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ies: First Date Outfits
Stories: First Date Outfits
첫 만남은 너무 어려워
첫 만남엔 어떤 옷을 입어야 할까. 섣불리 답을 내기 어려운 이 영원한 난제 앞에서 나는 불현듯 영화 <도쿄! (Tokyo!, 2008)>의 마지막 에피소드, 흔들리는 도쿄를 떠올린다.
나는 히키코모리다.
의미심장한 첫 대사. 주인공은 무려 10년 동안 단 한 번도 집 밖으로 나간 적이 없다. 오로지 돈과 전화, 이 둘 만으로 모든 걸 해결한다. 그렇다. 배달이다. 온갖 생필품은 물론 음식도 문제없다. 하지만 이런 그에게도 소소한 루틴은 있다. 바로 토요일마다 피자를 시켜 먹는 것이다.
초인종 소리가 들리면 문을 열어주고, 배달원이 들어서고, 피자박스가 시야에 불쑥 나타나면, 박스 위에 돈을 올려둔다. 액수를 확인한 배달원은 돈을 챙기고 그는 음식을 얻는다. 배달원과는 절대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지난 10년 동안 한결 같이 지켜온 철칙이다. “원래 그렇게 사람 얼굴을 안 보나요?” 매주 보던 배달원이 던진 간만의 물음에도 그는 아무런 대답이 없다.
하지만 이 재미난 인생은 그를 결코 내버려 두지 않는다. 토요일이 되자 어김없이 또 피자를 주문한 주인공. 초인종, 문, 배달원, 돈. 하지만 이번엔 뭔가 다르다. 시야에 불쑥 나타난 피자박스 밑으로 배달원이 입은 가터벨트 달린 청바지가 그의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이내 홀린 듯, 고개를 치켜든다. 이윽고 둘의 눈이 마주친다.
무려 10년 만이다. 10년 만에 첫 눈맞춤이다. 헬멧을 쓴 젊은 여자가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 그는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모르고... 그때 지진이라도 난 듯 집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영화를 보는 우린 즉시 알아챈다. 이 원인 모를 흔들림은 마치 요동치는 주인공의 심장과도 같다는 걸. 그 떨림과 전율이 고스란히 체감될 정도로, 격렬히 흔들리는, 도쿄의 모습.
그러니까 이 둘의 첫 만남은 오직 가터벨트가 달린 청바지 덕분에 실현된 것이다. 10년 동안 올곧이 버틴 집념의 히키코모리도 정신이 번쩍 들게 할 정도라니. 대체 착장이 가진 힘은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그렇게 영화는 전혀 의외의 포인트에서 옷이 가진 위력적인 면모를 드러낸다. 때문에 나는 첫 만남에 어떤 옷을 입어야 할까, 라는 질문에 가장 먼저 이 작품을 떠올리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자, 그렇다면 이제 대답을 해야 할 차례다.
나의 대답은 제목 그대로다. 임팩트 있는 한 방. 하지만 그 임팩트라는 게 참, 사람마다 천차만별로 다가오는 미묘한 느낌인지라 뭐라 단정 짓고 설명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제대로만 발휘된다면 상대가 기필코 꽂히게 되는 그런 극적인 효과를 기대해 볼 수 있으니, 이 부분은 반드시 각자의 연구가 필요하다. 아마 모두가 다 다르겠지만 나는 이런 임팩트가 대부분 의외성에서 발현된다고 생각한다. 그냥 평범한 줄만 알았던 배달원의 스트레이트 데님에 저런 귀여운 가터벨트가 달려 있다니! 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이런 임팩트를 화려하고 튀는 형태와 혼동해서는 안된다. 너무 트렌디한 것도 마찬가지다. 웨스턴 코어가 주목받고 있다고 해서, 소개팅 자리에 미국 서부에서 갓 귀국한 카우보이가 떡 하니 등장하면 무척 곤란하니까. 이런 복장들은 임팩트를 주기는커녕 오히려 본래 이미지까지 지워버리는 역효과를 가져온다. 개인의 내밀한 취향은 충분히 친해진 뒤에 서서히 보여주어도 늦지 않다.
생각해 보면 내게 강한 인상을 주었던 의외의 착장, 즉 임팩트함은 대부분 액세서리에서 온다. 직업상 엄청 포멀한 정장 차림이 필수인데 백팩은 무척 스트릿 하다거나, 무심하게 멘 크로스백 끝에 엄청 귀여운 키링이 달려있다거나, 무채색 일색인 착장에 매우 컬러풀한 풋웨어를 신었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간혹 다른 측면으로 거센 임팩트를 날리는 사례도 있다. 평소 이름 정도만 알고 지내던 W와 극적으로 맘이 닿아 첫 데이트를 하게 된 날이었다. 나는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카페에 도착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화이트 린넨 팬츠에 짙은 브라운 피케 셔츠로 멋을 부린 아름다운 모습의 W가 나타났다. 얼마나 설렜는지.
