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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언호 Sep 17. 2024

밤의 서정에 시동을 걸고

 갑자기 별빛 씨가 뒤돌며 나를 불렀다.

- 안 올 거예요? 음악 들어야죠.

 걸음을 재촉했다. 그녀의 옆에 서서 말했다.

- 좀 천천히 가도 괜찮아요.

- 당신이 느린 거예요. 무슨 생각했어요?

- 누구나 바다 앞에서는 생각이 많아지는 법이죠.

- 현재에 녹아들지 못하는 사람이나 그렇죠.

 나는 속마음을 읽힌 듯한, 은근히 반가운 마음으로 눈을 깜빡이며 그녀에게 물었다.

- 당신은 이 순간에 온전히 들어와 있나요?

- 난 과거지향인이 아니니까요.

- 바다 앞에서 그러기 쉽지 않은데, 사람이라면.

- 사람이라면…….

 그녀가 내 말을 따라 뇌었다. 그리고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내가 그녀의 표정에서 읽으려던 슬픔이 일순간 반짝이더니 사라졌다. 그녀가 말했다.

- 제게도 옛사랑은 있죠. 그 사랑이 지나간 상처가 아물 때가 됐을 뿐.

- 그걸 알 수 있나요?

- 상실의 의미를 받아들이는 거죠. 연관된 시간을 가만가만 살펴보고, 남의 날들은 보내주고, 내가 떠나온 날들은 토닥여주는 거예요.

- 그 모든 시간은 나와 남으로 분리가 안 될 텐데요.

- 전 연애의 추억을 버리기로 했어요. 그래도 똑같이 성숙해지니까요.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우린 사랑을 통해 자연스레 무언가를 얻어요. 그게 항상 좋다고는 못하지만, 나쁠 것만도 없죠.

그녀의 말은 아련하면서도 홀가분하게 들렸다. 내 관점과는 달랐지만, 그럴싸하게 들렸다. 별빛 씨 쪽에서 보내는 바람에서는 히아신스 향기가 났고, 내 속에서 맞닿아 울렁이는 것이 여신(餘燼)인지, 잿더미인지, 혹은 살아 있는 불씨인지 알 수 없었다. 난 조심스레 물었다.

- 어떤 사랑이었나요?

그녀는 고개를 돌려 방시레하며 답했다. 그 눈에는 맑은 샘물에 바가지가 놓이듯 가볍게 파문이 일었다.

- 사랑 앞에 부속 성분은 없어요.

- 네?

- 사람들은 사랑에 관해 현학적으로 말하길 좋아하죠. 사랑을 정의하려는 시도도 많고요. 하지만 대부분 장황하달 뿐, ‘사랑’이라는 단일어만큼 멋진 문장은 많지 않아요. 오히려 ‘사랑’이라는 단어 없이 사랑을 말할 때 더 아름다운 법이죠. 저도 마찬가지예요. 사랑이라는 단어만으로 품는 은하수 같은 의미 속에 제가 있어요. 제가 사랑이라는 단어 없이 한 많은 말들이 제 사랑의 설명이 되겠고요.

 난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압도될 도리밖에 없었다.

- 지금 당신의 말도 무척 아릅답게 들리네요. 별이 가득한 밤하늘을 보는 것 같아요. 이렇게 말하면 현학적으로 느낄지 모르겠지만.

- 저기 봐요.

 그녀는 웃으며 김이 자욱한 하늘을 가리켰다. 나는 새삼 하늘을 정면으로 올려다보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한밤의 짙은 벽공에 별들이 휘황하게 피어 가지가지 향연을 이루고 있었다. 달빛에 구름의 어지러운 무늬가 시간처럼 오갔다. 반짝이는 유년의 작은 별들 사이로 이따금 노년의 성화(星火)가 내렸다. 난 말을 잃고 그 순간에 하릴없이 마음을 맞대었다. 별 겯듯 쏟아지는 공허가 청포도처럼 알알이 박혔다. 소름이 돋았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언저리에는 순순한 몽상이 깃들어 있었다. 다시 눈을 돌려, 셔터를 누르듯 눈을 감았다 뜨며 풍경을 담고 또 담았다. 내 몇 안 되는 독자들이여, 예술가의 감흥을 존중해 주기 바란다. 그녀는 나를 보고 미소 지으며 말했다.

