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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점록 May 03. 2023

수애당, 전통의 아름다움을 만나다.

타임머신을 타다

  계절의 여왕 5월의 끝자락에 우리 가족은 모처럼 나들이에 나섰습니다. 마치 푸른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녹음이 그 푸르름을 한껏 뽐내는 풍경입니다. 맞벌이를 하는 아내가 늦둥이를 출산하고 휴직 중이었습니다. 그래서 처음 떠나는 여행이라 달뜬 표정이 역력합니다. 6개월만의 외출이니 당연지사 그럴만하다고 여깁니다.


  여름을 재촉하는 비가 대지를 강하게 적시고 있었습니다. 우리 가족은 조상들의 숨결이 살아 숨 쉬는 경북 안동으로 향했습니다. 지친 심신을 쉴 장소로 안동에 자리한 '수애당(水涯堂)'을 선택했습니다. 아니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수애당이 우리를 부른 것이지요. 아내가 몇 개월 전 모 텔레비전 방송국 프로에서 본 기억을 더듬어 찾은 것입니다. 물론 방송국 등 여러 곳에 전화 확인을 한 결과입니다.


  수애당은 경북 안동시 임동면 수곡리 임하호변에 위치한 수애(水涯) 류진걸(柳震杰) 공이 1939년에 건립한 사가인데, 건축주의 호를 따라 당호를 수애당이라고 칭하였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임동면 수곡동에 있었으나 임하댐 건설로 1987년에 지금 잇는 자리로 옮겼다고 합니다. 1985년에 경상북도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우리의 옛 것을 체험할 수 있도록 꾸며진 전통문화의 장입니다. 수애당은 춘양목으로 지어 보존상태가 좋으며 조선후기의 건축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수애 류진걸 선생은 우리말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분이십니다. 우리말의 어원이 알타이어라고 논문으로 주장한 최초의 학자인 람스테드에게 1924년 경에 류진걸 선생이 우리말을 가르치면서, 세계 언어의 족보에 없던 우리말이 한자리를 차지하는데 크게 이바지하였습니다.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남으로 남으로 향했습니다. 안동에 다다르자 제법 굵은 비가 차창을 두드리고 있었습니다. 서안동에서 34번 국도를 타고 영덕방향 진보 16킬로 지점에서 우회전하였습니다. 온가족이 초행길이라 조심스럽게 운전을 했습니다. 다리를 건너니 수애당이 어둠 속에서 희미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빗줄기가 시야를 가렸지만 목적지를 향한 집념으로 도착한 시각은 밤 9시를 가르키고 있었습니다.


  70대의 할머니와 열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여아가 우리를 반겼습니다. 수애당 안주인은 여느 엄마들처럼 자녀를 통학시키기 위해 잠시 외출하고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방 배정을 하는 등 의젓한 모습을 보입니다. 우리 온유는 "언니 언니"하면서 친근하게 다가가 붙임성을 보이고, 넉넉한 마루와 부드러운 처마가 한 폭의 멋진 풍경화를 연출하고 있었습니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푸근한 내음이 코끝을 점령합니다. 평소 같으면 9시 뉴스를 보려고 텔레비전 앞에 앉았겠지만 병풍과 이불만이 가지런히 자리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왕에 나는 휴대전화마저 끄고 그야말로 세상과 단절하는 모험을 감행합니다. 큰방 문살에서 비치는 그림자가 퍼뜩 그리움을 자아냅니다.


  고즈넉한 가운데 일상 탈출의 묘미를 감상이라도 하듯 심호흡을 하는데, 어디서 낭랑하게 글 읽는 소리에 나의 두 귀는 안테나를 세우듯 쫑긋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子曰, 君子 有九思 視思明 聽思聰 色思溫 貌思恭 言思忠 事思敬 疑思問 忿思難 見得思義"

군자에게는 아홉 가지의 생각이 있는데 볼 때는 밝은 것을 생각하고, 들을 때는 총명한 것을 생각하며, 표정에는 온화함을 생각하고, 몸가짐에는 공손함을 생각하며, 말할 때는 충실함을 생각하고, 일할 때는 신중함을 생각하며, 의심이 날 때는 물어서 풀 것을 생각하고, 화가 날 때는 뒤탈을 생각하며, 이득을 볼 때는 옳은 것을 생각한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반드시 숙고해야 할 경구처럼 들리는 것은 비단 나 혼자만이 아닐 성싶습니다. 참으로 군자가 드문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몸과 마음은 늘 무엇인가를 원하기만 하는데 바로 욕심입니다. 그 욕심 때문에 패가망신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또 많은지요?


