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이 없어진다
언제나 곁에 계실 것만 같았던 사랑하는 아버지와 어머니! 부모님께서는 이 좋은 세월을 기다리지 못하셨다. 세상을 떠나가신 지도 어언지간 강산이 몇 번 바뀌었다. 자식들 앞에서는 버겁다거나 힘들다고 내색하지 않으셨다. 항상 온화한 미소를 잃지 않으시고 "정직하거라, 부지런하거라."며 훈육을 하셨다. 이제 부모님은 마음속에만 존재하기에 더욱 애틋하다. 불효막심한 자식으로 남게 되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회한이 앞선다.
고향 마을은 앞과 뒤가 산으로 가려 일출이 늦고 일몰이 빨랐다. 늘 일조량이 적어 마을이름도 '음지동'이라 불렀다. 마을 입구 좌측에 자라처럼 생겼다 하여 자래봉(龜峯)이라는 산봉우리가 있다. 옛날에는 그 앞에 깊은 늪이 있었는데 봄이 되면 꽃이 만발할 때 소풍과 화전놀이로 명성이 높았던 곳이기도 했다. 지금은 깊은 소(沼)도 없고 고목과 잡목만이 쌓인 산봉우리만 그대로 남아 있다.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풍미했던 대표적 놀이는 ‘가생’이었다. 넓은 공터바닥에 모형을 그려 편을 나눠 싸우는 놀이이다. 이제는 사라진 지 꽤 오래된 추억의 게임이다. 가생은 민첩함 외에도 몸과 몸이 부딪치는 육박전이 불가피할 정도였다. 남녀가 섞여서 놀기도 했던 다른 가생 놀이와 달리 초등학교 고학년 이상 남자아이들의 거친 놀이였다. 몸싸움 와중에서도 상대방의 다음 동작을 짐작해 이를 역이용하는 심리전도 상당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만 패를 지어 공격하고 수비하며 이겨야겠다는 일념으로 놀이에 흠뻑 빠졌을 따름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한 시간도 좋고 두 시간도 좋았다. 마냥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늦도록 놀았다. 집집마다 굴뚝에 연기가 피어오르고 어둑어둑한 시간이 되어서도 놀이는 끝날 기미가 없다. 엄마가 "야야 밥 먹어라"라고 부르면 그제야 서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모두들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온몸이 흙투성이가 되곤 했지만 그냥 그걸로 좋았던 그 시절이었다. 지금까지 다리가 튼튼한 것도 가생 덕분이 아닐지 혼자 생각해 본다.
계집애들은 어렵사리 구한 고무줄을 다리에 걸고 폴짝폴짝 뛰면서 고무줄놀이를 했고, 머슴애들은 시샘이라도 하듯 줄을 끊고 줄행랑을 쳤고, 계집애들은 약이 올라 따라가다가도 또다시 놀이는 계속되었다. 70년대 흔히 볼 수 있는 놀이 풍경이다. 변변한 놀잇감이 없었던 시절, 주위에 널려 있는 자연물이 당연히 놀이의 도구가 되었다. 돌조각으로 공기놀이·비석 치기를 하기도 했다. 넓은 공터나 고샅길에서 자치기를 하거나 굴렁쇠를 굴리며 지칠 줄 몰랐다.
모두가 자연 그대로, 자연과 함께하는 놀이였다. 어릴 적 추억은 즐거움과 아픔이 교차한다. 어릴 적 이웃은 모두 가족 같았다. 대소사가 있으면 모두가 함께했다. 슬플 때는 같이 울고 기쁠 때는 같이 웃었다. 고향에 가면 설렘과 기쁨이 가득하다. 고향에서 보낸 그 시절은 인생에서 가장 소중하고 아름다운 순간들 중 하나이다. 그래서 그리움만 쌓여만 간다.
수구초심이라고 점점 나이가 들어가니 고향생각이 더 난다. 너 나 할 것 없이 그리운 고향을 잊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하는 도회지의 삶은 우리의 사고와 가치관을 메마르고 황폐하게 만들었다. 험한 세파에 흔들리며 흘러가듯 살고 있다. 그럼에도 고향의 향수를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다. '고향 까마귀'라고 늘 그립고 반가운 게 사실이다. 고향은 늘 그리움 그 자체이다.
바쁜 일상에 얽매어 매일매일을 덧없이 살아가는 있다. 내 자식이 결혼하여 자식을 낳을 때면 과연 어떤 모습으로 투영될까? 고향길은 밤에 가도 돌에 차이지 않을 만큼 온몸이 바로바로 느끼는 오감통이다. 고향은 나에게 큰 줄이요. 힘의 원천이요. 배경이다. 만인의 애창곡인 '고향의 봄'을 가슴을 펴고 불러본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복숭아 꽃 살구 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린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꽃 동네 새 동네 나의 옛 고향
파란 들 남쪽에서 바람이 불면
냇가에 수양버들 춤추는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언제 불러도 언제 들어도 늘 그리운 감정이 샘솟듯 한다. 누구나 타향살이를 하지만 자칫 본분을 잊어버리고 세상을 아프게 하는 나쁜 짓은 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태어나서 자라게 해 준 그래서 언제나 갈 수 있는 그립고 정든 고향이 있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또 맛에 대한 그리움이 더해진다. 엄마가 손수 해주시는 맛있는 음식이 먹고 싶다. 먹을 것이 부족했던 시절 엄마의 사랑과 정성이리라.
어릴 적 동화 같은 추억담을 열거하자면 누구나 입에 거품을 물고도 남음이 있다. 이제 어엿이 성장한 자식들의 모습을 보면서 부모님의 사랑이 가득 찬 쓴소리가 듣고 싶다. 설령 실패의 삷, 질곡의 삶을 살았을지라도 결코 고향을 등지지 못하리라. 정든 고향을 떠나 고향의 이름으로 살아온 농민의 자식들이다. 비록 고향을 떠나 살고 있지만 고향을 지키고 있는 친구들이 고맙기 그지없다. 주름진 어르신들의 가슴앓이를 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객지생활을 몸소 체득하면서 별 탈 없이 잘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내 마음이 무거워오는 이유는 점점 노령화되어 가는 고향의 현실이다. 이런 고향이 소멸 지역이라는 차마 듣고 싶지 않은 뉴스 때문이다. 고향은 추억의 보고이자 삶의 윤활유 역할을 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저 고향을 마음의 안식처로만 생각하고 살아도 되는지 싶다. 왜냐하면 마음의 빚을 안고 살아가고 있음이다.
얼마 전 또 뉴스를 접했다. '소멸고위험지역'에 해당하는 우리 지역의 소멸위기지수가 전국 최저치를 기록했다는 것이다. 마음 한구석이 쓰리고 아프다. 마을마다 빈집은 늘어가고 있다. 정녕 고향을 살릴 방법은 없는 것인가?
신록의 계절이다. 고향마을에도 꽃이 활짝 피었다. 온 동네가 어릴 때의 웃음꽃이 다시 피어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다시 한번 생명이 살아 숨 쉬는 고향이 되기를 기도해 본다.
설령, 꿈속이라도 '고향이 없어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암울한 예언이 현실이 되지 않도록 지혜를 모아야 한다. 늦은 감이 있지만 청년 일자리를 창출하고, 지역만의 특색을 살려야 한다. 지방의 미래를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정책 결정이 꼭 필요하다. 불문가지(不問可知)이다.
고향, 안녕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