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ies: Ren Hang Photographer
Stories: Ren Hang Photographer
자유를 선사하고 떠난 포토그래퍼
“자유는 원할 때 원하는 걸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를 선사하고 홀연히 떠나버린 포토그래퍼 렌항(Ren Hang). 그가 남긴 매혹적인 유산에 관한 이야기.
장담할 수 있다. 당신은 어떤 상황에서든 렌항의 작품을 알아챌 수 있을 것이라고. 단지 벌거벗은 육체와 검은 머리칼, 붉은 립스틱 때문만은 아니다. 그의 사진엔 분명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하지만 어렵지 않다. 왜냐하면 당신은 그것을 즉시 감지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단숨에 당신을 사로잡을 것이며, 오랫동안 뇌리에 남아있을 것이며, 먼 훗날 문득 당신을 도발하게 될 것이다. 지금 당장 카메라를 손에 쥐고 싶은 충동으로.
그것을 감상하는 일은 일종의 도킹(Docking)과도 같다. 광활한 우주 속을 유영하던 두 우주선이 극적으로 접촉해, 서로 간의 통로를 개방하고 연결되는 일처럼 말이다. 그리고 곧 그 통로를 통해 작품에 녹아든 감정들이 거침없이 침투된다. 그가 간절히 바라던 자유와 저항, 지금의 우리를 짓누르는 막연한 속박감까지 함께.
렌항의 작품은 소박하고 반항적이며 거칠다. 하지만 자연스럽고 유머러스하며 새롭다. 한때는 포르노에 가까운 수위로 비판도 받았었지만, 전혀. 그 속엔 치밀히 계산된 포즈와, 저속하지 않은 위트와, 모델과 작가 사이를 잇는 강력한 유대감이 있다.
그의 작품이 외설로 다가오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사진 속 인물들의 표정 때문이다. 프레임 속 얼굴들엔 감정이 없다. 마치 영혼이 달아난 몸들로 구성된 오브제처럼 느껴진다. 가장 단순한 재료인 인체로 상상할 수 없는 이미지를 만드는 일, 이것이 바로 렌항의 장기다.
ⓒedition.cnn.com, ⓒanothermag.com
날 것의 생동감과 젊음의 치열함, 원시적인 에로티시즘이 빈틈없이 배치된 그의 작품은 마치 극지의 백야처럼 생소한 체험으로 다가온다. 멋진 스튜디오와 모델, 복잡한 조명과 완벽한 보정은 아름다운 사진의 조건이 될 수 없음을. 필요한 건 오직 자신만의 비전뿐임을. 그렇게 렌항은 진정한 사진의 의미를 자신의 작품들로 몸소 증명하는 데에 전부를 걸었다.
전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던 렌항의 작품들. 하지만 그의 모국인 중국은 그를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다. 그의 웹페이지는 불시에 차단당하고, 전시회 마저 금지되었으며, 때로는 촬영 현장에 경찰이 들이닥치는 일도 있었다. 단지 누드가 자주 등장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런 무자비한 검열은 렌항의 마음의 큰 상처를 남겼고 그는 결국 중국을 떠나게 된다.
“우리는 누드로 태어났다. 나는 그저 자연 상태로 사진을 찍었을 뿐이다.”
이후 미국 뉴욕에 정착한 그는 드디어 활발한 작품 활동을 이어가기 시작한다. 여러 잡지와 패션 브랜드는 물론 이름만 들어도 알 법한 유명 갤러리들에서 전시 요청이 이어졌다. 그 영향은 곧 유럽 전역 뻗어나갈 정도로 대단했다. 보수적이었던 국가 밑에서 힘겹게 지탱해 오던 그의 예술혼이 비로소 자유를 누리게 된 것이다.
하지만 2017년 2월, 렌항은 극단적인 선택으로 생을 마감하고 만다. 그가 이전부터 심한 우울증에 시달려왔다는 주변의 증언도 있었지만, 그 근원엔 모국으로부터 거부당했다는 매정한 현실이 자리하고 있었을 터.
언론이 그의 죽음을 발표한 직후 SNS엔 온통 #renhang #rip로 가득했을 만큼, 이 안타까운 죽음에 대한 분노와 추모는 한동안 계속되었다. 이는 그가 떠나온 중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웨이보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주제가 ‘렌항 죽음’이었다는 통계는 고향에도 여전히 그를 그리워하는 팬들이 상당했음을 암시한다.
2015년, 렌항은 GUCCI와의 협업을 시작으로 럭셔리 패션계에 데뷔한다. 당시 GUCCI의 디렉터였던 알레산드로 미켈레(Alessandro Michele)가 인디 아티스트들을 육성하기 위해 시작한 #GUCCIgram 캠페인에 발탁된 것.