- '결정적 순간'인가 보죠?

- 네, 새벽에 점령당했어요.

- 정작 사진을 찍거나 글을 쓰거나 하지는 않으시는데요?

- 당신만 없었다면 녹음기를 켜고 내내 흥얼거렸을 겁니다.

- 궁금하네요. 싱어송라이터들은 작사부터 하나요, 작곡부터 하나요?

- 그때그때 다르죠.

 혹은 가사부터, 혹은 곡부터, 때론 첫 줄의 가사와 음률이 함께 나오지만 설명하자면 길다. 난 대강 답해놓고 다시 높은 하늘에 시선을 맡겼다. 별무리로 뒤덮인 시야의 모퉁이로 작은 별 하나가 줄곧 깜박였다. 나는 손짓으로 별빛 씨를 불렀다. 그녀는 고개를 젖히고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톡 건드리며 말했다.

- 카르티에 브레송의 라이카가 저기 있네요.

 그녀는 공감받았다는 듯이 방긋 웃었다. 부드러운 입꼬리가 별빛에 아른거렸다. 그 순간도 내게 결정적인 것만 같아 겁이 났다. 마음은 설아와 부딪치는데, 몸은 자꾸만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가 물었다.

- 카메라 플래시처럼 반짝인다고 말하고 싶은 거죠?

- 그도 그런데, 정말 플래시 터지듯 깜박거리고 있어요.

 어디요?

 난 집게손가락을 들어 그 조그만 별이 있던 자리를 가리켰다. 계속 깜박이던 별은 사라지고 없었다. 황당했다.

- 어라, 분명 있었는데.

- 안 보이는데요?

- 있었어요. 보지 않았어요?

- 어디, 가리키는 쪽에서는 안 보여요. 좀 숙여 봐요.

 그녀는 갑자기 내 뒤로 오더니 폴짝 까치발을 들고 내 팔과 평행하게 시선을 두었다. 나는 허리를 숙여 그녀에게 나란하게 키를 맞춰 주었다. 그녀는 살그머니 내 어깨에 턱을 가까이 대었다. 내 볼과 그녀의 볼이 닿을 듯 말 듯 흔들렸다. 따스한 숨결에 나는 동요하지 않으려 입을 앙다물었다. 희미하게 히아신스 향기가 났다. 마르지엘라의 위키드 러브. 눈가 너머로 힐끗 그녀를 건너다보았다. 그녀는 발그레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내 귓가에서는 동맥이 시계태엽처럼 정적 사이를 널뛰기 시작했다. 우리 사이로는 실바람이 엷게 장막을 걸었다. 바람은 불현듯 외할머니댁 창가의 시어 커튼과 그 사이로 기지개를 켜던 아침 햇살을 떠올려냈다. 그 시간 속의 나는 여전히 파아란 물속에서 눈을 감고 흔들리며 파도를 느끼고 있었다. 불과 몇 초간의 긴장 속에서, 나는 잊고 지내던 꿈결 같은 기억에 옹크려 그 자취를 짚고 헤아렸다. 순식간의 꿈은 사랑스럽고 아늑했다. 나는 별과 바다와 기억과 슬픔의 역들을 지났고, 별빛 씨는 내 발착의 안내자가 되어 주었다. 그녀는 아는지 모르는지, 천천히 옆으로 걸음을 옮기더니 혼잣말하듯 말했다.

- 안 보이는데……. 어라, 저건가?

 나는 눈을 비비며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내가 시선을 두었던 오른편에, 구름이 지나가는 반대편으로 좀 전과 같은 흰 별이 일정하게 깜박거리고 있었다. 별들이 드문드문 떠 있는 그곳에서야 나는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느릿하게 움직이는 그것은 별이 아니라 비행기의 방향타였다. 야간비행의 등불이 내겐 자그마한 별처럼 보였던 것이다. 나는 모른 체하려다 그 낯익은 신호가 완전히 시야에서 비껴가자 씁쓸하게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내 창피스럽다는 표정에 와락 웃음을 터트렸다. 난 고개를 흔들며 그녀의 눈을 피했다. 그녀가 입을 가리고 눈동자를 굴리며 말했다.

