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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기 돌봄

루틴 5.5 _ 4

by 루메제니

스물다섯, 아직 엄마라는 역할을 맡기엔 이른 나이. 나는 친구들 중 가장 먼저 엄마가 되었다. 19평 전셋집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오래된 아파트라 단열이 잘되지 않았다. 보일러를 아무리 올려도 찬바람이 방을 감쌌다. 추운 공기가 여전히 기억나는 이유는 첫아이를 그 겨울에 출산했기 때문이다.


모든 출산 과정이 힘들지만, 나의 출산은 유난히 순탄치 않았다. "예정일이 3일 지났는데, 아직 아기가 내려올 기미가 보이지 않네요," 의사가 말했다. "열심히 걷기 운동도 하고 있는데..." 나는 답답한 마음으로 말했다. "아무래도 유도 분만이나 수술 날짜를 정해야겠어요." 배는 더 이상 불러 오를 수 없을 정도로 팽팽하게 커졌다. 25kg이나 늘어난 몸을 이끌고 뒤뚱뒤뚱 아파트 계단을 올랐다. 다음 날 새벽, 드디어 진통이 시작되었다. 병원으로 갔다. "오늘 아기를 만날 수 있겠어요."라고 의사는 말했다.


몇 시간 후... "선생님!! 산모님 자궁 문이 많이 열렸는데 아기가 내려오질 않아요!" 간호사가 외쳤다. 시간이 지날수록 진통은 격렬해졌다. 나의 몸은 아이를 맞이할 준비가 되었지만, 아기는 아직 세상을 마주할 준비가 되지 않았던 걸까. 순식간에 다섯 명의 간호사들로 둘러싸였다. 심각한 말들이 오갔다. 곧이어 몇몇 간호사들이 불룩한 배를 갈비뼈 부근에서 골반 쪽으로 힘껏 밀어냈다. 서로 엮은 팔이 마치 쇠사슬 같았다. 간호사들은 호흡을 맞춰 몸을 실어 무게를 더했다. 마찰과 압력으로 인해 나의 살과 뼈도 함께 짓눌렸다.


끊어진 필름처럼 드문드문 기억이 난다. 아이는 끝내 내려오지 못했고, 나는 수술실로 옮겨졌다. 언제 하반신 마취가 들어갔는지조차 기억이 없다. 마취가 퍼지고 고통이 사그라지면서 커다란 수술 조명이 눈에 들어왔다. 심장이 아래로 푹하고 떨어져 나간 줄 알았다. 짓눌렸던 장기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곧이어 아이의 우렁찬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이도 나도 살았구나.’


안도의 눈물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렀다. 그렇게 2010년 12월 말, 목숨만큼 소중한 첫아이가 탄생했다. 회복은 더뎠다. 갈비뼈 주위는 멍투성이였다. 몸은 엉망이었지만, 회복하면 될 일이었다. 아이는 천사 같았다. 폭풍 후 고요였다. 고통과 안도감, 기쁨이 오갔다. 그래서 차마 알 수 없었다. 엄마가 되는 일이 나의 정체성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을 일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아이와 함께 돌아온 집에서의 생활 루틴은 완전히 바뀌었다. 아기는 잘 먹고 소화하고 싸고 자는 단순한 루틴을 반복하며 성장했다. 나의 24시간은 온전히 아기의 생활 리듬에 맞춰 바뀌었다. 분유 먹이는 시간을 틈틈이 확인하느라, 잠을 자고 밥을 먹고 몸을 씻는 일도 과제처럼 느껴졌다. 샤워 후 멍하니 거울 속 내 모습을 보며 깊은 한 숨을 내쉬었다. 붉게 튼 살과 수술 흉터.. 출산의 과정을 겪어낸 몸은 이전과 같을 수 없었다.


마음도 그랬다. 이전에 자유롭고 활동적이었던 나의 모습은 더 이상 찾을 수 없었다. 나의 하루는 아침부터 밤까지 아이의 요구에 따라 흘러갔고,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출산 전의 나와 지금의 나 사이에 느껴지는 커다란 괴리감에 때때로 허무해졌다. 이전의 삶이 그리워질 때면, 나는 그저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그럼에도 마음은 행복하고 완벽한 가정을 꿈꾸고 있었다. 거울 속 내 현실은 그게 아닌데 나의 이상은 높았다.


누구나 정체성이 변할 때는 자존감이 낮아지는 구간을 만난다.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첫 직장을 시작할 때, 결혼을 하고 배우자가 될 때, 새로운 도전을 시작할 때... 유난히 공부를 잘하던 친구, 상사한테 이쁨도 받고 일을 잘하던 친구, 결혼 후에도 사회생활을 완벽하게 병행하는 친구들, 다둥이 부모로서도 능숙하게 가정을 꾸려나가는 사람들은 어찌나 많은지. SNS 속 완벽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좌절에 빠지곤 했다. 그 시기에는 그들 역시 우리와 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생각지도 못한다. 그저 엄마로서, 아내로서 부족함이 있을까 하는 마음에 많은 것을 해내려 애썼다. 있는 그대로 내 모습을 인정하고, 돌보는 시간의 부재가 점점 길어져만 가는지도 모르고 말이다. 그렇게 나는 아이를 잘 키우는 목표에 온 정신이 매몰되어 있었다. 내가 무엇을 좋아했는지, 어떤 일을 잘 했었는지는 생각나지 않았다. 나의 꿈, 관계, 커리어는 아마득히 멀어져 갔다. 아이와 생활하는 20평 공간과 유모차를 끌고 다닐 수 있는 동네가 나의 온 세상이 되어버렸다.


한참 후에야 나는 잃어버렸던 '나'를 찾기 위해 헤맸다. 아이를 돌보면서 점점 더 공허해지는 나 자신을 마주하며, 내가 없으면 아이에게도 온전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제야 알았다. 아이를 잘 돌보기 위해서는 나 자신이 먼저 중심에 서 있어야 한다는 것을. ‘엄마가 행복해야 아이도 행복하다’는 말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내 삶을 다시 세우는 중요한 깨달음이었다.


우리는 새로운 정체성을 받아들이면서 종종 자신을 잃어버리곤 한다. 첫 직장에 취업했을 때, 결혼을 할 때, 부모가 될 때, 우리는 새로운 역할에 매몰되어 정작 그 역할의 주인인 나를 잊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삶의 굴곡을 경험하면서 비로소 깨닫게 된다. 자신을 돌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그리고 자신을 돌봐야만 다른 이들에게도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다는 진리를 말이다. 나는 출산과 그 이후의 여정을 통해,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다시 태어난 듯한 각성하는 경험을 했다. 그 경험은 나에게 자기 돌봄의 필요성을 일깨워주었지만, 그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 깨달음조차도 삶이 주는 끝없는 배움의 일부였다. 삶은 여전히 나에게 새로운 가르침을 건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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