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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계정 Oct 30. 2021

켈리(2)

단편소설

 기술만능주의 만세. 시뮬라크르 만세. 최고다. 상상이든 실제든 영상이든 눈앞에 있든 다 상관없다. 중요한 건 단 하나. 내가 켈리와 프랭키가 나누는 사랑을 제법 선명하게 볼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일주일에 한 번씩 올라가 배터리를 교환해주기만 하면 되었다. 두 사람이 서로를 원하는 마음은 사육제의 모닥불 마냥 타올랐고 밤마다 뜨거운 향연을 열었다. 나는 그 모든 걸 놓치지 않고 볼 수 있었다. 아니 어쩌면 나는 그 둘 보다 더 가까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 컴퓨터 화면에선 두 명의 켈리와 두 명의 프랭키가 섹스하고 있었다. 아, 얼마나 행복한 밤이었는지. 두 사람이 격하게 사랑을 나눌수록 내 희열도 점점 더 뜨거워졌다.


 나는 더 이상 그들 사랑 없이는 살 수 없어.


 열락(悅樂) 속에 보낸 밤이 영원하길 바랐건만.


 여느 때처럼 몸을 섞고 난 후였지만 왜인지 분위기가 이상했다. 프랭키 표정 어딘가가 어두워보였다. 그는 옷을 주섬주섬 주워 입으며 말을 꺼냈다.

 “데이트 비용 때문에 걱정돼.”

 “프랭키, 걱정할 필요 없다니까. 진심이야.”

 켈리가 말했다. 같은 주제에 대해 여러 번 말했는지, 지겹다는 목소리였다.

 “네가 좋아하는 걸 사주지 못하는 내 자신을 볼 때 자괴감이 들어. 심지어 맥스에 가도 난 가격이 부담스럽다고. 넌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내겐 너만 있으면 돼. 그저 너라서 좋은 거야, 프랭키.”

 “그래도 위축되고 소심 해지는 걸.”

 “그럴 필요 없어. 가난한 게 네 잘못은 아니잖아.”

 켈리가 침대에서 일어나 프랭키 어깨에 손을 얹었다. 프랭키는 그 손을 뿌리쳤다.

 “가난? 내가 가난하다고 했어? 난 가난하지 않아, 켈리. 그저 검소하고 평범한 필리피노일 뿐이지. 네가 사치스럽고 돈을 펑펑 쓰는 거라고.”

 그는 마음에 묻어두었던 말을 쏟아냈다. 아마 그렇게 말하려고 했던 건 아닐 텐데. 금세 후회 가득한 표정이었다. 이미 뱉어 버린 말을 취소할 순 없었지만.

 “뭐?”

 켈리의 목소리가 차갑게 식었다.

 “미안해. 그런 뜻이 아니었어.”

 이제 켈리가 공격할 차례. 켈리도 정제되지 않은 날카로운 표현으로 프랭키의 마음에 상처를 줬다. 프랭키도 한동안은 참고 듣다가 점차 언성이 높아졌다.


 두 사람은 당장에라도 헤어질 것 같았다. 카메라를 통해 내게 전해지는 영상에서 두 사람은 혐오스러운 물건을 바라보듯 서로를 보고 있었다. 왜 싸우고들 그래. 그러다 너네 헤어지기라도 하면 나는 어떡하라고. 당장에라도 달려가 그들을 말리고 싶었다.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가면 두 사람은 어떻게 반응할까.


 한참을 싸우다가 어느 순간 켈리가 울음을 터뜨렸다. 우연이었을까. 그녀는 내 줌렌즈 카메라 앞에 서있었다. 코끝이 빨개지고 미간이 찌그러지고 눈동자에 눈물이 맺히는 모습이 내게 생생히 보였다. 켈리는 주저앉아 펑펑 울었다. 어쩜 우는 것도 저렇게 예쁠까. 켈리가 눈물을 보이자 프랭키의 마음도 누그러졌다. 그가 다가가 그녀를 안았다. 그녀는 그 품속에서 한참을 울었다. 그리곤 두 사람은 자연법칙에 순응해 하나로 합쳐지는 행성처럼 포개져 다시 한번 사랑을 나눴다. 


