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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dame jenny Jul 07. 2024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라.   

박도하 소설[기연]

‘가족’이라는 공동체는 서로 사랑하는 두 남녀가 평생 동반자로 살고자 하는

인 서약에서부터 시작된다.


자식은 그 사랑의 결실이고 가족이라는 매듭으로 연결된다.


하지만 이 소설의 기연은 오히려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서 철저히 외롭게 ‘자아’가

소멸하고 있었다.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부모에게 내몰리듯 맺어진 가부장적이고

무뚝뚝한 남편, 유일한 사랑이었던 딸 ‘재연’은 어느 날 공감 능력 없고 이기적인 남편의 성향과

닮은 사윗감을 데려왔다.

본인이 끈질기게 버텨온 삶을 딸이 겪어갈 생각을 하니 무력감과 배신감마저 든다….

왜 하필 그런 남자와 결혼해야 하느냐는 불평에 딸은 “엄마는 사랑해 본 적도 없잖아!”라고 소리친다.

기연과 남편의 수십 년의 결혼 생활을 보아왔을 딸아이의 한마디는 극기 훈련과도 같이 버틴

결혼 생활에 대한 냉혹한 평가였을 것이다.


비수처럼 박혀버렸을 절망에도 불구하고 기연은 재연의 혼수이불을 고르기 위해 지치고 힘든

마음과 몸으로 시장을 돌아다닌다.

그러다가 딸아이와 같은 이름의 상호를 가진 이불집으로 우연히 들어간다.


그곳에서 만난 사장‘치수’는 그을린 이마의 땀과 긴 눈에 스치는 웃음, 해맑고 생기 있는 소년 같았다.

기연은 순간 설렘을 느낀다. 이불배달 때문에 치수와 같이 차를 타고 가게 된다.

트럭 안에서 우연히 듣게 된 로드 맥퀸의‘And to each season’의 가사를 따라 흥얼거리는 치수가

편안해지고 궁금해진다.

마치 한 번도 느껴본 적 없었을 연애의 감정처럼 말이다.

지독한 불면증으로 수면제 없이 견디기 힘든 그녀에게 치수는 잠이 잘 오는 이불 같았다.

마치 친구가 골라준 석양의 그림에서 느꼈던 것처럼 말이다.


치수와 묵게 되었던 모텔이라는 낯선 공간에서 뜻밖의 숙면을 하게 된 그녀는 잠을 자기 위해

탈출하듯 집을 떠나 홀로 숙박을 반복하게 된다.

그런 그녀의 행동이 의아해 보일 수도 있지만 결혼은 기연에게‘감옥’과도 같지 않았을까?

극복할 수 없는 불행한 본인의 결혼과 딸마저 그 실패를 반복할 것이라는 걱정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스스로 선택한 소심한 탈출이었다.

치수는 현지처인 어머니와 일 년에 겨우 한두 번 일본에서 오고 가버리는 아버지가 있었다.

부모의 애착 없이 외롭게 자란 그는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집착으로 힘든 아내 미옥과

두 아들 재연과 재석이 가족이다.


치수 또한 자신이 선택할 수 없었던 불우한 어린 시절로 상처가 많은 사람이었고 사랑받아보지

못한 까닭에 아내에게도 두 아들에게도 베풀어야 할 사랑의 방법을 몰랐다.

늘 데면데면 날카로운 아버지였고 아내를 외롭게 했던 남편이었다.

“나는 늘 누군가를 실망시키지….”라는 그의 독백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아들에 대한 집착으로 가득한 어머니 사이에서 있었을 좌절과 외로움이 묻어났다.


아내 미옥마저 이혼을 요구하고 그를 두고 사찰로 떠나버렸다.

그리고 어느 날 가장으로서 가족을 위해 정착하고자 붙들어왔던 가게가 화재로 전소되어 버렸다.

치수의 안타까운 절망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을 것이다.

자신을 묶어둔 매듭이 끊어져 버렸기에.


‘쉼 없이 피어오르는 불길과 연기는 일그러진 그의 얼굴과 같았다.

겉으로 웃고 있지만 공허하게 일그러뜨린 가슴속 검은 얼굴이 검붉게 뒤엉킨 불꽃과 연기 위로

고스란히 떠 올랐다. 아버지에게 원망의 말 한번 내뱉지 못한 시커먼 침묵 같았다.

제발 나를 좀 내버려 두라고 하루에도 몇 번씩 어머니에게 토해놓고 싶던 말이었다.

미옥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왜 벗어나고 싶은지, 다 늦게….’p105


치수를 향해 시뻘건 불기둥과 화력으로 달려드는 뜨거운 기운은 깊숙이 눌려 있던 응어리진 분노를

튀어나오게 함과 동시에 눈앞에서 사라지는 삶의 의미를 지키지 못하고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서사는 처절한 허무함과 안타까움이었다.


차갑고 언제든 떠나버릴 것 같은 아내에게 정착하지 못했던 치수는 기연의 상처 많은 모습에서

본인과 닮음을 느꼈고 스스로를 보듬듯 그녀를 보듬고 싶었을 것이다.

절망스러움을 고백하는 그에게 ‘아니다. 모두가 다 그렇다…. 모두 다….’라는 그녀의 말은  서로 깊은 아픔을 겪고 있다는 동질감과 안정감을 주었겠지….


한편 치수의 아내 미옥은 시어머니의 지독한 냉대와 무시로 남편의 관심과 사랑이 간절했지만,

감히 그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지 못했다.


“내가 아팠을 때, 그 사람은 없었어요. 내가 젊고 아름다웠을 때도 그 사람은 없었

어요.

