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ies: Trompe-l'oeil
Stories: Trompe-l'oeil
패션이 당신을 속이는 법
이런 속임수라면 기꺼이 속고 싶다. 위트와 볼거리로 무장한 상상력이 가득한 패션 세계.
아이러니와 유머.
좋은 작품에는 늘 이 두 가지가 있다. 영화도 드라마도 그림도 패션도.
두 눈을 부릅뜨고 패션계를 지켜보는 소비자 중 한 명인 에디터가 흥미롭게 보는 트렌드는 바로 초현실주의 예술의 표현 기법인 트롱프뢰유(Trompe-l'oeil)! 이는 ‘속이다’는 의미의 ‘trompe’와 ‘눈’이라는 의미의 ‘oeil’이 합쳐진 프랑스어로 ‘눈속임’이라는 뜻이다. 미술에서는 실제 같은 세밀한 묘사로 착각하게 하는 것이 그 특징인데, 통상적으로 착각 혹은 착시를 일컫는 단어로도 사용되고 있다.
좋은 작품에는 반전도 있는 법이다. 진짠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그림이었다? 인류는 늘 이런 의외성을 좋아했다. 트롱프뢰유라는 단어가 존재하지도 않았던 기원전부터 존재했던 이 기법은 현대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했는데, 그중에서는 화가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가 대표적인 작가다. 그가 상상을 현실로 불러오는 독특한 방식은 일상적인 대상을 새로운 시선으로 보게 하는 과정에서 초현실적 경험을 가능케 한다.
트롱프뢰유가 보여주는 즐거운 ‘눈속임’ 효과는 패션 세계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초현실주의 예술가와 어울리며 패션계에 트롱프뢰유 기법을 최초로 도입한 디자이너가 있었으니, 바로 엘사 스키아파렐리(Elsa Schiaparelli)다.
1927년, 실제 리본이 달린 듯한 디자인의 검은색 니트웨어를 내놓으며 단숨에 명성을 얻게 된 그녀는 1930년대 코코 샤넬(Coco Chanel)과 함께 패션계를 주름잡았다. 트롱프뢰유를 대표하는 패션 디자인으로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숱한 브랜드들에 영향을 미쳐왔다.
스키아파렐리의 영향을 받은 두 디자이너를 꼽자면 장 폴 고티에(Jean Paul Gaultier)와 마틴 마르지엘라(Martin Margiela)가 있다. 1990년대와 2000년대 두 디자이너는 해체주의에 기반한 강렬한 트롱프뢰유 패션을 선보였다. 장 폴 고티에는 인체를 그려낸 프린팅으로 눈이 즐거운 착시 효과를 보여줬고, 마르지엘라 역시 옷 사진을 프린트하고, 더 나아가 부티크에도 트롱프뢰유 기법이 담긴 인테리어를 선보였다.
최근 런웨이를 장식한 쇼를 보며 깨달았다. 트롱프뢰유 기법을 활용하지 않는 브랜드를 찾는 게 더 힘들다는걸. 그중 PRADA의 2025 SS 남성 컬렉션이 대표적이다.
미우치아 프라다(Miuccia Prada)와 라프 시몬스(Raf Simons)는 ‘가짜’ 셔츠와 ‘가짜’ 스카프 그리고 ‘가짜’ 벨트를 연달아 선보였다. 멀리서 보면 의심조차 들지 않을 정도로 각각의 피스 같지만, 자세히 보면 하나의 옷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두 아이템을 결합해 하나로 보여주는 것도 트롱프뢰유의 예시다.
PRADA가 트롱프뢰유를 적극 활용한 데는 어떤 철학이 담겨있었을까? 이에 대한 답이 쇼 노트에 있었다.
상상의 세계에서 현실이 갖는 힘. 미우치아 프라다와 라프 시몬스의 2025 SS 남성복 컬렉션은 진실과 가식, 현실과 비현실에 대한 현대적 개념에 대한 담론을 제시한다. (..) 멀리서 보면 디테일이 단순해 보일 수 있지만, 가까이서 보면 인식이 변하게 되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불완전함이야말로 현실에서 살아있다는 또 다른 증거니까. (prada.com 발췌)
정리해 보자면, 현실과 환상, 그 경계 속에서 온전한 실체를 파악하는 방법은 가까이에서 관찰해야 한다는 것.
