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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읽는 헤드헌터 May 15. 2024

주여 나는 연약합니다
오늘도 실수합니다

2024년 5월 신우회 기록



지난주 신우회 설교내용을 기록하려는데 2번 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A라는 사람이 얼마나 대단하고 또 자존심이 세고, 훌륭한 사람인지에 대해 설파했고 대충 정리하자면 그런 사람에게 우리가 자존심을 상하지 않게 노력해야한다는 내용이었는데 평상시에는 맞장구를 잘 쳐주었지만, 지나치게 A라는 사람의 편에서 그사람 입장만 이야기하는 2번 언니의 말이 오늘은 왠지 듣기 싫었다. 불편한 감정이 올라왔다. 2번 언니의 요는 'A에게 더 잘해주자' 라는 이야기일텐데 나는 충분히 내가 할 수 있는 역할 이상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A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내 입장과 내 기준에서 바라보자면 그렇다는 이야기다. 


"오늘은 나를 돌봐야하는 날이니까 나도 나 먹을 장도 좀 보고, 나를 좀 돌보겠다, 나중에 통화하자"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왜 2 번 언니의 이야기를 자르고 서둘러 전화를 끊었을까? 아마도 내 안의 부정적 정서, 죄책감을 느끼고 싶지 않아서였던 것 같다. 2번 언니가 A를 대변하면 할수록 내가 해야했는데 하지못한것만 같은 (실젤 아닐수도있지만) 이상한 죄책감이 든다. 그럼 나는 그 관계를 위해 더 애를쓰고 그것이 오히려 더 관계를 불편하게 하는 악순환이 되기 때문에 전화통화를 잘랐을 수 있다. 

치심이나 죄책감 같은 감정을 '자기의식적 감정'이라고 부른다. 수치심이나 죄책감이 드는 것은 우리 행동이 앞으로 신체 항상성의 불균형을 초래할 수 있음을 사전에 예측한 상태다. 그러니까 내 행동으로 A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고 비난을 받을 수도 있기에 나의 뇌는 나에게 '죄책감'이라는 신호를 보내주었다. 행동을 수정하라고. 어떤 상황속에서 죄책감이 들때는 그 감정을 들게한 사람을 원망하고 날이 서서 대응하거나 무조건 피하기보다 가만히 앉아, 이렇게 글을 써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처럼. 

그러니까 모든 감정은 (그게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우리의 생존에 필요하기에 남은 것이니 죄책감에 대해서도 더이상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기위해 더 공부해보고자 한다. 

무례하게 말을 자른것에 대해 2번 언니에게 미안하다. 


하나님 앞에 인간들은 모두 죄인이다.

드러난 죄인과 드러나지 않은 죄인이 있을뿐 모두 죄인이라던 목사님의 지난주 말씀이 생각난다. 

나의 드러난 죄 드러나지 않은 죄를 주님께 고하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휴일 아침을 시작해야지. 

조금 더 부드럽게 거절하고, 조금 더 상처주는 방식으로 나를 내 감정을 보다듬게 하소서. 

나의 부정적 감정에 대해서 누군가에게 토로하기보다 상황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고자 노력하고 그것을 글로 기록해가면서 정리해보는 습관을 가질 수 있도록 제게 지혜와 성령충만함을 더하여 주세요. 예수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위급한 상황을 바라보는 2가지 시선이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탓 하는 유형, 나머지는 남탓하는 유형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유형에 속하십니까?



찬양: 주는 완전합니다

신우회 말씀: 잠언


인간은 실수 투성이다. 

이걸 인정하고 사는게 행복하다. 인간은 완벽할수없다. 

나도 실수 할 수 있고 타인도 실수할 수 있다. 




말의 실수가 없는 사람이 온전한 사람이다. 

자기가 옳다고 확신해서 타인에게 말로 화를내면 걷잡을 수가 없는 상황이 생긴다. 

다른사람 실수를 용납하지 못하는것에 대한 생각은 “나는 그런실수 안한다”는 전제가 있는데, 인간들은 결국 자신도 그러한 실수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과 마주하게 된다.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은 다 실수했다. 위대한 그 어떤사람도 실수 안한 사람이 없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큰 잘못을 두가지나 했다. 하나는 하나님 약속을 안 믿고 하갈통해 이스마엘 낳은 것, 그랄지역에 갔을 때 아비멜렉 왕에게 자기 아내를 내 누나라고 속인 것이다. 야곱도 형을 속이고 20년동안 도망자의 삶을 살았고, 다윗도 밧세바와 간음하고 그걸 숨기려고 우리아를 전쟁터에 보내고 죽게 했다. 성경은 결코 사람이 완전하고 온전해질수있다고 말하기 위해 쓰여진책이 아니다. 한계와 부족함과 죄를 서로 인정하면 오히려 그럴 때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를 구할수있다고 보여주기에 실수와 잘못에 대해 드러낸다. 

순교자 베드로도 예수님을 세번 부인했다.


1986년 챌린저호, 최초의 우주왕복선이었는데 발사되자마자 폭파되었고, 7명 전원사망했다. 
이때 미국대학에서 심리학교수가 설문조사를 했다. 챌린저호가 폭발한 장면을 어떻게 알게 되었나?
사람의 기억은 왜곡된다. 그대로 기억하는 사람이 10%였다. 90% 사람이 기억을 왜곡했다는 결과를 얻었다. 사람들은 기억은 상황에 따라 혹은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왜곡시킬 수 있다.
_열두발자국 중에서_


주님 보시기에 두가지 종류의 인간이 있다. 드러난 죄인과 드러나지 않은 죄인.

실수 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리스도인이냐 아니냐 갈라진다

성경 속에서 실수했던 모든 인물들은 회개했다

용서는 나를 위해 하는거고 화해는 그사람과 나의 관계를 위해 하는것이다

용서는 그사람 반응에 상관없이 내가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위해 하는거다 다시사는  re-born 의 결정적 방법이다.


그래미상 17번 받은 프로듀서, 릭 루빈 <창조적 행위>에는 '백지화 연습'이라는 부분이 나온다. 

내기준으로 다른사람을 보면 내맘에 안드는 사람 너무 많지만 그 기준을 하나님께 맡겨보면?

이기심과 경쟁심을 가지고 사람을 바라보면 악한것들이 나오지만 하나님 지혜를 따라살면 자비가 풍성해지고 편견과 위선이 없어진다. 


창세기에서 인간의 타락이 내 중심성에서 온다고 본다.

이 기준을 하나님으로 올리면….?


성령은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신다.

어떻게 기도할지 모를 때 성령이 우릴 위해 대신 기도해주고 우릴 위해 탄식한다.

성령이 오셔서 내 편견과 내중심성을 바꿔주지 않으면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없다.


"주여 나는 연약합니다. 나는 실수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바라봅니다" 이 찬양의 가사처럼 내 실수와 다른사람 실수가 눈에 크게 보일 때 이 찬양과 말씀으로 우리 맘이 더 넓어지고 다른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이 바뀌면 오히려 그게 내가 천국을 사는 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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