- 당신 군인이라고 했죠. 공군은 아니겠네요?

- 난 그저 설렜을 뿐이에요.

- 별이 실제로 깜박이는 적은 없다던데. 빛이 굴절해서 그렇게 보이는 것뿐이래요.

- 그럼 내가 본 건 별의 축에도 못 들겠네. 맞죠?

 난 일부러 그녀에게서 멀어지는 척했다. 그녀는 내 팔을 붙들며 웃었다. 토라진 척 물었다.

- 근데 그런 건 어떻게 알았어요? 미술 공부하려면 필요한가.

- 부전공으로 천문학 해요.

- 와, 정말? 이과인 줄 몰랐는데.

- 그럴 리가요. 사실 방금 몰래 찾아봤어요.

 그녀가 환하게 웃었다. 나는 덩달아 웃다 윗입술이 교정기에 걸려 움찔했다. 무턱대고 천문학 강의를 듣던 설아가 떠올랐다. 밤공기가 청명하던 여름밤, 그녀가 살던 옥탑방 마당의 나무판자에 나를 앉히고 설아는 별자리를 알려 주었다. 나는 겨울 별자리 몇 개만 알아도 필요한 때 낭만적으로 쓸 수 있다며 그녀를 무안하게 했다. 설아는 나중에 같이 살면 커다란 천체망원경을 사자고 했다. 나는 그녀를 위해 다락방을 만들어 주겠다고 말했다. 박공지붕에 창을 뚫고 참나무 사다리를 달아 다툴 때마다 그리로 몰래 들어갈 거라고. 그녀는 내게 문은 열어 두겠다고 했다. 나는 그 약속을 아직 기억하고 있다. 건축설계 수업 때 그린 설계도도 아직 가지고 있다. 설아는 전공도 아니면서 천문학과 건축학 수업을 듣는 우리가 참 닮았다고, 대학이 아니어도 언젠가 한 번은 꼭 교차할 운명인 것만 같다고 했다. 설아가 그 시간을 품고 사는지 모르겠지만, 난 도통 잊을 수 없다. 미워도 내 웃음에는 늘 설아가 있었고, 설아에게는 내가 전부였다. 문득 벅차오는 걸 느꼈다. 지치지 않고 숨을 뿜는 굵은 파도의 먼 끝을 응시했다. 가없는 사랑의 바다, 설아와 손잡고 보던 수평선. 지금 내 옆에는 설아와 닮은 누군가가 모래톱 사이를 별빛처럼 걷고 있다.



알 수 없는 그 계절의 끝

이승기, 되돌리다



- 다리 아파요. 앉을래요?

 그녀가 내 쪽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 저기까지만 가요.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은 백사장의 중앙이었다. 피사의 사탑처럼 휜 깃대에 나무 바랜 표지판이 걸려 있었다. 나란히 걸어갔다. 그녀는 목에 둘렀던 카디건을 풀어 허리에 묶고 모래 위로 털썩 주저앉았다. 정면으로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머리칼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실눈을 뜨며 그녀가 말했다.

- 안 앉을 거예요?

- 바람 정신없지 않아요? 딴 데 찾아볼까요.

- 머리에서 바다 냄새나고 좋죠. 묶으면 돼요. 얼른 앉아요.

 그녀가 어르듯이 오른편 바닥을 톡톡 두드렸다. 나는 그 위에 조심스레 손을 짚고 앉았다. 반대편으로 모래를 털며 그녀가 말했다.

- 이젠 당신이 선곡해 주세요.

- 전 그런 거 못해요.

- 거짓말, 얼른.

 그녀가 휴대폰을 건넸다. 나는 고민하다 브레드의 「If」를 골랐다. 아득하고 푸근한 바다로부터 실려오는 산들바람에 어쿠스틱 기타와 신시사이저가 얹혔다. 그녀는 눈을 감고 고개를 흔들며 입술을 달싹였다. 별빛 씨의 목소리는 낭랑했다.