 위기는 넘겼지만 그 후 두 사람은 며칠 동안 만나지 않았다. 프랭키는 카페 일이 끝나면 곧바로 집으로 돌아갔고 켈리는 집에 틀어 박혀 있었다. 나는 초조했다. 정신적으로 피폐해져 갔다. 사랑이 내게 주던 단비가 사라지자 마음은 삭막하게 말라버렸다. 매일 밤 찾아오는 악몽. 식은땀에 축축한 겨드랑이와 사타구니. 우기도 아닌데 왜 이렇게 비는 많이 오는 거야. 끊임없이 쏟아지는 비는 내 삶을 더욱 꿉꿉하고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켈리가 밖으로 나오질 않으니 배터리를 교체할 수도 없었다. 더 이상 카메라는 내게 영상을 보내오지 않았다. 답답했다.


 일주일 내내 비가 쏟아지고 나서야 해가 나왔다. 고작 일주일 뿐이었는데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계속 비가 온 것처럼 느껴졌다. 몸 구석구석 이끼라도 낀 듯 불쾌했다. 내가 햇볕을 바랐던 적이 있던가.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내 몸은 태양을 간절히 원한다. 밝고 강한 빛에 내 몸을 쪼이고 싶다. 밖으로 나가야 한다. 한걸음 내딛을 때마다 몸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바깥은 빛의 세계였다. 파란 하늘에 새하얀 구름이 떠있었다. 필리핀답지 않게 공기가 상쾌했다. 어디선가 이름 모를 새가 노래했다. 사람들은 여기저기 모여 밝게 웃으며 떠들었다. 아마 한동안 나누지 못한 대화를 몰아서 나누고 있을 터였다. 나도 덩달아 기분이 설렜다. 왜인지 좋은 예감이 들었다. 이런 날씨라면 켈리와 프랭키가 화해할 수 있겠지.


 수영장에서 아이들이 소리 지르고 물을 첨벙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봄의 요정들이 조잘대는 것처럼 여겨졌다. 평소였다면 시끄럽다고 구시렁댔을 테지만, 오늘은 켈리와 프랭키가 다시 만날 날이라 마음이 너그러웠다. 요정의 노래에 홀리듯 나는 수영장 쪽으로 향했다. 수영장엔 단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팔과 다리에 난 흉터를 남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으니까. 물론 뚱뚱하고 혐오스러운 내 몸뚱이를 비웃음거리로 만들 생각도 없고. 맑은 날씨인 만큼 수영장엔 사람이 많이 있었다. 햇빛이 필요했던 건 나 혼자만이 아니었다. 선베드에는 옷을 홀딱 벗은 여자와 남자들이 누워서 몸을 태우고 있었다. 익숙한 몸매가 보였다. 카메라 너머로 수없이 봐온 켈리의 몸이었다. 반가웠다. 드디어 나왔구나, 켈리. 이제 프랭키를 만나러 가려는 거야? 화해하고 다시 사랑을 시작해야지.


 그런데.

 켈리 곁엔 다른 남자가 있었다. 키가 훤칠하고 잘생긴 남자였다. 켈리처럼 북유럽 계통의 외모를 지녔고, 몸은 오랜 시간 공들여 태웠는지 고급 초콜릿처럼 진한 갈색이었다. 남자는 한눈에 봐도 비싸 보이는 수영복을 입고 있었다. 환하게 웃는 얼굴엔 기품 있게 주름이 지어졌다. 남자는 코코넛 오일을 바른 끈적끈적한 손으로 켈리의 허리, 등, 다리를 마사지했다.


 뭐야, 켈리. 프랭키는 어떻게 하고. 내 사랑은 어쩔 건데. 아니야, 어쩌면 형제일지도 모른다. 오빠나 동생인 게 분명했다. 켈리와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 걸 보니 확실했다.