무엇보다 트롱프뢰유 패션의 진정한 묘미는 얼마나 감상자를 속일 수 있느냐에 있다. 그러니 사실적인 디테일 묘사가 핵심. 발전한 프린팅 기술 덕분에 트롱프뢰유 디테일을 더욱 ‘진짜’처럼 표현하기 쉬워진 시대다. 이는 COMME des GARCONS Homme Plus 2024 SS의 레이어링한 듯한 재킷에서도 드러난다. 레이 가와쿠보(Rei Kawakubo)는 “새로운 세상을 찾으려면 현실을 넘어야 한다.”라며 이 컬렉션을 통해 테일러링의 관습적인 현실을 보여주고자 원단을 왜곡하여 보여주고 싶었다고 밝히기도 하였다.
학창 시절 교복 입기 싫어서 와이셔츠를 잘라서 입었던 에디터. 그때부터 지금까지 패션으로 눈속임을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다. 다만 이제는 목표가 다르다. 그때는 매서운 학주 선생님의 눈을 속이기 위해서였다면 지금은 오로지 룩의 위트를 더하기 위해서다. OTTOLINGER 2024 SS 넥타이 프린트 탑은 그때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데님은 디지털 프린트를 사용하여 적극적으로 트롱프뢰유 기법을 도입한 아이템이다.
그 이유는 꽤 다양하고도 설득력 있다. 먼저 데님은 한 벌 제작하는데 물이 7,000리터가 든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심각한 환경 문제를 야기한다. 게다가 제대로 된 데님을 만드는 데는 품도 많이 든다. 디자이너가 원하는 워싱이 나오기까지 원단을 선택하고 그 원단에 맞는 워싱 테스트를 보는 그 과정에서 수많은 공정이 필요하기 때문. 디지털 프린팅은 이 모든 과정에서 자유롭다. 일정한 워싱과 디테일을 만들 수 있을뿐더러 멀리서 보면 당연히 데님이라고 예상할 수 있는 아이템을 전혀 다른 소재로 만드는 착시 효과를 줄 수도 있어 재밌기도 하다.
이러한 장점을 적극 활용한 OUR LEGACY는 손수 찾은 빈티지를 스캔 후 인쇄해 프린트 데님을 창조해 냈다. 데님의 자연스러운 워싱이나 주름, 스티치 모두 제대로 표현을 해냈으니, 이 정도면 실제 데님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
Acne Studios와 Y/PROJECT 모두 데님에 진심인 브랜드다. 이들 모두 보이는 그대로 데님 같지만, 자세히 보면 정교하게 프린트된 코튼 소재에 텍스처를 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새 옷을 샀는데 아무도 알아봐 주지 않는 일만큼 슬픈 일은 없다. 다행히도(!) 최근 러닝을 위해 구매한 Satisfy의 디지털 데님 팬츠는 모두의 주목을 받았다. 러닝과 데님이라는 이 이질적이고도 엉뚱한 조합! 누군가를 속이고 싶은 장난기가 발동했을 때 도전해 보길 추천한다.
데님을 오래 입었을 때 생기는 휘스커와 워싱을 레더에 공정을 거쳐 표현한 424. 코튼 소재보다 더욱 시크한 무드를 자아낸다.
누가 봐도 트렌치코트인데 알고 보면 백이고, 그냥 종이 신발 박스 같은데 만져 보면 가죽으로 만들어졌다고? 이것들은 뎀나 바잘리아(Demna Gvasalia) 특유의 위트 있는 아이러니가 드러나는 BALENCIAGA의 제품이다. 이 아이템은 가지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일상의 소소한 예술 작품이 되어줄 거라 장담한다.
패션은 당신을 속인다. 때때로.
심각한 환경 문제, 여전한 전쟁, 치솟는 물가. 불확실성만이 확실한 지금 시대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현실에서 벗어난 초현실, 환상을 갈망한다. 디자이너들이 ‘눈속임’, 트롱프뢰유를 내세운 컬렉션을 선보이는 이유도 같은 맥락에 있다.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니, 사물을 인식하는 방식을 재고하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 다만 그 방식이 꼭 진지할 필요는 없는 법이다. 각자의 아이러니와 유머를 적극 활용해 그저 스쳐 지나갈 수 있었던 순간을 한 번 더 돌아보게 만든다. 거기서 오는 진득한 여운이야말로 우리가 계속 트롱프뢰유 아이템에 끌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아닐까.
Published by jentestore 젠테스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