Then one by one the stars would all go out,

Then you and I would simply fly away

Bread, If



 음악이 끝나고 그녀는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 이 곡 좋아해요.

- 맞아요. 어떻게 알아요?

- 얼마 전에 알았어요. 마침 이 시간이면 끝나는 라디오가 있는데, 거기에 나왔거든요. 전 일기 쓸 때 라디오 듣는데, 마침 바깥에 비도 오고 있었어요. 그때 그 상황이 너무 좋았던 거예요. 그래서 기억나요.

 난 또 한 번 놀라야만 했다. 침착한 척 물었다.

- 혹시 ‘새벽마을’인가요, 그 라디오?

 그녀가 놀란 눈으로 말을 받았다.

- 맞아요! 제가 정말 좋아하는 프로그램이에요. 왜, 우리 어머니 때는 별밤 듣는 게 하나의 공감대였잖아요. 이제 라디오 듣는 사람들은 많이 없지만, 그래도 안다는 사람들끼리는 다 알죠. 역시 아시네요. 그때 이 노래 신청한 사연도 참 좋았어요. 어떤 여자가 헤어진 남자한테 보내는 것 같았는데, 엄청 낭만적이었거든요. 진행자가 사연 제목도 말했는데, 뭐였더라…….

- '여름이 좋아지려면 당신이 있어야 해요.' 맞죠.

- 맞는 것 같아요……. 맞아요! 어떻게 알아요?

 물론 알고 있다. 재방송을 찾아 몇 번이고 다시 들었으니까. 낱낱이 외울 수 있다. 그건 설아의 문장이었다. 수신인이 누구건 간에, 내가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이 용기내 보낸 편지다. 난 이곳에서 그녀를 수없이 다시 만나는구나. 아직 그녀를 잊지 못했다는 걸 수시로 확인하는구나. 그래, 오늘의 여정은 이미 특별하다. 내 동행인들은 서로를 모르지만 분명히 닿아 있고, 둘을 향한 나의 마음에 원추곡선처럼 균형이 생겨버렸다. 지금의 끝에서 내가 치우치게 될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씁쓸한 기분을 그러모아 크게 한숨을 쉬었다. 별빛 씨가 말했다.

- 설마 그 남자가 당신인 건 아니겠죠.

- 에이, 설마요. 당직 서다가 우연히 들었거든요. 장마가 지나간 후였어요. 돌아갈 생각하니 막막하네요.

- 곧 끝나잖아요. 그래도 라디오 들으면서 근무할 수 있다니 다행이에요.”

 나는 미소로 답하며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을 틀었다. 뜨거운 음악이 흐르는 동안, 우린 목덜미를 젖히고 마음에 파도가 감겨오도록 그윽하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녀가 살며시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대로 우린 첫 악장이 끝나는 십여 분을 말없이 보냈다. 첼로가 끝의 문턱에 따뜻한 차를 내올 즈음, 그녀가 고개를 들고 내게 물었다.

- 클래식 들을 때 늘 이렇게 집중하세요?

- 항상 그러진 못해요. 기억에 남는 순간들은 있죠.

- 오, 언제요?

- 일병 땐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을 읽는데, 바크하우스가 카를 뵘이랑 협연했다는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2번」이 책 후반부에 나왔어요. 궁금해서 듣는다는 게 거의 한 시간을 넋 놓고 침대에 누워 있었죠. 응어리가 죄다 쓸려 내려가는 기분이었어요.

- 제겐 생소한 음악가 이름이 마구 나오네요. 저도 쉴 때 들어봐야겠어요.

- 좋아하실 거예요.

그녀는 웃으며 귓가를 쓸어넘기고 핸드백에서 머리끈을 꺼냈다. 1악장이 끝났다. 나는 그녀가 머리를 묶길 기다렸다가 휴대폰을 돌려주며 말했다.

- 다시 선곡을 맡길게요.

- 좋아요. 취향을 알았으니 맞춰서 골라 볼게요. 제가 나름 플레이리스트 수집가거든요.

