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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점록 Mar 10. 2023

산책의 미학

산에 오르는 까닭

  벗었다. 아니 벗겨졌다. 나는 그렇게 때 묻은 제복을 벗고 33년간 정든 조직을 떠나야 했다. 충분히 일할 수 있는 건강한 몸과 뜨거운 열정이 있음에도, 정년이란 굴레로 어쩔 수 없이 세상밖으로 내몰린 것이다. 하지만 이제 남의 눈치 보지 않고 누구의 지시를 받지 않는 지유인(?)으로 삶을 즐기고 싶다. 속도를 줄이면 비로소 사람이 보이듯이, 쉼 없이 달려온 길 멈추니까 보이는 삶의 편린들…….  


  그래 나를 사랑하는 시간으로 채우자. 내 인생은 누가 뭐래도 나의 것이니까. 나의 만다라트 계획표에는 생전 처음 도전하는 것이 대부분 차지한다. 우리 독자들께서도 잘 아시다시피 죽기 전에 꼭 한번 해보고 싶은 목록인 '버킷리스트'와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몇 가지만 나열하면 '영역 확장하기, 전자책 출간하기, 블로그 하기, 복화술 배우기 등이다.


    신중년에게 호사를 누릴 수 있는 걸 딱 하나 고른다면 나는 숨도 쉬지 않고 '산책하기'를 뽑을 것이다.

  "진정으로 위대한 사상들은 모두 걷다가 잉태되었다"라고 프리드리히 니체는 말하였다. 그럼 나도 절반은 철학자가 된 것이 아닐까? 나는 연기하듯 뒷짐을 지고 어정어정 거닐며 깊은 상념에 잠겨 본다. 더군다나 뇌를 젊게 만들어 알츠하이머를 방지한다고 하니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다.

                                                ❰파고라(정자), 산상회의도 가능할 듯❱ 


  둘레길을 조금 오르다 보니 정자가 반기듯 다가왔다. 길 위의 나그네에게 쉬어가라며 자리를 내어 준다. 그리고 산공기를 한꺼번에 들이마시듯이 천천히 깊게 복식호흡을 해본다. 혼자서 다가오는 봄을 느끼기엔 너무 아까워 사진을 몇 장 찍었다.


  등산가 조지 말로리의 "산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라고 한 고금의 명언을 되새기며 산을 오른다. 집에서 가까운 C대학교 뒤에는 순환형 임도가 조성되어 있어 산책 코스로는 그만이다. 임도는 원래 산림을 효율적으로 관리를 하기 위해 차량이 다닐 수 있도록 만든 길이다. 이곳 야산도 야트막해 남녀노소 누구나 편히 걸을 수 있어 권하고 싶다. 임도 곳곳에는 흔들의자, 나무데크, 전망대 등의 휴식공간이 설치되어 있다. 어르신들도 편하게 걸을 수 있도록 보행 매트도 깔려 있다. 이보다 더 좋은 숲길이 또 있을까 싶다.  


  아직도 혼자다. 그러자 산은 그저 원 없이 나의 소유가 되어 주었다. "야호"를 목청껏 외치고 싶었지만 참았다. 사실 어릴 적에는 메아리를 듣고 싶어 "야호'를 마음껏 외치곤 했었다. 이런 고함 소리가 자칫 생태계에 위협이 되기도 한다는 언론 보도를 접했다. 그리고 조난당한 사람이 자신의 위치를 알리는 '국제 조난 신호'라는 어느 강사의 설명을 들은 적도 있다.  

                                         ❰흔들의자 겸 전망대가 발길을 멈추게 한다❱

 

  흥얼거리며 호젓한 길을 걷는데, 연세 드신 노부부를 몇 걸음 앞에서 만났다. 나는 얼른 밝은 모습으로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어르신!"

  "안녕하세요?" 어머님께서 인사를 건넨다.

 이렇게 둘레길이 잘 조성이 되어 너무 좋다. 사람들이 많이 찾아왔으면 좋겠다는 말도 전했다.


  빠른 걸음으로 걷다가 터벅터벅 걸으면서 속도를 조절하면서 올랐다. 중턱을 오르는데 고라니가 놀라서 계곡을 향해 후다닥 냅다 뛴다. 나 또한 그 소리에 흠칫 놀라 걸음을 멈춘다. 나도 혼자인데 그렇게 도망가지 말고 같이 하면 좋으련만…….


  한국에서는 흔하디 흔한 유해조수로 지정되어 있지만 전 세계적으로는 초희귀종이라고 한다. 소위 공존의 갈림길에 선 고라니인 것이다.  너튜브에서는 고라니와의 귀한 인연(?)을 다룬 영상물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새끼를 구조하면서 한집에 살게 된 이야기 등 흐뭇하게 보다가도 안타까움을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는 자연의 순리를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세상에 없던 세상살이를 꿈꾸고 있다. 다음엔 고라니를 혹시 만나면 이름을 꼭 지어 주기로 다짐해 본다. 그 무한의 사랑이 있는 한 아름다운 인생길이 열릴 수 있다고 본다. 그런 날이 온다면 사람과 함께 숨 쉬는 '명품 숲길'은 떼어 놓은 당상일 텐데…….


신중년이 자기 발견을 탐색하는 아주 중요한 시간. 마음을 치유하는 '산책의 힘'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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