 켈리가 몸을 돌리고선 남자의 입술에 키스했다. 공주가 용을 물리친 기사에게 입을 맞추듯이. 켈리와 남자의 혀가 뒤엉켰다. 한동안 두 사람은 타인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서로만을 탐했다. 나는 그 광경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쳐다봤다. 혹시 내 심장이 뛰진 않을까, 심장이 뛰고 내게 관념적 오르가즘만 선사해줄 수 있다면 거렁뱅이 필리피노 따위는 더 이상 필요 없으니까. 그래, 좀 더 강하게 서로를 원해봐. 너희들의 사랑을 내게 보여줘. 하지만 두 사람의 사랑은 어디에도 닿지 못한다. 내 심장은 평소대로 울려댈 뿐이다. 내게 필요한 건 켈리와 프랭키다. 켈리의 사랑도 프랭키의 사랑도 아닌 두 사람의 사랑만이 나를 구원할 것이다.


 키스를 마친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대화를 나누는 걸 뒤로 하고 난 켈리의 집으로 달렸다. 배터리를 갈아야 했다. 상황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파악해야 했다. 배터리를 바꾸고 집으로 돌아와 컴퓨터를 켜고 화면을 주시했다. 얼마 있지 않아 켈리와 그 남자가 방으로 들어왔다. 켈리, 저 미친년. 켈리는 그물처럼 생긴 원피스를 벗어던지며 남자에게 키스했다. 남자도 이에 질세라 셔츠를 벗었다. 초콜릿 갈색에 탄탄한 몸이 드러났다. 켈리의 큼직한 가슴과 탄력 있는 엉덩이에 남자가 키스를 퍼부었다. 그녀 입에서 옅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욕망이 가득 찬 남자의 눈동자도 보였다. 내게 그 모습은 역겨울 뿐이었다. 나는 카메라 종료 버튼을 눌렀다. 화면은 꺼졌고 검은 바탕에 내 얼굴이 비추었다. 충족하지 못한 욕망에 일그러진 추한 내 얼굴이.


 나는 한참을 울었다. 실연당하면 이런 기분일까. 주변 사물 하나하나가 내가 누렸던 행복을 떠올리게 했고, 동시에 내가 사랑을 상실했단 사실을 재확인해주었다. 한숨을 내쉴 때마다 울음도 터져 나왔다. 나는 돼지처럼 꺽꺽 대며 울었다. 켈리와 프랭키의 사랑, 내가 사랑했던 감정, 그 감정이 내게 주었던 쾌감, 이제 그 모든 게 사라지고 없다. 


 이렇게 끝낼 순 없어. 프랭키에게 부탁해보자. 켈리에게 사과하라고. 그리고 지금 켈리 집에 찾아온 불한당 같은 놈을 쫓아내고 네 자리를 찾으라고. 그리고 내게 사랑을 돌려달라고.


 프랭키는 카페에 있었다.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까. 나는 언제나처럼 라떼를 주문했다. What’s your name? Kelly. 켈리라는 말을 듣자 프랭키는 반사적으로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 모습에 용기를 얻어 나는 말을 꺼냈다.

 “켈리가 다른 남자를 만나고 있어. 당장 그녀에게 가봐.”

 그는 어이없다는 듯 나를 쳐다봤다. 그리고 인상을 있는 대로 찌푸렸다.

 “믿기진 않겠지만 나는 네가 켈리와 사귀고 있다는 걸 알아. 매일 카페에서 지켜봐 왔거든. 너도 사실 날 기억하잖아. 켈리, 제니, 아니 아무것도 아닌 애. 어쨌든 난 너희가 서로 사랑한다는 사실을 안다고. 너는 켈리를 사랑해. 켈리도 너를 사랑하고. 어서 가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을 거야. 얼른 켈리에게 가봐.”

 프랭키는 내 말의 무게를 재 듯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당장 켈리한테 가라니까.”

 “뭐라는 거야, 돼지 같은 년이.”

