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호접지몽 Sep 11. 2023

그립기는 하지만 돌아가고 싶진 않다.

옛 회사에서 회식이 있다고 초청을 받았던 날이었다.

나는 이제 영업맨이기 때문에, 앞으로 큰 고객중의 하나인 내 전직장의 후배들에게 술한잔 사주면서 앞으로 있을 테스트에 대해서 협조도 요청하고, 관계에 윤활도 가져오기 위해서 그 회식에 참석했다. 그날은 마침 3군데의 업체와 미팅을 한 날이었다. 몸도 지치고 마음도 지친 무거운 마음으로 약속장소로 향했다. 내가 참석하겠다고 했지만, 그날따라 왠지 그곳으로 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미리 도착해서 기다리면 너무 을 스러울것 같아서, 약속시간보다 조금 늦게 도착했다. 나의 옛 동료들은 술자리에서 여전히 즐거워 보였다. 내가 없어도 이제 너무 괜찮은것 같은 느낌 (당연한 것이겠지만)이었다. 지금이라도 돌아갈까를 잠깐 망설이다가, 술자리에 앉아 있는 후배와 눈이 마주쳐 엉겁결에 인사를 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 왜 이렇게 늦었어? 요새 많이 바빠?"

" 아 요새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느라 정신없네요. 형은 어때요?"

" 나? 나야 똑같지 뭐. 야 전부장 늦게 왔으니까 후래자 삼잔 한꺼번에 따라줘라"


맥주 글라스에 가득 담긴 소주를 비워내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예전에는 나의 말이면 눈을 초롱초롱하고 집중헤서 듣던 팀원들이 지금은 내가 와도 가벼운 인사만 하고는 아는체를 잘 안한다. 오직 옆팀에 있었던 회계팀장 형님만 계속 나를 신경써 주고 있었다. 11명이 나빼고 너무 즐거운 회식자리였다. 아무리 그래도, 입장이 바뀌었다고 이렇게 사람을 못본채 하나? 섭섭한 마음이 들었지만 술잔을 연거푸 들이키며 그 마음을 같이 목구멍으로 넘겼다.


" 아이는 이제 어린이집에서 잘 적응해?"

" 네 이제는 잘 적응해요"

" 회사일은 어때?"

" 똑같지요 뭐"


내가 퇴사하기전 육아휴직을 갔었던 팀원과 대화를 시도했지만, 칼같은 단답형 대답만이 돌아온다. 더이상의 대화를 원치 않는 것이다. 4년을 공들여서 가르쳤던 후배였다. 대가를 바라고 가르친 것도 아니었고, 한명의 구성원으로서 충분히 그 역활을 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했던 일이었지만, 마음이 너무 서글프다. 이제 상관없는 사람이고, 우리가 갑이고, 너는 그저 우리 회식에 참석해서 돈만 내주면 된다 라고 생각하는 걸까?


여러사람에게 대화를 시도해 보다가, 그냥 조용히 앉아서 술잔을 들이켰다. 이제는 외부사람이 이 모임에 어제까지 있었던 사람처럼 녹아든다는게 오히려 더 이상하지. 어쨌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위해서 이들을 두고 나온거니까 나에게 섭섭함이 왜 없었겠는가. 내가 이 조직을 떠난 그 순간부터 저들과 나는 다른 길을 가고 있는 남남이고, 필요에 의해 뭉쳐서 갈수도, 차갑게 돌아설 수도 있는 목적에 기반한 사이 아닌가. 아니, 처음에 이 회사에 팀장과 팀원으로 모였을 때 부터 그런 사이 아니었던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고 나니 섭섭한 마음이 오히려 조금 가라앉는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라는게 언제든 멀어질 수도, 가까워 질 수도 있는것인데, 과거의 친분과 내가 기대하는 관계의 가까움은 저사람들이 생각하는 정도와 많은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나도 내가 접어든 새로운 길을 함께하는 새로운 동료와 새로운 일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그들과의 사이에서 에너지를 얻고, 미래를 함께 그려보고, 도전하고 있지 않은가. 저사람들도 새로운 관계의 가운데 있을 뿐이었다.


한참을 웃고 떠들던 무리의 후배중 한사람이 내 자리 옆으로 앉아서 술을 한잔 따라준다


" 부장님, 오랜만에 이런 분위기 회식 오시죠? 그리우세요? 부러우세요?"

" 응 그립긴 하지만, 부럽지는 않네 ㅎㅎ"


정말 1초도 고민하지 않고 대답이 나와서 그 친구가 서운했을 수 있겠다. 언젠가, 나와 나의 회사가 예전 직장에 비해서 사람도 많아지고 큰 회사가 되더라도, 지금의 나와 미래의 나는 다른 사람이고, 영원히 이런 분위기의 회식에 즐겁게 참여할 수 있는 위치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앞으로도 나는 이들의 이 분위기를 늘 그리워 할 것이다.


하지만, 부럽지는 않을 것 같다. 어차피 스처가는 역활에 스처가는 인연속에 내가 머물렀을 뿐이고, 그시절의 그 사람들은 영원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저 무리에 있는 사람들도 하나둘씩 떨어져 나가 그때의 그시절을 그리워 할 것이고, 결국 우리는 모두 똑같아 질 것이기 때문이다. 나처럼 을의 입장에 접어들지 그렇지 않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무리속에 속해 있으면서 변화를 느끼지 못할 바에는, 조금 외롭더라도 환경과 미래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대응하며 나만의 것에 대해서 구축해 나가고 있는 내 자신이 나는 너무 자랑스럽고, 조금 늦은감이 있지만 지금이라도 그렇게 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저들이 부럽지 않다. 언젠가 저들이 나를 부러워 할 것이라는 것을 나는 알기 때문이다.


그날 술자리에서 1차보다 훨씬 비싼 2차의 술자리 값을 치루고, 나는 조용히 빠져나왔다. 옆팀 동료였던 회계팀장님의 전화가 왔다. 괜찮냐고 묻는다. 술자리 내내 괜찮지 않았지만, 그 시간 생각의 끝자리에서 나는 괜찮은 사람이 되어 있었다. 괜찮다고 대답했다. 나는 너무 괜찮다고.

매거진의 이전글 영업의 재미에 눈을 뜨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