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초록에 반응해 / 해일(필명)
앞을 보고 걸었다 그림자가 짙다는 네 말에
지나가는 까치 꼬리가 예쁜 것이
울기 충분한 이유였던 날이 떠올랐다 눈물이 흔했던 시절
늘어진 카세트 필름에도 너는 울었다
연말 대신 종말이란 말을 붙이면 모든 게 세기말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괜찮을 수 있었다 낙엽이 덜 된 잎들은
뿌리 없이 굴러다녔고 길에는 초록 이후의 것과
초록일 수 없는 것들뿐이었는데
한 계절 돌면 초록일 것에만 네 이름을 붙였다
바퀴가 흡수하는 비명에 대해서
등 뒤로 뾰족해지는 혀에 대해서
지워지지 않는 것을 수습하려는 고무에 대해서
길고 더딘 이야기를 나누면 길은 끝나 있었다
우리가 반응했던 초록은 홀로그램처럼
흠집이 난 렌즈처럼
증발하거나 동공에 상처를 내기 일쑤였지만
괜찮을 수 있었다 우리는 세기말이기로 했다
고개를 묻은 무릎은 늘 젖었다
가리기 위해 달렸다
-해일, <우리는 초록에 반응해>,
주머니시 [벗어둔 인연들도 나를 놓아버린지 오래]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