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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계정 Oct 22. 2021

찬란하게 빛나는

 “꿈이 있으세요? 실례되는 질문이었다면 죄송합니다.”


 어느 여름날 유기견 보호소에 봉사하러 가서 만난 사람이 내게 물었다. 꿈에 대해서 대답하기 전 잠시 생각을 하고 있는데, 곧바로 사과했다. 어쩌면 그는 꿈에 대해 질문이 부적절하거나 곤란을 야기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짧았던 쉬는 시간이 끝나고 다시 일을 해야 했다. 강아지들을 씻기고 함께 놀아주고 후원물품을 정리하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훌쩍 흘렀고 결국 그가 물었던 꿈에 대해서 답하지 못했다.


 꿈에 대한 질문은 때로 상대방을 곤란하게 만든다. 꿈을 이루기 어려운 상황이거나 꿈에 대해 생각해본 지 오래되었거나 지금은 꿈이 없을 수도 있거나 스스로 품은 꿈이 너무도 거대해 타인에게 말하기 부끄러울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잠깐 있을 어색한 순간을 넘어서면 즐거운 대화가 시작된다. 대부분 사람은 자기 꿈에 대해 열정과 순수를 가지고 이야기한다. 서로의 꿈을 공유한 우리는 전쟁에서 중요한 기밀을 공유한 전우처럼 한걸음 가까워진다.


 한국에 있을 때보다 파리에 있으면서 다양한 사람과 만날 기회가 많았다. 아무래도 만남을 찾아 나서지 않으면 공통점이 있는 사람과 만나다 보니 한국에서는 출판이나 요리, 제과, 영화와 관련하거나 나이대가 비슷한 친구를 많이 만났다. 파리에서는 다른 분야에서 일하는 한국인을 만나더라도 엄청나게 큰 공통점이 있다. 바로 국적, 그리고 언어. 그러다 보니 제과는 물론 미술, 음악, 건축, 패션 등등 다양한 분야를 공부하러 파리에 온 친구를 만났다. 그들 모두 이곳에 온 각자의 이유, 야망, 목표, 그리고 꿈이 있었다.


 건축계의 노벨상이라는 프리츠커 상을 타고 싶은 건축학도 친구, 미슐랭 별 세 개를 받은 레스토랑에서 군인처럼 쉬지 않고 일을 해보고 싶다는 친구, 제주도에서 해녀로 물질을 하면서 채집한 해산물을 요리해 직접 만든 도자기에 올려 팔고 싶다는 친구, 내가 만난 무수히 많은 형태의 꿈. 그 꿈들은 맑은 물처럼 그 어떤 형태로도 변할 수 있다. 자신을 담는 그릇에 따라 형태를 바꾸는 물처럼 각기 다른 개인이라는 틀 속에서 거기에 맞춰 변하는 꿈을 보는 게 흥미롭다.




 제과점에서 일할 때, 10년 동안 변호사를 하다가 어린 시절 꿈이었던 파티시에가 되기 위해 퇴사를 한 친구가 있었다. 직업을 바꾸기 전에 직접 체험해보기 위해 내가 일하던 제과점에 온 것이다. 그녀와 함께 산더미처럼 쌓인 그릇을 설거지하고 몸보다 훨씬 큰 쓰레기봉투를 치우고 거대한 솥에 12kg이 넘는 산딸기 퓨레를 끓이곤 했다. 손을 바삐 움직이는 와중에 우리는 노동요를 부르듯 대화를 나눴다. 그녀는 사무실에서 앉아 일하다가 제과점에서 서서 일하려니 힘들다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조만간 다시 변호사로 돌아가야겠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직업 체험 마지막 날 그녀는 힘들긴 했지만 이 일이 참 재미있었고 제과 학교에 입학해 제대로 배워보고 싶다고 말했다. 