 프랭키의 말에 나는 경악했다. 

 “믿기지 않겠지만 사실이야. 지금쯤 사랑을 나누고 있을 걸?”

 나는 제발 내 말을 믿어달라는 듯 애원하며 말했다. 프랭키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카페에서 나가지 않으면 경찰을 부르겠어.”

 그가 차분히 말한 후 욕을 내뱉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하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나는 너희를 지켜봤어. 매일같이. 믿기지 않으면 우리 집으로 와. 사진을 보여줄 테니.”

 나는 문을 쾅 닫고 카페를 나갔다. 찍어둔 사진을 모아 두고 침대에 앉아 프랭키를 기다렸지만 그는 오지 않았다. 다음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악몽을 꾸는 시간이 길어지기 시작했고 나는 불행했다. 거울을 볼 때마다 울컥 솟아오르는 역겨운 감정들은 나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이대로는 살 수가 없어. 켈리와 프랭키를 다시 봐야만 했다. 켈리는 노랑머리 남자와 만나는 시간이 많아졌고 겁이 많은 가난한 프랭키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카페에서 일을 했다. 겁쟁이 새끼.


 며칠을 감기로 고생하고 나는 피폐해졌다. 심장이 쪼그라드는 듯 쿡쿡 쑤셔왔다. 침대 위에 흩어져있는 켈리와 프랭키의 사진을 보아도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았다. 죽어가는 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만 했다.


 쿵. 쿵. 쿵. 나는 켈리의 집 문을 두들겼다. 이렇게 해야만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잠옷을 걸친 켈리가 고개를 내밀었다.

 “누구세요.”

 “켈리.”

 켈리는 켈리를 바라봤다.

 “누구?”

 “아랫집 손님인데. 할 말이 있어.”

 켈리는 살짝 열린 문을 꽉 잡은 채 이야기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뚱땡이 추녀를 보니 겁을 먹을 수도 있겠지. 

 “지금은 조금 피곤해서. 나중에 오세요.”

 켈리가 귀찮다는 듯이 문을 닫으려고 하자 나는 재빨리 그 틈 사이로 손을 집어넣었다.

 “뭐 하는 거야? 경찰을 부를까?”

 “프랭키! 프랭키랑 다시 만나. 그에게 가서 사과하라고.”

 나는 켈리에게 명령하듯 말했다. 켈리는 미간을 찡그리더니 휴- 하고 한숨 쉬었다.

 “그 애가 시킨 거니? 걔한테 이런 친구가 있었는지 몰랐네.”

 “프랭키를 조금 이해해줘. 너무 사랑하니까 그랬겠지. 그는 너와는 다른 환경에서 태어났어. 너 같은 부자와 만나면 위축이 될 수밖에 없겠지. 너는 너무 잘 나서 이해 못하겠지만 그 역시도 가난한 자신에 혐오감이 들었을 거야. 너를 만나면서 더욱이. 너에게 맛있는 밥 한 끼를 대접하려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죽도록 일을 해야 한다고. 그러니 제발 이해를 해줘. 네가 먼저 사과를 해. 미안하다고. 서로 맞추면서 살면 또 살아갈 수 있다고.”

 나는 인생 최고의 용기를 내어 진심으로 그녀를 설득하려고 했다.

 그런데 돌아오는 답은,

 “그래서 내가 잘못하게 뭐지? 내가 부자로 태어난 게 죄야?”

 “결국 돈 때문이구나. 너 돈 따위의 이유로 프랭키와 다시 만나지 않는다면 저주를 받을 거야. 천하의 나쁜 계집애야.”

 “이 돼지 같은 년은 누구야.”

 켈리의 뒤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순간적으로 머리에 스친 생각은 프랭키가 일을 하고 있는 카페 위층에 위치한 공구가게. 끝없이 정렬되어 있는 연장들. 누구나 손쉽게 구매할 수 있는 전기톱, 렌치, 드릴, 망치, 그리고 큼지막한 내손에 딱 맞는 손도끼. 그래 손도끼가 좋겠어. 나는 무작정 공구가게로 걸었다.