 귓가를 타고 소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현식의 「내 사랑 내 곁에」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음악에 젖은 마음이 강물처럼 다시 먼 바다로 흘러들었다. 그녀가 말했다.

- 뜬금없지만, 전 한때 「비포 선라이즈」가 세간에 부질없는 동경을 불러일으켰다고도 생각했었어요.

- 사랑에 다쳤을 때겠군요.

- 맞아요.

- 지금도 그런가요?

- 지금은……, 어떤 사랑도 고유하다는 걸 알았어요.

- 그럼요. 제시와 셀린느도 그중 하나였을 뿐이죠.

- 지금이랑 동일시하는 건 아니죠?

- 설마요.

그녀는 환한 웃음으로 치맛자락을 끌어당겨 무릎을 감싸며 내게 눈을 맞췄다. 밤은 깊은 새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과시 찬연했던 별들은 커다란 구름에 가려 까무러졌다. 수평선 너머로 길게 물안개 조각들이 흩어졌다. 이어서 성시경의 「태양계」가 나왔다. 그녀가 물었다.

- 당신의 사랑은 어땠나요?

- 내 사랑은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 거짓말. 그랬음 여기 안 왔죠.

- 그런가요. 이렇게 말하지 않으면 영영 그 사람을 못 잊을 것 같은데.

- 잊고 싶나요?

- 글쎄요.

- 솔직하게 말해 줘요. 어떤 사람이었나요?

나는 한때 스스로에게 설아를 설명하려고 부단히 애를 썼지만, 번번이 실패했었다. 대신 나는 곱씹던 말을 꺼냈다.

- 우린 아홉 가지가 달라도 한 가지가 맞으면 열만큼 기뻐했어요.

그녀가 은은하게 웃으며 말했다.

- 예술가네요.

- 힘들었어요.

- 얼마나 만났는데요?

- 햇수로 3년이고, 헤어진 지는 2년 돼 가네요.

- 다시 만난 적 없어요?

- 네, 그래서도 안 되고요.

 4월에 그녀가 보낸 편지와 테이프로 설아의 마음은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내려놨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나를 완전히 잊을 것이다. 우리는 알고 있다. 다시 만나야겠다는 서툰 고독이 물감처럼 선연한 추억을 외려 마르게 할 것을. 더구나 라디오의 사연처럼, 그녀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나를 떨쳐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내 옆의 별빛 씨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생각에 잠기더니 나를 바라보고는 말했다.

- 잊지 못한다고 사랑할 수 없는 건 아니지 않을까요?

- 다른 누군가와 손잡은 채로 마주칠 자신이 없어요.

- 그건 그 사람이 아직 당신을 사랑한다고 믿어서예요.

 맞아. 나는 속으로 말했다. 그리고 당신이 내게 닿는 순간마다 설아가 스쳐 지나가서. 갑자기 그녀가 내 옆으로 바싹 다가와 귀엣말을 건넸다.

- 이런 때에도 생각나겠죠.

 나는 물러나지 않고 말했다.

- 맞아요.

그녀는 내 어깨를 톡톡 두드리더니 머리를 기대고 말했다.

- 다들 떠올려요. 정말 아닐 것 같은 사람도 고민해요. 인기척도 없는 늦은 새벽, 아파트 뒤편으로 먼동이 꿈틀거리죠. 제발 좀 잠들려는데 얼핏 그 사람이 떠오르는 거예요. 남자에게 오후 다섯 시의 그림자(five o'clock shadow)가 있다면, 여자에겐 새벽 네 시의 그믐달이 있어요. 면도한 수염이 자라는 것처럼, 나도 모르게 다크서클이 내려앉는 거죠. 뜬눈으로, 혹은 꿈속에서라도 누구나 한 번쯤은 겪어요. 그 망연한 새벽을 당신은 모르겠죠.

- 모르진 않죠. 해 뜨는 걸 보면서 잠드는 게 싫어서 난 나를 지치게 했어요.

- 인간은 누구나 고독해요. 정현종의 『섬』 아시나요?

