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신중년
요즘 시 낭송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어 반갑기 그지없다. 시를 목소리에 실어 듣는 이에게 울림을 주는 것이 너무 좋다. 물론 전문 낭송가가 되기 위해 배우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 잊고 있던 어린 시절의 문학에 대한 향수와 그리움 때문이리라. 시의 향기에 젖어드는 좋은 기분은 삶을 더 활기차게 해 준다. 그리고 고급스러운 문화인이 되어가는 느낌에 자존감 향상은 덤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크고 작은 행사에 시를 낭독하거나 낭송한 경험이 몇 번 있었다. 그렇다고 시 낭송에 조예가 깊다고는 생각지 않으나 주인공에 대한 보은(?)의 성격이 짙다. 나름 창작의 고통을 통한 자작시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행사의 성격과 주인공의 업적에 걸맞은 헌시 성격이었다.
몇 년 전 경찰대학에 근무할 당시 퇴임하는 학장님이 계셨다. 개인적으로 '송별 준비를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을 하다가 친한 후배 직원에게 자문을 구했다. 그 후배는 "시를 쓰면 좋겠습니다"라며 조언을 해주었다. 나름 밤늦도록 분투했지만 미완성 상태로 관사에서 잠이 들었다. 이튿날 일어나자마자 시를 다듬는데 온 마음을 쏟았다. 마치 비밀 서찰인양 남에게 보이지 않도록 품속에 넣고 행사장으로 향했다.
식순에 따라 어느 정도 행사가 마무리될 시점이 다가왔다. 시 낭독을 어떻게 할까 망설임은 계속되었다. 사실 시나리오에는 시 낭독은 애당초 없었다. 그때 사회자가 "혹시 마지막으로 하실 말씀이 있으면 하십시오"라는 멘트가 꼭 나에게 하는 말처럼 들린다. 약간의 정적이 흘렀다. 나는 용기를 내어 손을 번쩍 들었다. 그리고 무대 단상으로 올라가 품속에 고이 넣어 둔 시를 꺼냈다. 좌중을 살피며 '주왕산에서 아산으로'를 천천히 낭독을 하였다. 행사가 끝난 후 여러 직원으로부터 "좋았습니다", "화룡점정입니다"라며 칭찬을 해준다.
그리고 재작년에는 모 구청장의 퇴임식에 초대를 받았다. 처음 인사발령 상견례에서 만나 업무적으로 도움을 받은 터라 나는 기꺼이 참석하겠다고 했다. 나는 행사 관계자에게 "그냥 참석하기보다 헌시를 낭송하고 싶다"라고 타진을 하였다. 잠시 후 "아주 좋습니다"는 회신이 왔다. 퇴임식이 열리는 12월 마지막 날은 하늘에서도 축하를 하듯이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었다. 구청 행사장에는 이미 많은 축하객들로 북적이고 있었으며 리허설이 한창이었다.
경찰예복을 갈아입고 지정석에 앉아 대기를 했다. 순서가 되자 배경음악에 맞춰 리허설을 하였다. "이런 행사장에 경찰관이 와서 시 낭송은 처음이다"라며 옆자리에 참석한 분이 살짝 귀띔해 준다. 긴장감과 설렘으로 기다리던 시 낭송 순서가 되었다. 내가 단상에 오르자 시선은 온통 나에게로 쏠렸다. 경찰관이 왜 왔을까? 하는 의아스러운 얼굴로 나를 쳐다보는 듯했다. 배경음악이 나오고 '끝이 없는 길'은 세상에 첫선을 보이게 되었다.
시선 처리와 표정 그리고 몸짓으로 낭송의 격을 갖추려 했지만 아무래도 부족한 듯하다. 그럼에도 제복을 입은 경찰관이어서 좋게 봐준 것이 아닌가 싶다. 기념 촬영을 하면서 구청장은 연신 "고맙습니다. 아주 멋집니다."라며 덕담을 해주었다. 이런 기쁨을 어디에다 비기랴. 남을 즐겁게 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또 있을까 자문해 본다.
며칠 전 지역 단체장 이ㆍ취임 행사가 있었다. 사전에 행사 주관할 책임자에게 시낭송 재능기부(?)를 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다. 물론 축하하는 자리인지라 쾌히 승낙을 해주었다. 먼저 시를 완성하는데 거의 꼬박 이틀이 걸렸다. 시낭송 연습을 하면서도 계속 퇴고의 과정을 거쳤다. 목소리를 녹음해서 여러 번 듣기도 하고, 거울 앞에서 표정과 몸짓을 계속 연습했다.
행사시작 한 시간 전에 도착했다. 강당에는 수많은 축하 화환이 도열하듯 세워져 있었다. 여러 내빈들과 관계자와도 인사를 나누었다. 꽃다발과 감사패ㆍ감사장 등이 진열되어 분위기가 한껏 무르익고 있었다. 경찰서 해당부서에 근무하는 과장님, 후배 직원들과도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시 낭송 연습을 위해 인사를 가급적 줄이고 대기석에 앉았다. 따로 리허설은 없어지만 목을 풀면서 마지막 연습에 매달렸다.
사회자가 나의 약력을 소개하자 나는 단상 앞으로 올라갔다. 박수를 받으며 인사를 올리자 배경음익이 흘러나왔다. 자작시인 '오늘같이 좋은 날'을 낭송했다. 오늘은 청중을 향한 시선처리와 약간의 몸짓도 허용(?)했다. 사진 촬영하는 사람들도 여럿 눈에 띄었다. 아! 드디어 끝이 났다. 전직 파출소장이 이런 면도 있었느냐며 의아해한다.
많은 청중들 앞에서 시를 낭송하는 것은 결코 쉬운 게 아니다. 낱말 하나하나의 소리 내기를 바르게 해야 한다. 그리고 그 높낮이와 길고 짧음이 정확해야 뜻이 바로 전달되기 때문이다. 시 낭송은 어떤 성악가의 노래, 어떤 배우의 명연기보다 훌륭한 예술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더 어렵다. 시 낭송의 미덕은 진정성이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목소리와 음률로 낭송할 때 최고의 낭송이 되리라 여긴다.
글을 쓰거나 외우는 것은 두뇌를 활성화시켜 치매 예방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고 한다. 즐기면서 건강도 챙기는 이보다 더 좋은 취미생활도 없을 듯하다. 생각처럼 쉽게 외워지지 않은 때는 필사하듯이 쓰면서 외우면 도움이 된다고 한다. 바라기는 어르신들께 용기와 위안을 주는 행복 나눔을 실천하고 싶다. 굳이 이유를 말한다면 건강하고 멋지게 나이 드는 웰에이징(well-aging)을 위함이기도 하다. 특히 신중년에게 "절대로 시 낭송을 하세요"라고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