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개구리 연가
'청개구리'에 대한 설화를 독자들께서도 이미 잘 알고 있을 터이다.
엄마의 말을 듣지 않고 모든 일을 반대로만 하는 청개구리가 있었다. 아들 청개구리는 엄마 청개구리가 하는 말을 항상 반대로 행동하는 버릇을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개구리처럼 울어보라고 하면 "개굴개굴" 하지 않고 "굴개굴개" 하고 운다. 결국 엄마는 화병으로 죽게 된다. 엄마는 청개구리가 언제나 반대로만 하는 것을 생각하고는 강가에 묻어 달라고 유언한다. 청개구리는 엄마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뒤늦게 후회한다. 그리고 마지막 유언을 제대로 듣고자 엄마의 무덤을 강가에 만든다. 이후 청개구리는 비만 오면 무덤이 떠내려갈 것 같아 슬프게 운다.
우리가 국민학교 다닐 적에 배웠던 이야기. 청개구리가 비 올 때 우는 이유를 설명하는 설화의 줄거리이다. 우리는 흔히 말 안 듣는 아이를 ‘청개구리 같다.’라고 한다. 이처럼 관습적 비유가 이루어진 것을 보면, 이 설화는 우리 민족의 삶에 깊이 뿌리내린 효 문화가 녹아 있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초록'이는 내가 지은 청개구리 이름이다. 그 이유는 푸른색이자 나와 같은 돌림자(?)이다. 물론 나는 동물 교감자는 아니다. 그 녀석은 자기가 초록이인 줄 알지 못하겠지만 그렇게 불렀다. 초록이를 만난 사연은 이러하다. 엊그제 일이다. 마음과 눈길 머무는 곳마다 봄꽃들이 출렁이던 때이다. 밤이 되자 기다리던 단비가 대지를 촉촉이 적시고 있었다. 나는 여느 때처럼 서재에서 글을 쓰고 있었다.
그때 서재 바닥에서 활기차고 눈길을 끄는 청개구리와 만났다. 집사람이나 딸이 직접 마주쳤다면 한바탕 큰 소동이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놀래기는커녕 반가움이 앞섰다. 나는 청개구리를 아주 조심스럽게 잡았다. 여기까지 어떻게 왜 왔는지 문초(?)를 하려다가 그냥 묻어두기로 했다. "여기까지 잘 왔다"는 말이 입안에서 맴돌았기 때문이었다.
(초록이의 깜찍한 자태)
사실인즉 청개구리와의 인연은 전에도 있었다. 수년 전 서울에서 이곳으로 이사를 와서 살던 어느 날. 아마 이맘때쯤으로 기억을 한다. 불빛이 환한 거실 쪽 창문에 네발로 붙어 있던 청개구리를 발견한 것이었다. 그때 그 청개구리의 작은 몸짓과 푸른 빛깔이 매혹적으로 다가왔었다. 너무 깜찍하고 신기한 모습에 넋이 빠졌던 기억이 새롭다. 그때 그 녀석과 똑같은 종류와 크기이다. 아니 그 녀석이고 싶다. 폴짝폴짝 뜀뛰어보지만 이내 내 손 안에서 꼼지락거린다. 흡반이 있어 벽 타는 모습과 강한 다리로 점프 실력은 가히 묘기 수준이다.
이 작은 생물에 경이로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전반적으로 외모는 독특하고 매혹적이다. 나는 우선 리빙박스가 없어서 급하게 임시 사육통을 세팅했다. 너튜브를 검색하니 청개구리를 애완용으로 기르는 영상들이 의외로 많다. 투명도가 좋은 사각 플라스틱 통 안에 자그마한 통나무와 화분, 그리고 물그릇을 넣어주었다. 일단 잠을 자고 내일 집사람과 키울지 결정하기로 했다. 물론 일언지하에 "안 돼요" 할 것이지만…….
잠자리에 누워서도 한참을 뒤척였다. 나는 청개구리를 보면서 자연과의 관계도 생각하게 되었다. 때때로 나는 자연이 내가 즐길 수 있도록 항상 거기에 있을 것이라고 착각했다. 그리고 자연의 세계를 당연하게 여긴다. 하지만 비록 작고 연약한 존재이지만 그 경이로움을 계속 경험해야 한다. 자연은 우리를 고양시키고 영감을 주는 힘이 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초록이의 재롱 혹은 묘기)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맨 먼저 초록이에게로 갔다. 통 안에 넣어 둔 화분 위에 잠을 자는 듯 웅크리고 꼼짝하고 않는다. 마치 헤어짐을 아는 듯 슬픈 기색(?)이 역력하다. 집사람도 반갑게 인사를 했지만 키우는 것에는 난색을 표한다. 청개구리와 작별하는 것이 아쉬웠지만, 그것이 옳은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야생에 속하니 야생으로 돌아가는 것이 맞다는 생각이다. 마음 한편에서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봄비 내리는 잔디 마당으로 초록이를 내보냈다. 또 만나기를 기대하면서……,
나는 몇 분 동안 청개구리를 지켜보았고, 그 맑은 초록색과 움직이는 모습에 감탄해마지 않았다. 청개구리는 내 서재보다 자연환경에서 훨씬 더 행복해하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야생 동물이 자유롭게 살며 번성할 수 있는 자연 서식지로 돌아가도록 도왔다는 사실에 나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더 이상 우리 집에 없지만 청개구리가 자연으로 돌아가도록 돕는 작은 역할과 특별한 유대감을 느꼈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청개구리를 관찰하면서 이것을 직접 느꼈다. 그것의 존재는 나 자신보다 더 큰 무언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미래 세대를 위한 지구를 보호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결론적으로, 청개구리를 만난 것은 자연 세계에 대한 나의 사랑과 경외심을 강화시켜 주었다. 그리고 겸허한 영감을 받은 소중한 시간이었다.
(자연에서 잘 지내거라)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우리는 지구와 지구를 집으로 부르는 모든 생물을 돌볼 책임이 있다. 이 작지만 아름다운 청개구리는 나에게 그것을 상기시켜 주었다. 국립생태원 홈페이지 미션을 잠시 살펴보았다. '자연생태계 보전과 생태가치 확산으로 지속가능한 미래구현'이었다. 결코 목표와 임무에 그쳐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하나뿐인 지구를 지키는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청개구리는 수분을 호흡하고 흡수하는 데 도움이 되는 촉촉한 피부를 가지고 있다. 허파로는 완전하게 숨을 쉴 수 없어서 살갗으로도 숨을 쉰다고 한다. 그래서 개구리는 비가 오려고 하면 습기 때문에 기운이 나고 기분도 상쾌해져 즐겁게 노래하는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아무튼 우는 건지, 웃는 건지, 아니면 노래를 부르는 것인지 알 수는 없다. 모두가 기다리던 봄비는 해갈의 단비였다. 잠시나마 청개구리를 가까이한 난 행운아임에 틀림없다.
아무리 작고 보잘것없는 미물이라도 함부로 대해서는 안될 일이다. 하물며 사람이랴? 인생은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이다. 그리고 이것은 꼭 사람 간에만 있는 게 아닌 듯하다.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라는 말이 있다. 머리로 생각한 것을 가슴으로 받아들이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어려울 수 있지만 이 여정의 보상은 그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 서로 존중하고 이해하는 만남이라면 인연 중의 인연이 아닐까?
절대로, 인연을 맺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