 저 남자만 없다면. 켈리를 만나고 있는 저 남자를 죽여 버리겠어. 저 남자가 사라진다면 켈리와 프랭키는 다시 사랑을 하겠지. 그래. 문제는 등장하지 말아야 했던 저 남자야.


 나는 구매한 손도끼를 가방에 넣어두고 집 앞 공원에 앉아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 해야 노랑머리를 처단할 수 있을까. 우선 켈리가 밖에 나가기를 기다리자. 그리고 그녀의 집 전화로 노랑머리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거는 거야. 나는 켈리의 친구인데 그녀가 아프니 당장 와 병원으로 데려가라고. 그리고 벽장에 숨어 있는 거야. 켈리 어디 있어. 켈리. 그녀를 찾는 노랑머리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나는 벽장에서 뛰쳐나가 그놈의 목을 찍어버리겠어. 기막힌 계획! 그렇다면 시체는?


 “이런 돼지 년을 죽이면 시체를 처리하는데도 참 힘들겠다.”

 “토막 내서 파인애플이랑 같이 묻어. 그럼 시체가 잘 썩는다던데.”

 “어휴. 파인애플이 얼마나 필요한 거야.”

 아하하하하. 남자들의 웃음소리. 뭐가 그리 우스운지.


 필리핀에서 파인애플은 얼마든지 싼 가격에 구할 수 있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도청장치를 켜고 사냥을 앞둔 들개처럼 때를 기다렸다.   

  

 마치 신의 계시라도 되는 것처럼 모든 것이 완벽한 날이었다. 부활절을 맞은 필리핀의 도로는 무척 조용했고 아파트를 지키는 가드마저도 이 순간만큼은 긴장감을 놓은 채 친구들과 잡담을 하며 여유를 즐겼다. 아파트의 대부분 사람들은 고향으로 돌아갔고 집에 남은 사람들은 저마다 십자가와 꽃다발을 방안에 차려 놓은 채 기도를 하며 예수님의 부활을 기도했다. 동네의 식당, 마트, 커피숍은 모두 문을 닫았고 프랭키 역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부활절 주에는 켈리는 엄마의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나는 켈리의 집에 집주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들어갔다. 라벤더 색 소파 바로 옆에 전화기가 있었다. 나는 소파에 걸터앉아 전화 목록을 살폈다. 역시, 전화 목록에는 놈의 번호가 있었다. 소파에서는 달콤한 코코넛 향이 났다. 아, 사랑스러운 켈리는 늘 이 자리에 앉아 프랭키와 사랑을 속삭였겠지. 주체할 시간이 없었다. 나는 놈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는 켈리 친구인데 지금 그녀가 너무 아파. 부활절이라 택시도 잡히지 않고 큰일이네. 남자친구를 불러달라고 해서 전화를 했어. 당장 이곳으로 와주겠어?”

 나는 다급하게 말하곤 바로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켈리의 옷장으로 비집고 들어가 몸을 숨겼다.

 아무리 기다려도 놈은 오지 않았다. 작은 곳에서 몸을 숨기고 있으니 숨도 찼고 다리도 아팠다. 다시 전화를 걸어야 할까 생각하는 순간 문이 열리고 발소리가 들렸다.


 왔구나.

 그런데 들리는 켈리와 프랭키 두 사람의 목소리. 

 “켈리. 나는 아직 너를 사랑하고 있어. 나는 비겁했어. 당당하게 맞서지 못하고 괜스레 너에게 화냈던 거야. 이제는 당당하게 너를 사랑하고 싶어. 더 이상 주눅 들지 않고. 너를 사랑하는 마음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으니까.”

 “프랭키.”

 프랭키의 용감한 고백. 감동받은 목소리의 켈리. 나는 벽장에 쥐 죽은 듯 숨어 이를 엿들었다. 미치도록 뛰어대는 심장소리가 그들에게 들릴까 두려웠다. 

