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고향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그야말로 전형적인 산골로 경북지방에서도 낙후된 농촌이다. 동으로는 청송군 현서면, 남쪽은 춘산면, 북쪽은 점곡면, 옥산면이 접하고 있다. 서쪽으로는 의성읍이 위치해 대부분 지역이 2백~5백 미터의 산악지대와 80%의 임야로 형성되어 있다. 쌀농사보다는 지역특산물인 마늘, 작약, 산수유, 홍화 등 약초재배에 의존하며 부농은 거의 없이 대체적으로 어려운 형편이었다.
녹록지 않은 가세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미 그때부터 주경야독을 하지 않았나 반추해 본다. 왜냐하면 낮에는 학교에서 수업하고 수업이 끝나면 곧바로 귀가하여 부모님의 일손을 도와드려야 했으니까. 그 당시 농번기 때가 되면 단골 주훈은 "부모님의 일손을 돕자"였으니 당연한 의무였으리라.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자라난 우리는 사실 공부는 뒷전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성싶다.
그때 열다섯 살 철없던 시골 중학생의 모습은 그저 볼품없고 늘 꾀죄죄하여 흡사 모 방송국의 인기 드라마였던 '옥이 이모'에 나오는 학생들의 모습이 바로 그 당시 자화상으로 봐도 무방하리라.
중학교 2학년이 되자 다른 학교에서 담임선생님이 새로 오셨다. 전공은 국어였으며 전체적으로 풍기는 인상은 엄하고 퍽 과묵한 성격의 소유자로 매우 열성적이었다. 선생님은 우리들의 어려운 형편을 미리 아시고 우리에게 내면적인 정신 개혁을 강조하신 듯하다. 선생님께서는 틈틈이 보잘것없는 우리들에게 간절히 애원하듯 하셨다. 언제나 콧등에 도수 높은 안경을 걸다시피 하시고 안경너머로 눈을 치켜뜨시고 열변을 토하시던 모습이 엊그제 일처럼 눈에 선하다. 아!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여러분! 도회지 아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려면 죽기 아니면 살기로 공부해야 합니다."라고 말씀하셨으며 또한 가난한 농부의 자식에서 벗어나 아무쪼록 자수성가를 역설하셨다. 우리들에게 일찌감치 부모님께 의지하지 말고 과감히 더 넓은 세상으로 시선을 돌리라는 큰 뜻이었다. 그것을 깨닫지 못했으니 참으로 우둔하기만 했다.
군대를 제대하고 고향을 떠나 천년의 고도 경주에서 몇년을 공시생으로 지냈다. 독서실을 전전하면서 낮에는 막노동을 하고 밤에는 공부를 하면서 주경야독을 손수 체험했다. 그러던 중 공사장에서 손을 심하게 다쳐 공부를 포기하려고도 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 강조하신 말씀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고 맴돌았다. 그때 다친 손가락 흉터는 지금도 선명하여 정신이 해이해질 때 각오를 다지는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그렇게 고생을 한 지 2년 뒤 나의 인생에 큰 전기를 맞는 기회를 맞게 된다. 경찰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서울로 발령을 받아 생전 처음 한양 땅을 밟게 되면서이다. 사고무친의 객지생활을 하면서도 늘 상 나의 머릿속에는 '자수성가'라는 네 글자가 따라다니고 있었다. 첫 부임지인 S경찰서에 도착했으나 걱정이 태산이었다. 새로운 임지에서 고생한 흔적은 사회초년병시절 가난한 날의 행복한 햇병아리의 기억으로 돌리기에는 가슴 아픈 추억임에는 분명하다.
10여 년의 타향살이를 하면서도 나름대로 아금바른생활로 지금까지 별 탈 없이 잘 지내고 있다. 물론 사랑하는 아내 그리고 토끼 같은 자식과 행복한 나날을 살고 있다. 나는 이맘때쯤 마음속에 둔 그리운 선생님을 찾기로 마음먹고 인터넷과 경상북도 교육청에 문의전화를 하는 등 여러 방법으로 선생님을 찾기 위해 노력하였다. 선생님께서는 군위에 소재하는 E고등학교에 교장선생님으로 봉직하고 계심을 힘들게 찾아내었다. 25년 만의 쾌거였다.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정성껏 편지를 써 내려갔다. 너무나 오랜만에 스승님께 편지를 쓴다는 게 부담이 되어서인지 가슴은 마구 콩콩 뛰었다. 편지의 내용은 대체적으로 어려웠던 학창 시절을 그리워하면서 또한 선생님께 너그러운 용서를 구한다는 것이었다. 가슴앓이로 보내 20 수년의 세월을 조금이라도 배상해드리고 싶어서 나는 무례하게도 그렇게 서신을 올렸었다.