 2000년도에 태어난 밀레니엄 베이비라고 불렸을 한 친구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프랑스에 바로 왔다. 그녀는 제과와 요리를 프랑스에서 배우고 한국에서 자기 가게를 여는 꿈을 갖고 있다. 프랑스어도 영어도 거의 못했지만 가서 배우면 된다는 정신으로 도전했다. 사기를 당하기도 하고 언어가 통하지 않아 불편하기도 했지만 누구보다 당당했다. 작은 부엌에서 김치를 담가 친구들에게 나눠 주고 맛있는 요리를 만들면 집에 초대해 함께 먹었다. 제과 학교를 마치고 현재는 한국에서 인턴을 하다가 곧 다시 프랑스에 와서 요리를 배울 예정. 차곡차곡 꿈을 위해 경험을 쌓는 모습이 멋진 친구.


 부모님이 결사반대를 뚫고 다니던 디자인 회사를 퇴사하고 순수미술을 다시 배우러 온 친구도 있었다. 지금이 아니면 평생 다시 못할 것 같아 후회하기 싫어 파리에 왔다고 했다. 평일에는 학교를 다니고 밤이나 주말에 아르바이트를 했다. 산업디자인보다 순수미술을 하면 금전적으로 더 어려울 것이며 나중에 다시 그쪽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고 멋쩍게 웃으면서도 이곳에 온 선택에 후회는 없다고 말했다. 캔버스에 아크릴 물감을 덧칠하고 또 덧칠할 때 가장 행복하다는 친구를 보면서 그가 그리는 미래도 그 그림처럼 밝게 빛나길 빌었다.




 나 역시 소설가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 소설을 쓴다. 소설을 쓰는 과정은 이야기를 전개시키지 못해 답답하고 문장을 다듬으며 압박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대체로 즐겁다. 창조한 인물과 대화하고 그 인물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나는 위로를 받는다. 그리고 내가 받는 위로를 다른 사람과 나누고 싶다는 꿈을 꾼다. 모든 일에는 기쁨과 슬픔이 있을 것이고 소설 쓰기는 기쁨 쪽에 가깝다.

 하지만 때로는 두렵다. 내가 쓰는 단어와 문장이 아무 의미 없는 일이면 어떡하지. 평생 아무도 읽어주지 않을 소설을 쓰다가 세상을 떠나는 건 아닐까. 이런 두려움은 내게만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림을 그리는 화가, 연주회를 준비하는 바이올리니스트, 임용고시를 앞둔 응시생, 취업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취준생까지.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지금이 타버린 재처럼 바스러져 사라질까 하는 두려움.


 몸이 눈사람처럼 녹아버릴 듯 뜨거웠던 여름날 소설 초고를 끝내고 문득 그 두려움이 엄습했다. 지금 먼 이국 땅에서 무의미한 일을 하고 있다는, 시간이 무거운 납이 된 듯 나를 누르는 기분. 선풍기 범위에서 벗어나면 땀이 뻘뻘 흐르는 더위였지만 나갈 준비를 마치고 오베르 쉬르 우아즈로 떠났다. 빈센트 반 고흐가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마을. 그가 좌절과 절망 속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마을. 그와 그의 동생이 함께 묻혀있는 마을.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는 해가 작렬하 듯 내리쬐고 있었다. 공기가 너무 뜨거워 바깥인데도 한증막에 들어간 것처럼 눅진했다. 마을 야트막한 언덕에 위치한 공동묘지로 향했다. 죽을 때까지 그림을 딱 한 점 팔았던 화가를 만나기 위해, 예술가적인 삶을 살았지만 끝내 예술가라고 인정받지 못했던 그를 만나기 위해.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 아래 빈센트 반 고흐의 무덤은 그 자리를 담담히 지키고 있었다.



 반 고흐는 내게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안겨주는 존재다. 생전에 2000여 점 넘는 그림을 그리고도 결국 화가로서 인정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내가 소설을 아무리 쓴다고 해도 그처럼 성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지 않을까 하는 절망. 하지만 그가 그린 그림들은 세상에 남아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다. 그가 붓으로 표현한 사람과 풍경은 관람자 감정에 호소하는 고함 같은 것을 담고 있다. 그 고함 소리는 사람을 사로잡았다. 빈센트 반 고흐의 장례식에는 단 스무 명만 참석했지만, 현재는 그가 그린 그림을 보기 위해 오르세 미술관에 한 해에 천만 명 이상이 방문한다.