아니 있었지요, 그 사람과 나 사이에는 그 사람의 엄마가 있었죠.

아세요? 시어머니가 얼마나 지긋지긋하게 나를 미워했는지. 집요하고 열렬하게….

p145

  

모른척할 수밖에 없었던 치수에게 사랑으로 보호받고 싶었으나 불가능했고 암으로라도 죽고 싶었지만

죽을 수도 없었던 미옥.

삶의 의미가 희미해질수록 깊어진 괴로움을 버리고 싶었지만, 스스로가 마음의 불구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 치료는 사랑만이 가능하다는 간절함만 있을 뿐 그녀를 사랑의 대상으로 받아줄 사람은 없다는

상실감으로 이혼을 결심했었다.


하지만 우연히 사찰에서 만난 혜순과의 대화를 통해 내려놓아야 함을 인정한다.

아내, 엄마라는 이미 엮어진 매듭은 죽음으로도 이혼으로도 끊어낼 수 없는 ‘인연’ 임을 알아차리는 순간

마음 안의 쌓아둔 묵은 응어리를 토해내듯 엉엉 울어버린다.

나는 그녀의 등을 쓸어주며 안아주고 싶었다.

우리는 보통 예측한다. 삶은 인과적으로 흐를 거라고....

과거는 힘들고 상처투성이여도 꿋꿋이 견디다 보면 괜찮을 거라는 믿음과 최선으로

미래의 행복을 소망한다.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각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박힌 ‘결핍’이라는 깊은 상처가 있다.


치수가 흥얼거리던 그 노랫말에 나오는 ‘어두움에 길을 잃고 헤매는 지친 생명들’

각자의 방식으로 온 힘을 다해 인내한다.

그러나 수많은 계절이 지나가고 빛나던 시절에도 행운조차도 가져보지도 못한 채

이미 나이 들어가고 있는 그들에게 ‘행복’이라는 소망은 찾아볼 수 없었다.

치수와 기연이 산책할 때 보이던 ‘웃고 있어도 울고 있는 것 같은 추한 노인들’은 가려지지 않는

불행으로 나도 저렇게 늙어가고 있는 것 같은 현실에 대한 거부감이었을 것이다.


니체는‘사람은 혼자일 때가 아닌 함께 있어도 외로울 때가 가장 고독하다.’라고 말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세상에 던져진 우리는 출발부터 우연한 관계의 시작이다.


자아가 형성되는 전후로 겪게 되는 다양한 경험으로 나는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자각, 자존감이 형성된다.


나의 가치는 나를 인정해 주고 사랑받는 마음에서 나를 가치 있는 사람으로 그 사랑은 다른 사람을

인정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소설 속 인물들의 관계는 서로에게 긁힌 상처로만 가득하다.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가정은 무시한 채 원하는 것만을 요구하다 보니

가장 다독여주어야 할 관계는 불편해졌다.

오히려 치수는 기연에게 미옥은 혜순에게 모두 우연히 만난 사람에게 위로받는다.

아마도 서로에게 원하는 욕망이 없으므로 상대를 향한 사심 없는 위로의 한 마디가

나만의 가치를 인정받은 듯한 위로가 되지 않았을까?

   

하지만 치수의 기연에 대한 마음도 기연의 수줍은 사랑 고백도 엉성한 매듭의 시작일 수 있음을

깨닫게 하는 것은 늘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를 알아차리는 마음이었다.


아프게 갈등하면서 살아온 시간 동안 가고 싶었던 마음의 방향은 같았을 것이다.

단지 시간을 맞추고 계획을 같이해야 같은 차에 탈 수 있다는 걸 몰랐을 뿐.

가장 안타까웠던 부분이지만 가장 공감되는 부분이었다.


기연이 현기증으로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생과 사의 순간이 아득해질 시점에 딸‘재연’의 임신 소식을

전화로 듣는다.

순간 그녀는 기쁨으로 미소를 짓는다.

비록 실망하기도 했지만, 그녀가 온통 사랑의 마음으로 대했던 유일한 존재인 딸에게

새로운 생명이 찾아왔다는 사실은 새로운 삶을 기대하는 위로이자 설렘이었을 것 같다.

그리고 앞으로 같은 엄마로서 서로의 마음을 공감하며 서로 위로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미옥도 가장 처절한 모습으로 망가진 치수를 아들과 함께 찾아 집으로 돌아왔다.

삶의 괴로움으로 지친 두 사람은 그제야 거울처럼 서로를 마주 볼 준비가 되어있어 보였다.

그녀가 자신을 스스로 다독이기 위해 수없이 읊었을 반야심경의 가르침처럼

괴로움을 벗어나 만족을 얻는 길은 공(空)에서 다시 시작함을 알아차리지 않았을까?


치수를 알기 위해 그를 지켜보는 관점을 소유하는 욕망에서 벗어나 서로 측은지심(惻隱之心)하는

마음으로 바라봐주기를…. 미옥 스스로 치수를 되찾아 두 사람의 단단하고 따뜻한 색깔의 매듭이

지어질 수 있기를 소망한다.


살아간다는 건 우리 스스로 채워가는 긴 시간의 서사다.

능동적일 수도 수동적일 수도 간단하기도 복잡하기도 하다.

만만치 않다. 내려놓는다, 비운다….


쉽게 말하지만 정작 끊임없는 욕망과 욕심 앞에서 진정하게 벗어난다 말할 수 있을까?

다만 바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할 수 있기를…. 알 수 있기를

나를, 우리를, 너를, 모두를.


아는 것만큼 보이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는 것만큼 보이는 것이다.     


https://youtu.be/jxyt5mAPYDc?si=KNxkvU31YTt4m96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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