그리고 며칠 뒤 아파트 1층 현관에 위치한 우편함에서 그토록 기다리던 스승님의 답장 서신이 이 못난 제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아주 조심스럽게 금지옥엽을 다루듯 봉투를 열었다. 그 순간 반백이 넘으신 스승님께서 크신 두 팔로 내 작은 어깨를 포근히 감싸주시며,
"점록 군! 너무 고맙네" 라며 격려해 주시는 듯했다.
나는 귀하디 귀한 스승님의 서신을 마치 연애편지를 읽어가듯 흥분하여 심호흡을 몇 번이나 하여 음미하듯 또박또박 읽어 내려갔다. 나의 편지를 통하여 아련한 추억 속의 젊은 시절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고 하셨으며, 가난한 농촌학생이 현실의 벽을 뛰어넘으려면 즉 계층변이를 하려면 공부밖에 없다고 생각하시고, 어린 우리들에게 너무 가혹하게 했다며, '용서를 구한다'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선생님 용서라니요?"
나는 강하게 고개를 강하게 좌우로 흔들었다. 편지를 읽으면서 나는 선생님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다름이 아니라 그 당시 선생님의 연세(?)는 30대 초반이었으며 그러니까 지금의 나의 나이보다도 훨씬 더 젊었다는 것과 젖먹이 아기를 둔 결혼초년생이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그 젊은 나이에 인격의 깊이와 그 열정 그리고 해박한 학식에 새삼 고개가 저절로 숙여졌다.
그때의 젖먹이 아이는 지금 S법대를 나와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법무관으로 근무한다는 소식에 내일인양 기뻤다. 선생님의 탁월하신 교육관이 아마도 큰 밑거름이 된 것이 틀림없었다. 스승님! 사랑합니다. 홍안의 젊은 나이로 교육계에 투신하셨다. 오로지 후진양성만이 하늘이 주신 사명감으로 여기셨다. 백발이 되도록 어렵고 힘든 긴 세월을 하루같이 제자들을 위해 헌신하셨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자꾸만 허전함이 차는 것은 어쩌면 배움의 분량이 너무 부족한 것이라고 단정 지어 본다. 선생님께서 늘 '良藥苦口 利御病이요 忠言逆耳 利於行이라'고 하신 말씀이 그립기도 하고 다시 듣고 싶어 진다. 해동기 산허리에 남아있는 잔설처럼 스승님의 깊은 사랑의 흔적들은 녹지 않고 있다. 스승과 제자의 아름다운 만남은 어쩌면 학연과 지연 그 어떤 만남보다도 한 단계 높은 관계인지도 모른다.
후진양성이라는 하늘이 내리신 소명을 잘 감당하신 스승님! 참으로 모래알같이 많은 시간의 조각들을 아름답게 조합하시어 아주 훌륭한 모자이크가 완성될 것으로 짐작이 가고 남는다. 스승과 제자의 아름다운 만남을 통해 이 세상이 더욱 더 아름다울 수 있기를 기원해 본다.
존경하는 스승님!
수업시간 때마다 말씀하셨던「고문진보(古文眞寶)」를 오늘도 펴 봅니다. 깊디깊은 의미의 잠언같이 훌륭하면서도 숨어있는 듯한 아름다운 글을 가슴에 담고 살아가겠습니다. 그리하여 먹먹한 감동을 주는 가슴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데 조그마한 보탬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미천한 우리들 생의 큰 버팀목이 되시는 선생님. 영원히 변치 않는 사표가 되어 주십시오. 스승님의 크신 은혜를 무엇으로 다 갚겠습니까? 스승님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꼭 찾아뵙겠습니다. 아무쪼록 늘 건강과 행복이 함께하길 기원드립니다. 이 나라 교육 현실 위에 신의 가호가 있기를 빕니다.
※ 이 글은「경찰고시」 2002년 6월호 '독자의 광장' 우수작으로 뽑힌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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