는 하지만, 때때로 뭔가 서럽기도 하고 괜히 매사에 전투적으로 날을 세우게 되는 피곤한 삶이기도 하다.

내친김에 지리산 종주까지 하려고 했는데 산장도 15일 전에 예약해야하고, 등산화도 없고 여러가지 지리산 종주를 하기에는 준비하지 못한 게 많아서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했어 (다음기회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내일은 큰이모가 계신 장흥으로 넘어가려고.

큰 이모부가 나를 막둥이, 막둥이 하며 이뻐해주셨는데 몇해전부터 치매에 걸렸대.

슬프게도 나를 못 알아보실꺼야. 그래도 맛있는거 사들고 처음으로 한번 엄마의 고향 겸, 큰이모내외가 살고 있는 장흥엘 나혼자 찾아가보려고.


딸랑구랑, 잘 지내고 있어.

또 소식 전할께 칭구야.

2016년 9월, 남원에서




** 소소게스트하우스

머무는 내내 매일아침 손수 만들어주시는 맛있는 토스트를 먹을 수 있다. 다정한 네 가족과, 큰개 한마리가 사는 집 이층이 게스트 숙소로 사용된다. 무지개 해먹, 아름다운 절경, 특히나 안개가 피어오르는 새벽녘과 노을지는 저녁녘 전망이 아름답다. 지리산둘레길 3코스 근처에서 숙소를 찾는 여행자들에게 강추!



에필로그
큰이모부는 2019년에 돌아가셨다. 둘째언니 부부랑 엄마 모시고 빈소가 차려진 장흥에 갔었다. 3년전, 찾아뵈었을때 선물드린 은반지를 참 많이 아끼셨다며 “막둥이가 괜찮다하면 니 이숙 화장할때 같이 태워도 되겄냐”며 큰이모가 물었다. 물어볼 것도 없는 일이다. 큰이모부는 내 반지와 함께 가셨다.

내가 애심이 막둥이인지도 못 알아보셨으면서, 외출해서 나갔다 들어오면, 큰 이모에게 나를 가리키며, 빨리 밥 주라고, 예의 그 사람좋은 미소를 지으셨던 우리 이모부. 치매라는 게 무서운 병이라고만 생각했는데 큰이모부와 2주간 바로 곁에서 지내면서 이렇게 천사같은 모습의 치매도 있다, 는 걸 새삼 경험했다(치매도 그 양상이 저마다 다르단다). 당시에 큰맘먹고 한달 휴가내서 뵙고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장례를 치르고 서울로 올라오는 내내 들었다. 먼 미래에 대한 계획보다는 하루하루, 하고싶은 일, 나누고 싶은 걸 나누는게 좋다는 옛 어른의 말씀, 하나도 틀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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