 “그런데 묻고 싶은 것이 있어. 너도 나를 사랑해?”

 “프랭키. 물론이지. 너를 사랑해.”

 두 사람의 진한 포옹 그리고 이어지는 키스. 둘은 다시 행복한 커플로 돌아가게 된 것일까. 

 “나가서 뭐라도 사 먹을까.”

 프랭키가 웃으며 말했다. 예전의 그처럼 다정하고 따뜻한 목소리로.

 “어차피 가게 문도 다 닫았잖아. 딱히 배가 고프지도 않고.”

 “마닐라 베이에 있는 아드리아티코라는 가게가 있어. 스테이크를 잘하는 곳인데 너와 함께 꼭 가고 싶었거든.”

 “아드리아티코? 오 프랭키. 무리하지 않아도 돼. 그냥 우리 집에 있으면서 순간을 즐기자. 그렇게 하고 싶어.”

 “그래. 켈리 네가 원한다면.”

 다시 찾아온 침묵.

 “스테이크 정도는 사줄 수 있어.”

 “나쁜 의도로 말한 건 아니야.”

 “돈이 있고 능력이 되니까 가자고 한 거야.”

 켈리가 프랭키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장난스럽게 웃더니 창밖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필리핀은 부활절에 가게들이 문을 다 닫는 것이 신기해. 이 날에 여는 가게가 있으면 손님이 몰려들어 돈을 많이 벌 텐데 말이야. 그치? 내가 주인이라면 오늘 가게 문을 꼭 열거야.”

 “그날만큼은 돈 보다 신에 대한 기도를 중요하게 생각할 수도 있지. 우리 필리피노 사람들은.”

 “그래, 필리피노 사람들은 참 특이해.”

 또다시 침묵.

 “네가 사랑하는 나도 필리피노이고.”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켈리의 목소리가 앙칼지게 변했다.

 “너는 말할 때마다 필리핀을 은근하게 무시하는 것 같아.”

 “지적할만한 것을 지적했을 뿐이야.”

 “세상에 완벽한 사람들이 어디 있겠어. 다만 나라마다 문화가 다른 것이지.”

 “돈 없는 후진국 사람들은 늘 그렇게 말하더라. 문화 차이.”

 프랭키의 얼굴이 붉어졌다. 

 “켈리. 너도 잘난 것 하나 없는 여자잖아.”

 “뭐라고?”

 “네가 바람피운 것 다 알고 있어.”

 “맙소사. 날 미행했니? 얼마 전에는 뚱뚱한 여자애가 날 찾아왔어. 너랑 다시 만나라면서.”

 “그 남자랑 잤지. 나와 헤어지지도 않았으면서.”

 “구질구질해. 역겨워, 정말.”

 “너 같은 여자애들은 원래 그렇게 골이 빈 창녀처럼 행동하니.”

 사랑한다며 다시 시작하자고 약속을 하던 두 사람이 왜 서로에게 모욕적인 이야기를 퍼부을까. 나는 손도끼를 꼭 쥔 채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뭐라고? 당장 우리 집에서 나가. 이래서 엄마가 가난한 애들은 만나면 안 된다고 그랬지. 내가 조금 만나줬다고 네가 뭐라도 되는 것 같아? 착각하지 마. 넌 아무리 일해도 돈 없는 깜둥이 일 뿐이야. 평생 그렇게 남의 커피나 타면서 살아. 꺼져버려. 다시는 보지 말자.”

 켈리가 현관문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이성을 잃은 프랭키는 의자를 들고 켈리에게 다가갔다. 프랭키가 의자를 휘둘렀고,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켈리는 그 자리에서 고꾸라졌다. 프랭키는 분노가 풀리지 않는다는 듯 쓰러진 켈리를 바라보며 식식거리더니 부엌으로 가 식칼을 꺼내 들었다. 그에게 그만하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나는 돌처럼 굳어 손가락 하나 까딱 할 수 없었다.

