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책읽는 헤드헌터 Mar 24. 2024

우리집은 북향이라서



하루종일 집에 있을 시간이 별로 없었는데 이사후 3개월이 지나면서, 하루종일 집에 있어보니 그제서야 비로서 우리집이 북향이란걸 알게됐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거실에 햇빛이 들지 않으며 세탁실과, 옷방에 햇빛이 드는데 그건 주로 내가 없는 시간대라는 것, 새소리 대신 하루종일 차가 지나다니는 소음이 들린다는 것. 수압이 약해서 놀러온 손님들이 저마다 걱정할 정도라는 것. 안방 바닥에는 보일러가 제대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 옷방으로 쓰는 작은방 손잡이는 닫히면 잘 안열린다는 것 (물론 규모면에서 만족스럽다).

 

어차피, 잠시 머물집이란 생각을 하기 때문에 북향이라 추운 것도, 해가 들지 않는 구조도, 소음도 그렇게 큰 불만은 없다. 서울이 고향이 아닌 사람들 모두가 그렇진 않겠지만 서울이 고향이 아닌 나는 서울에 자리잡은 그순간부터 귀향을 계획했다. 


귀향, 이란 단어가 너무 거창한데 

나고 자란 '양평'에서 내가 정말 바라는 집을 짓고 싶은 꿈이 있다. 

핀터레스트에서 매일 검색하는것도 집, 인테리어에 대한 이미지들이다. 

집, 에 대한 꿈이 어릴적부터 유난히 강했다. 나무로 된 2층집은 거의 나의 드리밍이었다.


나무 계단을 올라가면 창이 시원하게 트인 곳에 친구가 혼자쓰는 방이 있었다. 오디오, 전화기, 컴퓨터도 있었다. 당시 우리집은 단층이었고 (여전히 단층이다) 내방이랄 '방'이 없었다. 'ㅁ'자 구조의 한옥에서 살때는 안방 건너편 사랑채에 살았는데, 안방과 사랑방 옆에는 창고와 외양간이 있었고 그 사이에는 마당이 있었다. 화장실을 가려면 후레쉬를 들고 마당을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가야했고 '용기'와 '담력'이 있어야 했다. 게다가 그 사랑채에는 언니들 4명과, 할머니, 삼촌까지 같이 지내야 했었는데, 그런 환경속에서 내 전화기, 내 오디오가 있을리 만무했다. 


그러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인지, 초등학교 고학년 무렵, 아빠가 'ㅁ자 구조의 한옥'을 부수고 지금살고 있는 양옥,집을 지어주었다. 더이상 부엌에서 쥐를 만나는 끔찍한 일이 없어진다는 사실만으로, 집안에 화장실이 있다는 꿈같은 일이 이루어진다는 것만으로 너무 좋아서 손꼽아 새집에 들어가는 날만 기다렸는데, 그 집을 지으면서 이런저런 우여곡절이 많았다. 오늘은 그부분은 생략. 거기까지 짚고 가려면 A4용지 세장정도의 지면을 더 할애해야한다. 하여간 다 좋았는데 역시나, 단층이라는게 못내아쉬웠다. 


계단을 가로질러 2층에 내방을 갖고 싶었다.

어쨌거나 다행이랄지 언니들이 먼저 대학으로 떠나고, 삼촌이 장가간 덕에, 나는 아빠가 지어준 양옥집에 방하나를 차지할 수 있었다. 드디어 내방이 생긴 것. 그러나 현실은 너무 좁고, 컴퓨터나 전화기 같은 것도 없는 그냥 네모반듯한 공간하나가 덩그러니 생긴 것 뿐이었다. 가구나 인테리어랄게 없었다. 


그땐 모두들 삐삐로 소통하던 시절이었다. 방에 전화기 하나쯤은 있어야 또래집단에서 배재되지 않으며 수다를 나누며 더욱 더 견고히 프랜드십같은걸 쌓아야 하는 시절이었는데, 부모님은 사춘기 소녀의 불안,까지 신경쓸 여유가 1도 없었다. 새벽같이 농사일로, 채소장사로 집을 나섰고 어둑해져서야 집으로 돌아오셨으니까. 지금같으면 내가 직접 전화기 하나 사다가, 있는 전화선에 연결만하면 끝나는 일인데 그땐 그런 유도리가 없었다. 유도리는 역시 돈에서 나오는 건가? 당시 내겐 그럴 돈이 없었다. 참고서 살 돈, 급식비 낼 돈, 그 정도의 용돈을 받던 시절이었다. 


