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호접지몽 Apr 17. 2023

아기의 우유

식탁에 덩그러니 아이가 마시다가 남은 우유가 놓여 있습니다.

낮잠 자러 가기 싫다고 칭얼거리던 아기가 한두 모금 마시다가 남긴 우유입니다. 아이가 먹기 좋게 빨대가 꽂혀 있네요. 화상으로 한참 동안 회의를 하다가 목이 말랐던 터라서, 어차피 싱크대로 직행할게 뻔한 우유를 집어 들었습니다.


평소에 아내가 왜 자꾸 아이 먹을 것을 뺏어먹냐고 타박을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저는 아이가 안 먹어서 버릴까 봐 아까워서 먹은 건데 아내는 그게 뺏어먹는 것으로 보였나 봅니다. 이 우유도 먹어서 없어지만 또 그런 소리를 들을 수도 있겠다 싶어 피식 웃음이 납니다. 우유는 미지근하고, 빨때는 앙증맞아서 벌컥벌컥 마실 수는 없습니다. 입을 모아서 조금씩 마셔 봅니다.


고소하니 참 맛있습니다. 생각해 보니, 이렇게 맛을 음미하면서 우유를 먹어본 적이 없습니다. 미지근한 우유가 왜 이렇게 맛있는 걸까요. 생각하며 마시다 보니 금방 동이 났습니다. 냉장고에서 새 우유를 하나 꺼내 마십니다. 시원하게 꿀꺽꿀꺽 들이키는데, 좀 전에 마셨던 우유같이 맛이 있지 않네요. 그냥 우유구만 하는 생각이 들 뿐입니다.


진부할 수 있습니다만, 미지근한 우유가 맛있었던 이유는 아내의 정성이 담겼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아이가 목이 안 말랐으면, 우유를 조금이라도 더 먹어서 키도 컸으면, 그리고 이거 마시고 얼른 잤으면 하는 바람이 담긴 우유가 더 맛이 있었나 봅니다. 두 번째 마셨던 우유에는 그 정성이 담겨 있지 않았던 것이죠.


오늘은 아이가 아파서 3일을 입원하고, 집에 돌아온 첫날이었습니다. 평소 아내가 해준 음식을 먹다가 만사가 귀찮아서 편의점과 패스트푸드점으로 다시 발길을 돌린 며칠 동안 몸은 다시 조금 망가진 상태이지요. 그리고 무엇을 먹어도 감흥이 없고 그냥 한 끼 대충 잘 때웠다 싶었습니다. 먹어도 먹어도 허전한 것이 있었지요.


오늘 우유를 마시면서 알았습니다. 그 허전함은 아내의 손길과 정성이었던 것을요. 살면서 당연했었던 아내의 정성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아이의 우유를 몰래 훔쳐 먹으면서 깨닫게 되었네요.


아이가 일어났나 봅니다. 우유가 없어진걸 눈치채지 못해야 될 텐데.

매거진의 이전글 대화의 밀도 라는 책을 읽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