'종(鐘)이 그 속을 비우는 이유는 멀리까지 소리를 울리기 위함이고, 거울이 세상모습을 평등하게 담을 수 있는 것은 그 같이 맑기 때문이다'라는 어느 현자의 말이 문득 떠오릅니다.


  비가 내리는 바람에 안타깝게도 처마 위로 비치는 별을 바라보며 추억을 노래하지는 못했습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지붕을 타고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이 화음을 내며 아름다운 선율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잊고 있던 정겨운 풍경들 때문에 죽어있던 피부에 새살이 새록새록 돋아나듯 합니다. 고향이 나를 버린 것이 아니라 내가 고향을 너무 쉽게 버린 사실을 망각한 채 부끄럽게 버젓이 살아가고 있으니...


  먼저 도착하여 옆방에 자리 잡은 미국에서 오신 모녀와 가벼운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집 구조가 사람의 심성을 변하게 한다는 말이 사실임을 오늘 느꼈습니다. 오늘날 도시의 집들은 더 높이 하늘을 향하려고만 난리들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건물 높이에 반비례하는가 봅니다. 도덕이 땅에 떨어진 모럴 해저드의 시대에 살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의 은 분명 '옛것을 익히고 새것을 안다"는 통상적 뜻이지만 나는 우리 전통의 삶을 본받는데 체험이 필요하며 그 바탕 위에서 계승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날 밤 수애당에 머문 사람은 우리 식구를 포함하여 네 식구였습니다. 옛 부엌자리에 설치된 수돗물에 피로를 씻었습니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온 느낌이 팍 들었습니다. 우리 식구 모두는 한결 기분이 좋아진 느낌입니다. 아토피로 고생하는 온유를 위한 여행이었기에 맘이 더 편하고 좋았습니다. 매일 밤마다 가려움증으로 온몸을 긁고 있는 아이 때문에 아내와 전쟁을 치릅니다. 아이의 가려운 부위를 손바닥으로 쓸어주거나 보습제를 바르는 등 잠을 설치는 것이 다반사였습니다. 그야말로 '밤이 무섭다'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고 여깁니다.


  이런 딱한 사정을 들은 수애당 안주인은 직접 황토베개를 주면서 온유에게 "하룻밤이라도 편안하게 잘 자"라며 잠 인사를 해줍니다. 이 아토피도 어쩌면 자연의 역습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자연식, 즉 신이 내린 음식물을 멀리하고 인공식품을 즐겨 먹은 결과로 우리 자식들이 이렇게 큰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문명의 이기는 세상풍조를 더 빠르고 편하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 몸도 그렇게 길들여지고 있음을 독자들께서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전통문화를 즐기니 너무 좋습니다. 몸이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비로소 몸과 마음이 진정한 위로를 받은 느낌입니다. 다음날 아침 햇살이 문틈으로 여지없이 비집고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내 눈을 사정없이 애무하자 용트림 같은 기운이 솟아나 기지개를 켜봅니다.  

  

  아! 이 얼마만의 쾌청함인가?


  아침밥은 중간마루에서 손들이 다 함께 옹기종기 모여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 꽃을 피우며 전통음식을 먹었습니다. 자연과의 조화로움이 이토록 사람의 마음을 포근하게 하는지..., 아침밥을 먹은 후 다른 객들은 각자 제 갈 길을 떠났습니다. 아내는 수애당 안주인과 정담을 나누고, 온유와 수애당을 카메라에 담기에 바빴습니다. 인정을 가득 싣고 서울로 향하는 길, 청명한 날씨만큼이나 그야말로 선물같은 날이 되었습니다.


  우리 "둘째 아기가 걸을 때쯤 다시 찾아오라"는 수애당 안주인의 인사말이 아직도 귀에 쟁쟁합니다. 마치 잃어버린 고향을 다시 찾은 느낌입니다. 아! 다시 찾아가고 싶습니다. 수애당의 전설이여!


※ 이 글은 수사연구 2004년 7월호 '열린 광장'에 실린 작품을 경어체로 수정 등 보완하여 발행함.


#에세이 #수애당 #아토피 #여행 #전통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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