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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계정 Oct 23. 2021

소설가적인 삶

 소설가적이라는 형용사는 애매모호하다. 세상에 소설가는 한 명만 존재하지 않는다. 소설이 탄생한 이래로 소설가는 셀 수 없이 많이 존재했다. 그 각자 자기만의 개성을 가질 것이다. 토니 모리슨적인 삶과 무라카미 하루키적인 삶, 그리고 황정은적인 삶은 다르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소설을 썼고, 소설을 쓰기 위해 각자 나름의 소설가적인 삶의 태도를 견지했다.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일상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다. 스쳐가고 바스러지고 무너지는 것들을 응시해야 한다. 그러한 관조에서 비롯된 공감, 연민, 동조 또는 반대가 소설 속 문장과 이야기로 피어난다. 피어난 문장과 이야기를 잘 가꾸어 완성된 소설로 개화시키기까지 더 많은 바라봄의 시간이 쌓여야 한다.


 소설가적인 것과 소설가인 것은 다르다. 전자는 삶을 대하는 태도이고, 후자는 직업이다. 소설가적인 것은 소설가인 것보다 더 넓은 범위를 포괄한다. 소설가라는 직업을 갖지 않더라도 소설가적으로 살아갈 수는 있다.


 어쩌면 나는 소설가가 되기보다 소설가적으로 살아가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세상을 바라보며 살고 싶다. 내가 알지 못하는 것들을 알아가고 싶다. 제과에 익숙지 않았던 재료를 활용한 디저트, 이전까지 와는 다른 방식으로 사유하는 철학가의 글, 독특한 화성을 사용해 전개하는 바흐의 푸가 연주 같은 새로움을 놓치고 싶지 않다. 일상생활에 지쳐 고개가 숙여질지라도 다시금 얼굴을 들어 이 살아가는 세상을 똑바로 응시하고 싶다.


 여기에 쓰인 글들은 소설이 아니다. 일상에서 마주한 풍경에 대한 생각 토막들이다. 오늘도 집 가는 길에 만난 여러 풍경을 돌이켜 본다. 노란 조명이 가득한 센 강 둔치에 앉아 서로를 바라보는 연인들, 쌀쌀한 날씨에 지하철에서 나오는 온풍구 위에 모여 누운 부랑자들, 전쟁에 희생된 이름 없는 희생자에게 바쳐진 꽃들. 그 존재들이 품고 있는 사상, 열정, 기대, 마음속 외침을 받아들이려 노력한다. 여전히 부족하고 미숙하지만 대상을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 그 노력이야말로 내가 가진 소설가적인 시선이 아닐까.


 소설가적인 삶. 여전히 명확하지 않은 표현이지만 내게는 꼭 지켜나가고 싶은 목표이며 세상이 들려주는 울림을 기록하겠다는 다짐이다. 그러한 날이 오기를 꿈꾸며, 언젠가는 스스로 만족할 만한 글을 써낼 수 있으리라고 믿으며, 노트를 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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