-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누구나 한 번쯤 망망대해를 가로지르는 모험가였다. 가없는 사랑의 바다, 저 멀리서 포환이 날아들면 배는 부서지고 귀퉁이가 깎여나갔다. 테세우스의 배는 아니었다. 고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육지에 다다라, 제주의 정낭처럼 대문이 활짝 열린 집을 짓고 싶었다. 멀리 가는 사람이 되어 그 언젠가는 휘센의 노이슈반슈타인처럼 신비로운 성을 남기고 싶었다. 설아는 우리의 배에 계절마다 꽃을 놓았다. 나는 묵묵히 노를 저었고, 포환을 맞으며 계속 갔다. 짐작건대, 혼자만의 힘으로는 다다를 수 없는 육지를 위해 사랑이 있는지도 몰랐다. 누구도 그 육지를 볼 수 없고, 우린 차라리 바다를 믿어야 했다. 하지만 설아는 육지를 찾았다. 육지는 섬이었고, 난 그 섬을 지나쳤다. 별빛 씨가 말했다.

- 그 섬에는 갈 수 없어요. 알죠?

 그래, 섬은 설아를 데리고 바다를 빠져나갔다. 나도 이미 오래전 배를 돌렸다. 하지만 닻이 박혀 쇠줄만이 팽팽해졌는지도 몰랐다. 모른다는 것이 아는 것이다. 나는 오직 나만을 이끌 수 있고, 설아의 마음은 알 수 없는 그대로 보내줘야 한다. 문득 설아와 헤어진 후에 줄곧 길벗이 되었던 단 하나의 송별곡, 김동률의 「동반자」가 스쳤다. 그녀는 나긋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 당신은 그 사람 없이도 멋져요. 섬을 잊으세요.

- 잊는다……, 그 변화가 두렵습니다.

- 당신이 변하는 만큼은 그분도 변하겠지만,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말아요. 누구나 겪고 받아들여야 하는 감정인 것 같아요. 좋든 싫든, 당신은 지금도 변하고 있어요. 특별한 순간도 새로 생기고 있고.

- 지금 이 순간이 특별하기는 하죠. 그 사람에게 그런 날들을 허락하지 못하는 건 예의가 아니겠네요.

- 그분은 잘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잊을 생각 말고, 마음속에서 놓아주기만 하세요. 괜찮아요.

 잘 있다는 말도, 놓아주라는 말도 아팠다. 별빛 씨의 말처럼, 설아가 혹시 아직 나를 사랑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내가 누군가와 손을 잡고 그녀를 마주쳤을 때, 설아의 눈빛이 무력해 보일까 봐. 그렇다. 연애의 처음과 끝, 그 이후까지도 늘 나를 붙잡던 화두는 인정에 관한 것이었다. 앞서 나는 헤어짐이란 이제 다른 세상에서 다른 삶을 살다 다른 끝을 맞이할 것이라는 서글픈 진실을 인정하는 일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나는 차마 끄덕일 수가 없었던 거다. 그녀가 부드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 당신이 그분을 진심으로 사랑하여 잊지 못한다면, 그분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그분은 당신이 꿈을 이루며 행복하게 살기를 바랄 거예요. 여기는 제 첫사랑이랑 왔던 곳이에요. 여자의 마음이 그래요. 절 믿어도 돼요. 그리고, 남자보다 여자가 잊는 데 더 오래 걸린대요.

- 저도 첫사랑이랑 여길 왔었어요.

- 나아질 거예요. 너무 마음 쓰지 말아요.

- 고맙군요.

 별빛 씨의 가지런한 눈꺼풀과 수줍게 올라간 입꼬리를 바라보았다. 그녀를 끌어안고 싶었다. 그 보드라운 품에서 왈칵 눈물을 쏟으면 비록 볼품없는 마음이어도 나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말했다.

- 우리가 만나게 된 게 우연만은 아니었군요

- 물론 아니죠. 완전한 우연은 없지 않을까요?

- 그러네요.

 그녀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내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더니 장난스럽게 물었다.

- 운 거 아니죠?

나는 단호한 척 답했다.