역시는 역시. 단번에 그의 작품임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확고한 스타일은 업계의 큰 주목을 이끌어냈다. 미켈레는 그의 사진을 두고 “인간의 신체와 자연의 풍경, 욕망의 대상을 가장 유쾌하고 혼란스러운 방식으로 결합해 컬렉션의 본질을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며 극찬했다.
화려한 첫 데뷔를 마친 렌항은 이후 유명 패션지의 화보와 표지를 맡아 진행하며 본격적인 패션계의 행보를 예고한다. Maison Kitsuné 와 TOTEM COLLECTIVE, 홍콩을 기반으로 한 브랜드 YAT PIT과의 캠페인 작업에서 목격된 렌항만의 분위기는 그동안의 패션계에선 찾아볼 수 없었던 독특한 무드다.
생소하지만 강렬한 동양의 빛깔, 간결하고 정확히 발사된 메시지들, 난해하고 객기 섞인 시도들을 거부하는 일관된 감성. 그가 예술과 패션의 경계에서 자신만의 독보적인 색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건, 까다롭기로 유명한 패션계가 기꺼이 그의 스타일을 인정하고 받아들여 주었기 때문이다. 신중하고 견고하게 쌓아 올린 대체 불가능한 그의 세계를 말이다.
중국 출신 아티스트 중 가장 유명한 현대 예술가 아이 웨이웨이(Ai Weiwei). 그는 타임지와의 인터뷰에서 렌항에 대해 이렇게 언급한다. “렌항은 중국적으로 성(性)을 해석합니다. 그 안엔 상실감과 슬픔이 서려있죠. 중국 문학이나 시에서 섹스는 불가능한 것에 관한 것이니까요. (중략) 그는 현재 중국의 젊은 아티스트들을 대표하는 인물이며, 그들의 작품은 오늘날 중국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미지는 신선하지만 공허하고 피상적입니다. 그 안에는 깊은 슬픔이 담겨 있어요.”
이 둘의 생애는 꽤나 닮은 점이 많다. 모두 세계적으로 인정받을 만한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었지만 모국의 천대를 견디지 못하고 해외로 뛰쳐나가 버린 케이스니까.
하지만 중국 정부를 대하는 둘의 방식은 확연히 다르다. 웨이웨이는 중국이 세상을 대하는 태도, 특히 예술을 대하는 태도를 비판하는 작품을 꾸준히 선보이며 세계적인 공감대를 이끌어 낸 반면, 렌항은 어떤 정치적인 제스처도 내비치지 않으며 묵묵히 자신만의 작업을 이어나갔다. 웨이웨이처럼 마오쩌둥의 초상화에 가운데 손가락을 날린 것도 아니었고, 그저 친했던 주변 인물들과 소소한 사진 작업을 진행한 게 전부였다. 공교롭게도 그가 추구한 이미지들이 전부 검열의 대상일 뿐이었던 것. 하지만 이 둘을 대하는 정부의 태도는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나는 중국에게 우리가 로봇이 아니라 생식기와 섹슈얼리티를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중국을 떠나온 렌항은 자신의 작업에 대해 이렇게 고백한다. 대체 중국의 아티스트들에게 자유란 어떤 의미였을까. 이 두 예술가의 생애만 보아도 자유는 그들에게 생과 직결되는 ‘필수 조건’이나 다름없어 보인다. 발상과 착상, 실행과 공개로 이어지는 창작의 프로세스는 외부의 검열 따위로 통제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게다가 그게 부당하다면 더더욱. 하지만 그 잔인한 시선은 여전히 중국의 공기를 지배하고 있다.
렌항은 사진뿐만 아니라 시에도 재능을 보였다. 그가 블로그에 꾸준히 기재해 온 글들은 친구의 도움으로 사후 출판되었고 여전히 그를 그리워하는 팬들의 마음에 심심한 위로가 되어주었다. 마지막으로 그의 시 한 편을 소개한다.
새들은 날다가 그냥 죽지 않는다 공중에서 죽은 떠다니는 박제처럼
鸟会不会飞着飞着就死了 死了就停在那里 像一只悬空的标本
사람은 걷다가 그냥 죽지 않는다 신호를 기다리다가 죽는다 죽어서도 여전히 서 있는 겨울에 죽은 나무처럼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人会不会走着走着就死了 在路口等红灯的时候就死了 死了还站在那里 像一棵树在冬天死了 也不会马上被人发现
당신에 대한 생각은 내겐 너무 큰 고통이다
想到你 我真的好痛苦
(2017년 1월, 렌항)
그가 감당해야 했던 현실의 무게는 아름답고 숭고한 고통이 되어 지금 여기, 여전히 남아있다.
Published by jentestore 젠테스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