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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니의 지금라이프 Sep 06. 2024

에필로그) 무의식적 끌림 1

나는 왜 그에게 호감을 느꼈나?

*8년 전 소개팅 날, 남편에게 호감을 느꼈던 순간을 무의식 측면에서 해석한 글입니다.



코트만으로는 아직 버티기 힘든 2017년 1월의 어느 겨울날.


몇 번의 메시지를 주고 받은 끝에 소개팅 날짜를 잡았다. 나는 평소에는 쳐다보지도 않는 치마와 하나뿐인 코트를 꺼내들고 여자의 분위기를 한껏 풍기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약속 장소인 상수역으로 갔다. 


지하철에서 내려 첫 번째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 두 번째 에스컬레이터로 향하는 순간 화장실에서 막 나온 p를 봤다. 지인이 보내준 사진으로 본 기억이 있어 찰나이지만 그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눈썹을 덮다 못해 앞이 안보일 정도로 덥수룩한 바람 머리, 무릎도 골반도 아닌 그 사이 어딘가 어중간한 길이의 에스키모도 저리가라 할 털이 풍성한 모자가 달린 패딩, 옆구리와 팔 사이에 야무지게 껴있는 짧은 옆가방을 맨 그는 나보다 먼저 에스컬레이터에 올라탔다. 


내 몸은 자동 반응했다. 발걸음이 멈칫. 


'집에 갈까?' 


내 이상형과는 다른 그의 외적인 모습에 무의식적 반응들이 순식간에 올라왔다. 원시의 뇌는 비호감을 느끼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곧 의식이 개입하여 바로잡는다. 

'너 외모로 사람 판단하는 거 중요하게 생각 안 하잖아? 외모만 보고 결정하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항상 말하잖아.' 

그렇게 다시 발걸음을 떼고 p와 조금은 거리를 둔 채로 에스컬레이터에 올라탔다. 



우리는 상수역 2번출구에서 만났다. 지하철 에스컬레이터에서 찰나에 스캔한 그의 모습 그대로였다. 조금이라도 잘못 봤길 바랬던건가.

우리는 가벼운 인사를 나눈 후, 바비큐 플래터를 먹으러 가기로 한 골목으로 함께 걸어갔다. 


나는 그동안 소개팅을 할 때마다 일관적으로 해온 게 있다. 

'치마 입기', '구두 신기', '반묶음 하기'. 이유는 단순하다. 어떤 정보도 없는 상대 남자에게 가장 보편적으로 호감을 살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잘 보이려고 노력했는데 너는 옆가방에 패딩을 입고 나와?'

p에 대한 인상이 썩 좋지 않은 상태로 첫만남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식당에 도착해 자리를 잡았다. 정면으로 마주 앉아 p를 바라보았다. 

약간 마르고 선한 인상. 


그 때 내 머릿속은 호감있는 여성으로 보이기 위한 노력 반, p에 대한 탐색 반이었다. 

어쩌면 지하철 에스컬레이터에서 그의 모습을 먼저 본 게 다행일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았다면, 원시의 뇌가 작동할 때 의식이 바로잡을 틈도 없이 그가 나의 표정과 몸의 반응을 읽었을지도 모르니까. 




우리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화했다. 책 취향과 각자의 일상, 그리고 앞으로의 꿈, 비전까지 처음 만난 사람인게 무색하게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책 얘기로 대화가 길어졌다. 나는 영문학과라 그렇다 쳐도, 언론홍보학과인 p가 마담보바리를 읽었다는 사실은 의외였다. 

그 때, p에게 호감을 느꼈다. 


'마담 보바리를 읽었다니, 이 사람은 뭔가 다른 것 같아.'



나는 왜 이 포인트에서 p에게 호감을 느꼈을까? 


단순하게 생각하면, 책을 좋아하는 사람과는 대화가 잘 통할거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듯 하지만, 더 깊이 들어가면 나의 무의식적 신념과 연결지어 해석할 수 있다. 


[무의식에 대한 짧은 브리핑]

무의식이란 즉각적이고 순식간에 나오는 생각, 행동, 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의도 없이 이루어지는 건 아니다. 단지 의식 수준에 있는 내가 그 의도를 자각하지 못할 뿐이다. 

즉, p에게 느꼈던 그 '무의식적' 호감조차 무의식 차원에서는 어떤 의도가 있었다는 뜻이다.


나의 어떤 무의식적 신념이 마담보바리를 읽은 p에게 호감을 느끼게 만들었는지 보자. 


'마담 보바리를 읽었다니, 이 사람은 뭔가 다른 것 같아.' 이 문장 하나만 가지고도 인간의 많은 무의식적 신념과 욕구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놀라지 마시라)


*무의식을 파다보면 이런 생각까지 도달할 수 있구나 정도로 받아들이면 좋겠다



첫 번째, 자기 우월감 충족

마담보바리 같은 고전문학을 읽고 이해하는 일이 흔하지 않다고 여기며, 이를 통해 나는 남들과 다르다고 느끼는 신념이다. 쉽게 말해 마담보바리를 읽은 p를 특별하게 대접함으로써 그 가치를 알아보는 나에 대한 우월감을 충족시키는 것이다. 즉 그를 인정하는 행위 자체가 나를 인정하게 되는 일이다. 


두 번째, 동질감에 대한 갈망 

나와 비슷한 관심사나 취향을 가진 사람만이 나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신념이다. 취향이 비슷한 사람에게 호감을 느끼고 그 사람과 계속 함께하면서 동질감에 대한 갈망을 충족시킨다. 


세 번째, 인정 욕구 

내 지식이나 취향이 가치가 있다고 인정받고 싶어하는 무의식적 욕구이다. 나와 비슷한 취향을 가진 상대방에게 호감을 가짐으로써 내 선택과 관심사가 옳다는 인정을 받는 느낌을 충족시킨다. 



누군가에게 호감을 느끼는, 자연 발생적으로 보이는 감정조차 무의식 차원에서는 어떤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의도가 있는 프로세스일 수 있다.


한 사람이 어떤 포인트에서 어떤 생각과 판단 그리고 결정을 내렸는지, 단 하나의 사건만 보더라도 그 사람의 많은 면을 알 수 있다. 

무의식에 귀를 기울이다보면 단순히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통찰력도 뛰어나고 생각도 깊겠지. 그래서 호감을 느꼈겠지.' 하는 정도의 누구나 할 수 있는 표면적 수준의 생각을 넘어서 더욱 깊고 다면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p와의 소개팅에서 그에게 호감을 느꼈던 이유를 내 무의식적 신념 관점에서 풀어보았다. 

그 이유는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말 하나 가지고 너무 꼬리무는 거 아닌가? 호감을 느낀 포인트 그거 하나 가지고 너무 확대해석 하는거 아니야? 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무의식의 세계는 그만큼 복잡하고 다층적이다.


무의식이라는 세계는 그렇게 작동한다.

그래서 더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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