-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별빛 씨는 네, 어련하시겠어요, 하는 우스운 표정으로 끄떡거리곤 허리를 펴며 기지개를 켰다. 어느새 잔바람에는 새벽녘의 맑고 차가운 물기가 어렸다. 월말의 이지러진 반달이 수평선 남쪽 끝자락에 걸려 있었다. 그녀를 따라 팔을 쭉 뻗고 허리를 이리저리 비틀었다. 우두둑 소리가 새삼스럽게 크게 들렸다. 놀란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보더니 허리에 손을 짚으며 괜찮냐고 물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 나이 들어서. 피곤하지 않아요?

- 저는 괜찮아요, 젊어서. 근데 추워요.

- 그럼 저 담배만 피우고 와서, 걸을까요?

- 아니, 또 가요?

- 네, 어쩔 수 없어요.

- 이번에는 안 기다릴 거예요.

- 얼른 올게요.

 멋쩍은 웃음으로 일어나 뒷걸음쳤다. 그녀는 고개를 홱 돌리고 바람에 말려 올라간 치맛단을 매만졌다. 난 남쪽으로 푹푹 걸어 적당한 자리에서 바지를 털고, 끝이 뭉툭해진 담뱃갑을 꺼냈다. 구겨진 연초에서 습한 바닷바람 맛이 났다. 달빛이 붓처럼 파도에 맞닿아 기다란 선을 어른어른 그리더니, 물거품에 부딪혀 휘돌다 모래톱에 봉우리를 내질렀다. 연기는 파도 소리의 빈틈에 묻혔다. 난 주위를 둘러보며 첫눈에 들어온 분홍색 가리비 껍데기를 들어 살펴보았다. 먼 길을 유랑했을 손바닥만 한 껍데기에는 여로의 풍파가 새겨져 있었다. 나는 그것을 달에 비춰 반짝이는 모양을 바라보다 바다 한가운데로 던졌다. 껍데기는 힘없이 날다 포말에 얹혀 다시 여정의 기착지로 빨려들었다. 뒤에서 그녀가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소리쳤다. 나는 팔을 들어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였다. 총총 걸어가는 그녀의 긴 치마가 달맞이꽃처럼 나풀거렸다. 나는 천천히 돌아갔다. 우리가 앉았던 곳 뒤편으로 불 꺼진 상점들이 눈에 띄었다. 주변 어느 곳에도 화장실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그녀를 기다렸다. 바람은 수면제 같았다. 몽롱한 채로 서성였다. 이윽고 그녀가 주택가로 뚫린 어둑한 골목을 빠져나와 잰걸음으로 곁에 부딪혔다. 나는 눈을 찡그리며 말했다.

- 혼자 두고 간다고 뭐라 하더니. 어디까지 간 거예요?

- 화장실이 있어야 말이죠. 한참 찾았어요.

- 다 닫았던데, 어디로 갔어요?

- 굽이굽이 안쪽까지 갔네요, 뭐.

- 다행이네요. 가볼까요?

그녀는 내 팔을 툭 건드리며 작은 소리로 웃었다. 나는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녀가 말했다.

- 좋아요. 그래도 기분 좋아졌나 보네요. 아까는 맨입으로 바다에 빠진 사람 같았는데.



비틀거릴 내가 안길 곳은 어디에

김현식, 내 사랑 내 곁에



 가없는 사랑의 바다. 육지를 지우는 만조, 내딛지 못한 발걸음, 빈틈없는 어둠에도 끝내 피어나던 달맞이꽃. 그곳에서 난 망설인다. 별빛 씨의 강인한 서정이 날 쥐고 흔든다. 한때 설아를 앞질러 맞던 파도, 언제라도 내가 너를 지켜 주겠다던 다짐. 그 속으로 별빛 씨를 떠밀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되는 걸까? 혹은, 그래야만 난 설아를 이해할 수 있을까. 그렇게 되면 결말을 견딜 자신이나 있나.

 옳은 길도, 정답도 없다. 예측해봐야 소용없다. 오직 선택뿐, 시동을 건다. 난 별빛 씨를 보며, 전에 없이 다정하게 말했다.

- 한 번 빠져 볼래요? 나쁘지 않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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