그러나 곧 상상치도 못한 전개가 닥쳤다. 다음 코스로 향하기 위해 카페 밖을 나선 우린 따스한 햇살에 감탄하며 행복감을 만끽하고 있었는데, 무심코 옮긴 시야 안으로 감자기 두툼한 고양이 한 마리가 쑥 들어왔다. 응? 아니다. 고양이가 아니다. 세상에. 그건 화이트 팬츠 뒤쪽으로 선명하게 비치는 그의 언더웨어... 였다. 당황한 난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고, 얼룩말과 호피 그 중간쯤의 정체 모를 동물 가죽 패턴이 그의 걸음에 맞춰 신나게 들썩이는 걸 막연히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미안. 난 잘못한 게 하나도 없는데 사과가 절로 튀어나왔다. 카페 안이 너무 어두워서 전혀 몰랐어.
만약 당신이라면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나갈 것인가. 다행히도 항시 구비하고 다니던 내 카디건으로 급한 불은 껐지만, 그토록 고대하던 우리의 첫 만남은 엉망진창이 되어버렸고 그는 도망치듯 집으로 사라졌다. 그렇다. 첫 만남은 절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투모로우바이투게더의 노래가 이토록 많은 사랑을 받는 데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물론 실력도 멜로디도 좋지만, 근 5년 간 이렇게 공감가는 가사는 처음이었으니까.
니트를 입은 사람은 뭔가 부드러워 보여. 안경을 쓴 사람은 왠지 똑똑해 보여. 셔츠를 입은 사람은 무척 성실해 보여. 이외에도 옷차림으로부터 파생되는 고정관념은 한도 끝도 없다. 물론 훗날 이 모든 게 하나도 쓸모없다는 걸 여실히 깨닫게 되는 때가 오긴 하지만 첫 만남에서 만큼은 예외다. 오히려 이런 고정관념들을 한껏 활용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 때니까.
처음 J를 만났을 때도 그랬다. 물론 그의 인상과 목소리, 눈빛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그가 입은 그레이빛 니트가 높은 호감도에 한몫한 것도 틀림없다. 확실히 니트는 포근한 안정감으로 첫 만남의 긴장감을 희석시키는 힘이 있다. 왠지 무슨 말이라도 다 들어줄 것만 같은 인자한 분위기에, 온화하고, 듬직하고… 최소 몇 년은 봐야 알 수 있는 그런 요소들이 아이템 하나 만으로 적잖이 실현됨이 놀라울 따름이다.
셔츠도 마찬가지다. 나는 특히 박시한 재킷 스타일의 셔츠와 스트릿 브랜드에서 자주 보이는 반팔 셔츠에 극호인데, 이 두 아이템이 품는 장난스럽고 자유로운 분위기에 끌린다. 칼 각 잡힌 셔츠가 주는 성실한 이미지와는 정반대지만, 대신 아직 동심이 살아있는 것만 같은 순수한 느낌을 풍기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이 셔츠를 입고 등장한 사람들과는 취미가 통했다. 밴드 음악을 좋아하는 것도, 그래서 공연장에 일부러 찾아가는 것도, 가끔은 귀여운 동물들의 영상을 보며 히죽거리는 것도, 때론 멀리멀리 훌쩍 떠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우리가 첫 만남의 복장에 있어 고민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자신을 너무 드러내서도, 반면에 자신을 너무 감추어서도 안되는 이 애매한 기준을 만족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사이엔 암묵적인 가이드라인이 있다. 반바지는 안돼. 츄리닝도 안돼. 슬리퍼도 안돼. 너무 화려한 것도 너무 프리한 것도 안돼. 그렇다고 너무 포멀해도 부담스러워. 그럼 대체 어떻게 하라는 건지. 따지고 보면 하지 말라는 것들 투성이다.
이처럼 맹목적인 규제 안에선 강렬한 반발심을 품은 이들이 반드시 생기기 마련이다. 그들은 목표는 기존의 틀을 깨고 새로운 방식을 추구하는 것. 패션 취향이 꽤나 독특하셔서 그날그날 착장샷을 단톡방에 올리면 구성원 모두의 야유를 받는 내 친구 P군처럼 말이다.
서로가 진정한 인연이라면 옷이라는 껍데기 따위에 현혹되진 않겠지. 소개팅을 앞둔 어느 날의 P군은 우리의 사려깊은 충고를 무시하고 자신의 신념을 고수하기로 다짐한다. 하지만 민소매는 좀 아니지 않니, 모든 친구들이 P군의 의상 선택을 말렸지만 그는 기어코 슬리브리스를 입고 약속의 장소로 나갔다는 전언을 남겼다. 그렇다면 결과는?
우리는 P군의 참혹한 패배를 확신했다. 왜냐하면 상황 보고를 하기 위해 우리 앞에 나타난 그의 옷자락에서 글리터 별 장식 수십개가 반짝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야, 가끔은 제발 네가 입고 싶은 대로 입지 마.
우리는 상대의 착장을 통해 무수한 정보를 유추한다. 종종 틀리기도 하지만 때론 놀라운 싱크로율을 보여주기도 하니 도통 무시할 수가 없다. 어차피 밑져야 본전. 당신에게 설레는 첫 만남이 예정되어 있다면 이 기회를 빌어 특정 아이템이 가진 고정된 이미지를 적극 이용해 보자. 서로를 본격적으로 알아가기 전, 자신의 취향과 장점을 어필할 수 있는 좋은 무기가 되어줄 테니.
Published by jentestore 젠테스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