 담쟁이로 덮인 반 고흐의 무덤 앞에 앉아 있으니 두려움도 차차 잦아졌다. 그리고 담쟁이넝쿨 사이로 보이는 작은 해바라기 한 송이. 그를 추모하고 기억하기 위해 놓인 그 꽃 한 송이는 나에게도 희망을 전해주었다. 포기하지 않고 소설을 쓴다면, 언젠가 내 소설이 다른 사람과 소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얼마 전 우연히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라는 영화를 봤다. 현대판 반 고흐라는 인상을 받았다. 비비안 마이어는 생전에 15만 장이 넘는 사진을 찍었다. 하지만 생전에 그 누구도 그녀가 사진작가를 꿈꾸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녀는 평생 다른 집 아이들을 돌보는 유모였다. 자기 집도 갖지 못해 늘 유모로 일하는 집에 얹혀살았다. 작은 마을에서 아무와도 대화하지 못해 늘 혼잣말을 하다가 쓸쓸하게 죽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후 골동품 경매장에 나온 엄청난 규모의 필름 통을 풍속 연구를 위해 한 남자가 구매했다. 그 남자는 시카고 풍속 연구를 사진을 인화하다가 비비안 마이어가 찍은 사진의 예술성에 감동해 그녀를 알리고자 마음먹는다. 그가 비비안 마이어에 대한 영화를 찍은 이유는 미술관에서 생전에 작가가 아닌 마이어의 사진 전시를 거부하기 때문이었다.


 마이어의 사진에는 대상에 대한 애정이 담겨있다. 화면을 구성하는 능력, 대상에 대한 공감이 뛰어난 작가였다. 그녀가 찍은 아이들이나 거리 사람들 사진을 보고 있으면 왜인지 마음이 찌르르 울린다. 아마 그건 그녀의 재능이겠지.


 사실 그녀가 사진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는 게 밝혀지는 순간이 가장 슬펐다. 감독이 추적 끝에 발견한 한 마을 사진관으로 그녀가 보낸 편지에는 뚜렷이 명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사진을 인화해 사진작가로서 활동하고 싶다는 두근거리고 설레는 기대가 진하게 배어있다. 꿈을 꾸는 한 사람으로서 그 편지에 담긴 부끄러움과 설렘 그리고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마이어 주위에 그 누구도 그녀가 사진작가를 꿈꾼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 사실이 너무도 슬펐다.


 영화가 끝나고 구글에 그녀 이름을 검색했다. 과연 영화 이후에 전시회를 열게 되었을까. 그리고 찾아온 소름 돋는 경험. 검색 첫 번째로 뜬 링크에 들어갔다. 링크 끝에 프랑스를 뜻하는 fr.이 쓰여있었다. 자세히 보니 뤽상부르 공원 미술관 사이트였다. 무슨 일일까. 거기선 비비안 마이어 전시가 열릴 예정이었다. 영화를 본 그날 바로 다음 날부터. 비비안 마이어의 단독 전시가 뤽상부르 공원 미술관에서 열리다니! 내 일처럼 기뻤다. 입장권을 당장 예약하고 전시를 보러 갔다. 그녀가 삶을 바라보는 시선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빈센트 반 고흐와 비비안 마이어. 두 사람은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다. 평생에 걸친 2,000여 점의 그림과 15만 장이 넘는 사진은 그들이 가졌던 꿈에 대한 열정의 또 다른 표현일 것이다. 만약 생전에 그들 꿈을 응원하고 함께 나아갈 동지가 있었다면 더욱 행복하게 살지 않았을까. 두 사람을 보며 내가 나아갈 길에 대한 용기와 희망을 얻고 동시에 내 주변에 꿈을 좇는 이들을 돌아보게 된다. 때로는 그들을 응원하고 때로는 그들에게 응원을 받고 함께 꿈을 향해 가야겠다고 다짐한다. 서로가 꿈을 포기하지 않기를 바란다. 즐거울 때도 있고 힘들 때도 있지만 우리는 우리가 꾸는 꿈속에서 가장 찬란히 빛을 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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