스무살에 서울에 올라와서 언니품에서 살다가, 서른살 초반엔가 혼자 원룸에 독립해서 살았는데 

그때 어린시절 부족했던 것들을 모두 보상받은 기분이 들었다. 원룸이지만 오롯이 내방이 있었고, 컴퓨터에 오디오도 있었고 책장은 물론 내밥솥, 전화기(는 휴대폰이 대신해주었다), 토스터기까지 있었으니 자려고 밤에 누울때마다 감개무량했다. 서울 한켠에 내방이 있다니, 하면서. 

(사진첩 어딘가에 사진이 있을텐데 찾아보려니 귀찮아진다. 나중에 첨부해둘 예정....이다;;)


그렇게 만족스럽게 살던 집이었는데 떠날 수 밖에 없는 사건이 생겼다.

집주인 아저씨가 주말에 마스터키로 내 방에 드나든다는걸 목격했던 것. 지금같으면 고소한다고 이사비라도 청구했을텐데 한동네로 이사간다는 사실 때문에 마주치고 어쩌고 하는게 무서웠는지 조용하고 급하게 새집을 알아보고 그집을 나왔더랬다. 


그렇게 얻은 곳이, 바로 직전까지 6년넘게 살던, 채광 통풍 훌륭하고 새소리로 아침을 열어주던, 투룸 나무집이었다. 나무 향이나, 단열이나, 고급마감재가 잘 된 집이라 엄청 만족스럽게 살았는데 거기도 집주인 이슈가 있었다. 그래도 욱하는 마음 달래면서 특이한 집주인과 어울렁 더울렁 살아보려고 노력했는데, 갑자기 월세로 전환한다고 해서 어쩔수없이 지금 이집으로 이사를 오게 됐다. 


나처럼 집이 서울이 아닌 친구들, 지인들에게 게스트룸을 내어주자는 목적으로, 혼자살지만 쓰리룸으로 얻게 되었는데 웬걸, 단열이 너무 안좋아서 겨울엔 친구들에게 방을 내어줄 수 없는 형편이다. 

채광은 나의 주무대인 거실과, 침실을 제외하고 들어온다. 세탁실, 옷방, 책방에. 


통풍은 괜찮은거 같은데, 올 여름을 지내봐야 알것 같다. 

보통 단열이 안되는 집이, 여름에 또 그렇게 덥다고들 하니까.

게다가 탑층이라 오는 바람도 막아줄 세대가 없고, 강렬한 태양열도 그대로 받아내야할 수 있으니 벌써부터 걱정이 되지만 일년을 살아봐야 이집의 봄여름가을겨울 매력과 대비책을 마련할 수 있을것 같다. 이사는 번거롭지만, 뭐 이삿짐센터 분들이 다 해주시는거니까. 2년 계약한 기간 잘 지내보고, 계약이 끝나는 시점이면 나도 대학원을 졸업하니까...그때 다시 사무실 위치같은거에 구애받지 말고, 강북으로 한번 이사를 가보고 싶다. 언니들이 반대할게 뻔하지만. 




모처럼 새집에서 하루종일 지내보면서 집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최근에 성경통독에 관한 글 아니면 개인적인 소회를 남긴 적이 없는것 같아 브런치에 끄적여보려고 로그인한건데, 30년전 이야기까지 소환하게 될줄은 몰랐다. 요새는 무슨 주제로 이야기하다 과거를 언급하다보면 기본값이 10년전, 20년전이 되어버린다. 


출퇴근길 엘베 거울을 통해 

매일 늘어나는 흰머리를 보면서 슬퍼지는 즈음

40살까지는 나이 드는게 하나도 슬프지 않았다. 조금 더 노련해지고, 내려놓을것 내려놓게 되고, 이해의 폭이 넓어지는것 같아 오히려 좋았는데 한국나이로 44세가 된 지금, 유난히 흰머리가 많이 늘어난 올해, 나이가 들고 있다는 게 서글퍼진다는 말이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오늘 아침엔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이렇게 흰머리가 많아졌으니 이제 나는 연하와는 연애를 할 수 없겠구나. 

아무리 염색을 한다고 해도'  


내 인생의 몇번이랄것도 없는 그 모든 연애들은 연하남과의 로맨스였는데 말이다. 

열살연하와의 연애도 '내쪽에선 문제될게 없다'라고 생각하던 입장이었는데 내 머리에 이상기운이 감지되면서 이제는 더이상 그런 호기로운 생각은 하지 않게됐다.


이왕지사 흰머리 날거면, 멋지게 검은머리랑 섞여 자라면 좋겠다. 

바램은 그것뿐....













매거진의 이전글 누군가의 '마지막 카드'가 된다는 것 & 괴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