 “이 남자 저 남자 만나면서 몸이나 섞는 더러운 년이. 네가 언제까지 대단할 수 있는지 보자.”

 프랭키는 켈리의 중지, 약지, 검지를 차례대로 잘라냈다. 다시는 켈리가 사진처럼 실제 같은 그림을 그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나 세밀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손가락이 사라졌으니까. 내 손가락이 잘리는 듯 찌르르한 아픔이 느껴졌다. 쨍그랑. 그리고 나는 도끼를 놓쳐버렸다. 내 배에 눌려 있던 벽장의 문이 스르르 열렸다. 프랭키가 나를 바라봤고 나 역시 멍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프랭키는 더 이상 프랭키가 아니었다. 광기에 사로잡힌 무서운 존재. 울려 퍼지는 무서운 남자들의 웃음소리. 프랭키가 초점이 흐릿한 눈으로 다가왔다. 그가 칼을 휘둘렀다. 날카로운 칼날이 내 팔뚝을 베었다. 추운 겨울의 그날처럼. 나는 온 힘을 다해 그를 밀쳐내고 집 밖으로 간신히 도망쳐 나왔다. 엘리베이터는 1층에 있었다. 기다린다면 잡히겠지. 나는 욱신거리는 팔뚝을 붙잡고 비상구 쪽으로 달렸다. 프랭키는 내 뒤를 바짝 쫓았다. 두려워. 나는 코끼리만큼 두꺼운 다리를 움직이며 그에게서 도망쳤다. 아래로. 아래로.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멈추지 않았다. 코끝에서 맴도는 켈리의 피 비린내. 어쩌면 내 피 냄새일지도.     


다시 태어난다면,

나는 아랍 왕국의 공주이다. 수많은 왕자들이 내게 청혼을 하지만 나는 어릴 적부터 친하게 지내온 단짝 친구와 결혼을 할 거야. 아니, 나는 아름다운 외모만으로 엄청난 인기를 끈 할리우드의 슈퍼스타. 잘생긴 남자 배우들은 나와 같은 작품을 할 수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 테지. 나는 모든 남자들을 뒤로하고 단 한 사람과 섬으로 들어가 살 거야. 흠. 적당하게 예쁜 여자로 태어나 괜찮은 회사를 다니는 남자와 결혼을 하고 평범하지만 그 삶 속에서도 행복을 느끼는 사람으로 태어날래. 아니지, 예쁘다는 소리를 못 들어 봤지만 못생겼다는 소리도 듣지 않은 그런 소녀여도 좋아. 평범한 대학을 졸업하고 일반 회사를 다녀 소소하게 월급을 받는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한다. 지극히도 평범한 여자로 태어나 삶을 살아간다. 그래, 어쩌면 다시 태어나는 것이 좋을지도 몰라.     

 폐가 점점 부어올라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가슴에 칼이 박힌 듯 숨이 쉬어지질 않았다. 칼에 스친 팔뚝은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웠다. 팔뚝에서는 검붉은 피가 바닥으로 툭툭 떨어졌다. 속이 메스꺼웠다. 눈꺼풀이 무거워졌고 시야는 점점 흐릿해졌다. 더 이상 뛸 수 없어. 포기하려는 순간 멀리서 어렴풋이 반짝이는 비상구 초록 불빛이 보였다.

 죽고 싶지 않아. 다시 한번 파란 하늘을 볼 수만 있다면. 아름다운 파란 하늘을 보며 살아 있음에 감사할 텐데. 나는 살고 싶었다. 마닐라 밤거리의 들뜬 소란스러움, 수영장에 모여 떠드는 아이들, 동정 어린 시선으로 나를 보는 시선, 매일 아침 몸을 적시는 식은땀, 뚱뚱하고 역겨운 못생긴 켈리, 내 모습까지 평소엔 그토록 혐오스러웠던 것들이 왜 지금에 와서야 간절하게 보고 싶은 걸까. 난 살고 싶었다. 파란 하늘에 닿기 위해 나는 달리고 또 달렸다.





                                                        모지후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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